19.
여유로운 미소였다.
남작의 응접실 상석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황태자의 모습은 느긋하고 여유로웠으며, 마치 그림과 같은 자태였다. 지금 당장 초상화가를 불러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온화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남작은 방금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발렌시아 남작님께서 지금 저를 엿 먹이시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우아한 손놀림으로 팔걸이에 있던 손을 자신의 허벅지 위로 걸치며 황태자가 말했다.
“서, 설마요. 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황태자 전하께 그런, 그러니까, 불경스러운 일을 하겠습니까?”
“아, 그럼 발렌시아 남작님께서 미친 거로군요.”
“아,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
시종 미소를 띤 채 말하는 황태자 때문에 남작은 더욱 종잡을 수가 없었다. 분명 얼굴은 상냥하기 그지없는데, 입에서 내뱉는 말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오해라…….”
“네. 전하.”
“오해란 말이지요.”
비오스트는 뭔가 생각하는 듯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리고 그 손가락에 제 목숨이 달린 것처럼, 남작은 그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분명, 남작님의 딸을 제 황태자비로 삼겠다 말씀드렸습니다.”
“예, 예. 그, 그렇지요.”
“그런데 미래의 내 신부를 남작님께서 감히, 산 채로 불태워 죽이려고 하셨단 말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전하.”
“그게 아니라면 뭘까요?”
마치 자신은 매우 관대한 사람인지라 충분히 설명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이 비오스트는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남작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는 딸이 있었습니다. 딸이 둘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약간의 오해가 생겼습니다. 저는 황태자님이 말씀하신 신부가, 저의 둘째 딸인지 알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제 시종과 하지 않았던가요?”
“네, 네. 그렇지요. 그래서 일을 바로잡으려고 했으나, 그러니까, 말씀하신 저의 장녀는, 그러니까 라일라는 태생에 조금 문제가 있어서…….”
말이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 남작은 지금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럴듯한 말로 둘러댈 것인지, 아니면 제 입으로 제 딸이 마녀라고 말을 해야 할 것인지 말이다.
“태생에 문제가 있다는 건 무슨 말씀이시지요?”
“그게, 그러니까…….”
“언니에게는 저주가 걸려 있습니다.”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든 것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아리아드네였다.
상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검은 드레스를 입은 아리아드네는 침통한 표정으로 사뿐사뿐 안으로 들어와 황태자께 예를 표하였다. 비오스트는 그런 아리아드네를 무심한 눈길로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가문에 누가 될까 봐 이제껏 숨겼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리아드네가 깊게 고개를 숙이자 풍만한 그녀의 가슴골이 황태자의 바로 앞에 보였다.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비오스트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잠시 앉아도 될까요?”
“…….”
황태자의 침묵이 허락이라고 짐작한 것인지, 아리아드네는 들어올 때처럼 사뿐사뿐 걸어서 제 아비의 옆에 앉았다.
“언니는 태어날 때부터 악취가 났습니다.”
“얘야…….”
“아버님, 더는 황태자 전하께 숨길 수가 없어요.”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을 사리문 아리아드네는 처연한 눈빛과 표정을 하고 비오스트를 바라보았다.
“저희 언니는 무슨 저주를 받은 것인지, 태어날 때부터 악취가 났습니다. 저희는 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온 나라를 뒤졌지만, 그것은 사람이 손쓸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지요.”
아리아드네는 눈물이 글썽이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병은 고치지 못하고, 가문의 재산만 다 날리게 되었죠.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언니의 악취를 알게 되면서 마녀라고 소문이 나게 되었고요.”
그녀는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며,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는 그를 보며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황홀해했다.
저 반짝이는 금빛 눈은 정말로 근사했다. 게다가 그 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더욱 짜릿했다.
“저희는 어쩔 수 없이 언니를 저택에서 내보내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라도 해야 언니에게 지원해 줄 수 있을 테니까요. 피붙이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심정을 황태자님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그건 한겨울의 추위가 살을 에는 기분이랍니다.”
“아리아드네. 그대는…….”
천천히 황태자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리아드네는 그 섹시한 입술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싶어서 귀를 쫑긋 세웠다.
“개소리를 참으로 그럴듯하게 하는 재주를 가졌군요.”
“네?”
하지만 쫑긋 귀를 세운 보람도 없이,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눈을 깜박이며 황태자를 쳐다보자 그는 여전히 우아하고, 상냥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금빛 눈은 여전히 근사했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은 ‘개소리’라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순간 나는 내 앞에 사람이 아니라 개새끼가 앉아 있는 건가 하고 착각할 뻔했지 뭡니까.”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방금 개소리 운운한 것은 눈앞의 잘생긴 황태자가 맞았다.
“재산을 날렸다고 하기에는, 이 저택이 너무 근사한 것 같은데요? 지금 영애의 드레스도, 보석도 전부 화려하고.”
“이, 이것은…….”
“게다가 나는 왜 내 신부를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려고 했는지 이유를 물었지, 내 신부가 마녀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물어본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 제가 지금 하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황한 아리아드네는 손으로 테이블을 살짝 짚으며 상체를 비오스트의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저희도 언니를 희생시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하지요. 제 피붙이를 죽이고 싶어 하는 가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
“언니는 마녀였습니다. 저희는 마녀임을 알면서도 감히 황태자비가 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둔 불충한 신하가 될 수 없었기에…….”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지?”
드디어 비오스트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고야 말았다. 그의 싸늘한 목소리는 이제까지의 상냥한 황태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게다가 평소와 같은 존댓말도 아니었다.
“감히, 내 신부가 마녀라는 그 말. 네가 충분히 책임질 수 있는 거겠지?”
“언니는 분명히 악취가 나는…….”
“나지 않았다.”
“네?”
“네 언니에게서, 그 마녀라고 불리는 여자에게서, 라일라에게서는, 전혀 악취 따위는 나지 않았다.”
“네?”
싸늘한 눈빛과 차가운 목소리로 하나하나 같은 사람을 꼽아 가며 말하는 비오스트를 보며 아리아드네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직접 라일라를 만났고, 내가 느끼기에는 전혀 냄새가 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내가 거짓을 말한다는 것이냐?”
“그, 그게 아니라.”
당황한 아리아드네를 보면서도 비오스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날카로운 금색의 눈빛에 아리아드네는 살이 따끔따끔할 지경이었다.
지금의 황태자는 상냥한 황태자와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반말을 시작한 그 순간부터.
“감히 제국의 황태자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말하다니, 반역이로군. 반역자를 온라이언의 귀족으로 둘 수는 없지. 지금 이 시각부터 발렌시안 가문의 남작 작위를 박탈하겠다.”
“저, 전하…….”
가만히 제 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남작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황태자비가 될 내 신부에게 악취가 난다느니, 마녀라느니 하는 누명을 씌우다니, 이 역시 반역죄. 벌로 발렌시아 남작의 저택을 불태운다.”
“화, 황태자 전하!”
이번에는 새된 목소리의 아리아드네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다고 해서 눈 하나 깜짝할 비오스트가 아니었다.
“오해십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아리아드네의 손이 비오스트의 팔을 황급히 붙들었다. 힐끗, 비오스트의 시선이 그 손을 향했다.
“전부 오해십니다, 황태자 전하.”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비오스트를 보며 아리아드네는 억지로 미소를 짜내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에서 팔을 타고 올라오는 황태자의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근사한 금빛 눈은 없었다. 싸늘한 눈만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싸늘하다는 것은 아리아드네만의 감정인지도 몰랐다.
눈앞의 비오스트의 눈은 아무 감정도 담아내지 않고 있었다. 눈앞의 자신을 사람이 아니라 사물로 보는 것 같은 눈빛에 자신이 스스로 싸늘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더러운 손으로 감히 누굴 잡은 거지?”
천천히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도 감정은 없었다.
더럽다고 말하면서도 어떤 혐오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감히라고 말하면서도 분노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이 짜인 각본인 것 같았다.
“수리!”
커다란 목소리로 밖의 시종을 부르는 목소리도,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오는 그의 시종도. 아리아드네는 전부 무대의 연출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황태자가 시종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드는 순간에도, 그것이 연극 소품과 같이 생각했다. 어쩌면 제 팔이 잘리는 그 순간에도 아리아드네는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엄청난 아픔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아아아아악!!”
“아리아드네!”
남작 영애의 팔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치는 그 순간, 아주 잠시 비오스트의 눈에서 감정의 빛이 돌았다가 사라졌다.
“불태워 버려.”
“네, 전하.”
황태자는 피 묻은 검을 내밀고, 그 시종 역시 일상처럼 그 검을 받았다.
무엇을 불태워 버리라는 건지 그가 말하지 않았지만, 시종은 다 알고 있다는 양 행동을 했다. 그 둘은 고통스러워하는 남작 영애도, 그런 딸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작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발렌시아 남작 저택에서 회색의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