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라일라가 살짝 혀를 내밀자 서늘한 숲의 바람이 닿았다.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비오스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먼저 라일라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저 상처 치료일 뿐인데,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다가 아주 맛있게 만들어진 산딸기 잼을 어쩌다가 아주 잘 구운 빵에 발라서 먹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자신이 비오스트의 귀를 핥아 주면, 그도 자신이 느꼈던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걸까?
비오스트도 발바닥이 간질간질하고,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며,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걸린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게 되는 걸까?
만약 비오스트도 그렇다면,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니 안심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도 그러하다면, 그런 비오스트의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라일라는 비오스트의 귀에 자신의 혀를 가져다 대었다.
“읏!”
라일라의 붉은 혀가 그의 귀에 닿자마자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써!”
황급히 머리를 뒤로 빼며 라일라가 소리쳤다. 그 덕에 숙이고 있던 비오스트의 머리도 들렸다.
“아! 연고에 약초 성분이 있어서 그런가?”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나도 먹어 본 적은 없어서 말이죠.”
“퉤! 퉷!”
비오스트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라일라는 연신 침을 뱉어 댔다. 아까 웃는 얼굴이 꼴 보기 싫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 싶었다.
‘분명 알았던 거야. 함정이었던 거지. 내가 쓴 것을 맛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고 싶었던 거야. 저 변태 같은 놈! 그렇지 않으면 평소에는 다정하게 느껴졌던 미소가 그렇게 음흉하게 느껴졌을 이유가……!’
갑자기 라일라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녀는 스스로의 생각에 경악했다.
‘다정하게 느끼다니! 그따위 걸 느껴서 뭘 어쩔 건데!’
“왜 그래요?”
발을 멈추어 버린 라일라를 향해서 비오스트가 물었다.
“얼굴도 빨간 것 같은데. 혹시 힘든 거면…….”
“아니야!”
얼굴에 걱정스러운 빛을 띠고 자신을 바라보는 비오스트를 향해서 라일라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 간다고!”
라일라는 비오스트보다도 먼저 성큼성큼 발걸음을 떼었다.
비오스트는 얼른 그런 라일라는 쫓아가지 않고,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재밌는 고양이야.’
설마 제가 먼저 치료를 해 주겠다고 할지는 몰랐다. 그렇게나 야한 향기를 가진 주제에 그 붉은 혀로 자신의 귀를 핥아 주겠다니. 그러면서 얼굴은 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순진했다.
아니, 실제로 라일라는 아무것도 몰랐다. 여성이 남성에게 귀를 핥아 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몰랐으니 먼저 그런 제의를 한 것이었다.
‘아깝네.’
라일라가 제 귀를 핥아 주는 것을 은근히 기대했던 비오스트는 진심으로 아쉬웠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온 라일라의 향기를 듬뿍 들이마셨고, 향기가 짙게 배어 든 라일라의 숨결이 자신의 귓구멍에 머물렀으며, 작지만 뜨거웠던 그 혀가 귓불에 닿았던 그 느낌을 알게 되었다.
조금 전의 그 짧은 순간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오늘 밤은 혼자 절정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그것만으로는 절대로 부족한 순간이 찾아오겠지만.
* * *
발렌시아 남작저를 지키고 있는 것은 지난번과 같은 경비였다.
라일라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그녀를 알아본 것인지, 아니면 냄새가 나기 시작한 것인지 그는 이미 코를 감싸 쥐고 있었다.
“저리 가 있어.”
라일라는 자신의 뒤에 서서 걸어오고 있던 비오스트에게 명령 아닌 명령을 했다.
“어째서요?”
“저기가 우리 집이야.”
라일라는 팔을 들어 남작의 저택을 가리켰다.
“그렇군요.”
라일라의 손끝을 쳐다보며 비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어젯밤 가장 좋은 방에서 잠들고, 아침을 먹고 느긋한 기분으로 나선 저택이었다.
“그러니까 어디로 가 버리라고.”
“그러니까 어째서요?”
“오랜만에 집에 가는데, 그것도 뭔가 부탁을 해야 하는데 이상한 남자가 있으면 안 되니까.”
사실, 비오스트는 한 번에 라일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까다로운 황실의 가정교사들, 학자들, 대신들의 말을 모두 이해하고, 훌륭한 답변을 내놓던 그가 라일라의 방금 그 말은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완벽하신 황태자 전하를 감히, 이상한 남자라고 칭한 간 큰 인간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비오스트의 눈이 가느스름해지며, 설마 그 이상한 남자가 나를 말하는 것이냐는 듯 라일라를 바라보았다. 라일라는 알아들었으면, 당장 꺼지라는 시선을 보내왔고 말이다.
“뭐, 정 원하신다면.”
비오스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뒤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제야 라일라는 만족한 표정으로 씩씩하게 남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입구에 선 경비병의 인상이 찌푸려진 것이 더욱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힐끗, 라일라가 뒤를 돌아서 보자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선 비오스트가 보였다.
‘멍청이! 저래서야 똑같이 수상해 보이잖아.’
라일라는 당장 어디론가 가 버리라는 듯, 그를 내쫓는 시늉을 했다. 서 있던 비오스트가 그녀의 손짓을 알아들었는지, 몇 걸음을 더 걷고 나서 라일라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멈춰.”
이번에도 자신의 가슴팍 앞에 겨눠진 창을 보며 라일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문 앞에 선 경비병의 얼굴은 라일라가 인상을 찌푸리기도 전에 이미 찌푸려져 있었다.
“나 누군지 몰라?”
“…….”
“지난번에 봤잖아. 나 발렌시아 남작 영애야.”
“알아.”
“너 멍청해? 내가 발렌시아 남작 영애라고 하잖아.”
“……압니다.”
라일라의 표독스러운 말에 그는 내뱉듯이 존댓말을 던졌다.
“이것도 치워.”
하지만 그녀의 가슴을 찌를 듯이 드리워진 창은 그대로였다.
“치우라고 말했어.”
“그럴 수 없습니다.”
“아버님께 당장 말해서……”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기다리시죠.”
“내 가슴에 이따위 쇠붙이를 가져다 대고 말이야?”
“…….”
“심지어, 심장에?”
싸늘하게 내뱉는 라일라의 말에 경비병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지난번처럼 그렇게 안하무인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두려움이 말하고 있었다. 이제 그도 알게 된 것이었다.
라일라가 그저 냄새나는 미치광이 여자가 아니라 마녀라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다. 그녀를 두 가지로 보았다. 냄새가 나는 혐오스러운 여자. 혹은, 저주를 내리는 두려운 마녀.
남자는 전자에서 후자로 전환된 것에 불과했다.
“두려워?”
라일라의 말에 창끝이 움찔하고 떨렸다.
“무서워?”
남자의 얼굴에 더욱 긴장감이 서리었다. 창을 쥔 남자의 손이 더욱 단단히 힘을 주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닿을 듯, 말 듯 하던 그 창이 끝내 라일라의 가슴에 꾹- 하고 닿고 말았다.
라일라는 고개를 내려, 닿은 그 창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 창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천천히 새파란 분노를 뿜어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마녀를 보며, 경비병은 거의 오줌을 쌀 지경이 되었다.
“라일라!”
경비병의 뒤쪽에서 들리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에 마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새파란 분노가 모두 신기루였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
“살아…… 있었구나.”
남작의 목소리에 담긴 말은 쉬이 그 의미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건지, 유감이라는 건지, 모호한 목소리와 말투에 라일라는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버지와 딸.
영주와 마녀.
죽이려고 했던 자와 죽을 뻔한 자.
두 사람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집이 불탔어요.”
“……그랬구나.”
“그래서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그렇겠구나.”
“…….”
“…….”
집이 없어졌다는 딸에게 남작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이미 대답이었다.
그는 경비병에게 창을 치우라고 말하지도, 대문을 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딸을 집 안으로 들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바보가 아닌 라일라 또한 그것을 알아차렸다.
“제가…….”
말문을 열었던 라일라의 입이 다시 닫혔다.
여전히 남작은 창살 같은 대문 안이었고, 여전히 창은 라일라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여기에 온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버림받은 딸이었다.
“저를 죽이려고 하셨나요?”
라일라는 도움 대신에 궁금한 것을 묻기로 했다.
“그게…….”
“제가 죽었으면 좋겠나요?”
“…….”
차마 남작은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했다. 그저 고요히 자신을 쳐다보는 딸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아마도 그것이 자신의 딸이 아니라 마녀라서 그럴 것이다.
“저도 그래요.”
툭- 하고 한 방울이 눈물이 라일라의 눈에서 떨어져 내렸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껴 본 것은 아주 까마득한 일이었다. 슬픔은 뭔가 기대를 하고, 그것이 꺾이는 것에 대한 감정이었지만, 라일라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라일라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슬픔보다는 분노였고, 체념이었고, 포기였다.
“저도 제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가슴을 찌르던 창이 이제 더는 라일라를 찌르지 않았다.
그것은 딸을 가엾이 여긴 남작이 치우라고 해서도 아니었고, 그녀의 슬픔에 공감한 경비병이 창을 치워 줘서도 아니었다.
라일라가 뒤로 물러서고, 남작의 저택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해서였다.
감정의 밑바닥에 굴러다니던 말라비틀어진 슬픔 따위는 오늘도 아무 힘이 없었다. 포기가 훨씬 빨랐고, 체념이 훨씬 간단했다.
라일라는 천천히 걸으며 지금 계절에 숲에 있을 독버섯이나 독초를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있는 계곡의 깊은 웅덩이를 생각했다. 그 근처에는 절벽도 있었다.
이제 신 따위는 버리기로 했다. 후생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 지금의 지옥을 오늘 끝내기로 라일라는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