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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꽃-16화 (16/88)

16.

달 아래 아름다운 검은 짐승이 있었다.

흔들리는 횃불의 빛을 받은 검은 털은 매끄럽게 빛이 났고, 밤이라 적당히 확장된 고양잇과 특유의 아름다운 황금색 눈동자 역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유려한 곡선을 동시에 지닌 검은 재규어 한 마리가 쓰러진 남자의 등을 밟고 서 있었다.

“갑자기 저게 어디서 나타난 거야?”

한스의 입에서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가 당황하는 사이 재규어는 미끈한 꼬리를 휘두르며 등을 밟고 있던 남자의 위에서 내려왔고, 어슬렁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스와 재규어의 사이에도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기만 할 뿐, 감히 저 검은 짐승을 어쩔 수 있는 용기는 없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짐승은 너무 컸다. 보통의 재규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자나 호랑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의 크기였다.

짐승의 앞발 하나가 사람의 머리 하나 정도는 되어 보였으며, 그 힘은 방금 본 대로 사람 하나를 쓰러뜨리는 것은 일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거 놔!”

검은 짐승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정신 팔린 사이에 라일라는 마구 발버둥을 쳐서 도망가려고 했다. 덕분에 다리를 들고 있던 사람이 손을 놓쳐서 그녀는 다리만이라도 풀려나서 땅을 디디고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사람들이 보고 있던 것을 라일라의 눈으로도 볼 수 있었다.

“저렇게 큰 게 이 숲에 있었다고?”

라일라도 10년이 넘게 이 숲에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짐승이었다. 언젠가 나무에 있던 발톱 자국으로 봐서, 곰이 한 마리 정도는 있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저런 커다란 재규어는 정말로 본 적이 없었다.

그 짐승은 조금도 급하지 않은 몸놀림으로, 몹시도 우아하게 걸었다.

“워, 워이!”

결국, 앞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옆으로 물러나 버리고, 이제 짐승과 마주하게 된 것은 라일라와 그녀를 붙잡고 있는 무리였다.

한스는 위협이라도 할 참인지 눈앞의 횃불을 짐승의 앞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검은 짐승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 이건 도대체…….”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 짐승이라니. 한스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뒤에 있던 라일라를 붙들고 있던 무리 역시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라일라 역시 그들에게 붙잡힌 채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네 짓인 거지!”

라일라의 팔을 붙들고 있던 사내가 그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네가 마녀의 힘으로 불러낸 거지?”

남자의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고, 라일라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렇게 큰 짐승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을 테니까.

“당연한 것 아니야?”

하지만, 굳이 진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라일라는 자신이 불러낸 짐승이 맞는다는 듯 허세를 부리며 남자를 향해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당장 저걸 집어넣어!”

“싫은데?”

단칼에 거절하는 라일라를 보며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정말로 라일라가 저것을 불러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부탁하는 태도가 글렀잖아.”

라일라가 차가운 조소를 날렸다. 물론, 사실은 저 짐승을 돌려보낼 능력이 없어서였다.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라일라는 잡힌 손목이 아프고, 발목이 아파 당장이라도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여자일 뿐이었다.

“저리 가!”

한스는 한 걸음 한 걸음 자신들을 향해서 다가오는 짐승에게 다시 한번 횃불을 휘둘렀다. 하지만 역시 검은 짐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산짐승이라면 불을 무서워하는 것이 맞았다. 아니, 애초에 산짐승이라면 사람이 이렇게 우글거리는 곳에 나타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더군다나 덮친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었다. 이 짐승은 사냥이 아니라 유희처럼 자신들을 덮쳤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놀라는 것이 재밌고 유쾌한 것처럼 보였다.

힐끗, 한스의 시선이 자신의 뒤에 있는 라일라를 향했다. 정말로 마녀가 불러낸 짐승인지도 몰랐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주문 같은 걸 외우는 낌새는 없었는데, 대체 언제 저런 커다란 짐승을 불러냈단 말인가!

“에잇!”

한스는 들고 있던 횃불을 짐승을 향해서 집어 던졌다. 붉은 불이 검은 짐승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짐승의 눈이 빛 때문에 가늘어졌다가, 다시 커졌다.

그 찰나의 변화가 마치 그것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짐승은 제 몸을 낮추고 으르렁거리며 위협적인 제 이를 드러내었다.

하지만 한스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대신 번개같이 몸을 돌려 라일라를 향했다. 옆에 차고 있던 칼로 저 마녀의 심장을 바로 찌르면, 저 사술로 나타난 검은 짐승이 사라질 터였다.

“마녀의 심장을……”

옆에 차고 있던 칼을 빼 들려던 한스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손이 칼에 닿지 않았다. 아무런 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깜박깜박.

그가 눈을 깜박이는 동안 눈앞에 경악한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더불어, 그 악독한 마녀마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왜……?

의문은 곧 사라졌다. 지독한 고통이 어깨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 어깨만이 아니었다. 거의 몸통 전체가 고통이었고, 연결된 신경 하나하나가 전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악!!”

한스의 몸에서 후두둑거리며 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짐승의 커다란 아가리에 몸통이 절반 정도 먹힌 한스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짐승이 살짝 고개를 까닥이자 곧 한스의 비명이 멎었다. 그의 몸통의 1/3 정도가 그 고갯짓에 뜯겨 나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맙소사…….”

처음 보는 끔찍한 광경에 라일라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순간 짐승의 금빛 눈이 라일라를 향했다. 놀란 그녀의 눈이 커지는 순간, 슬쩍 짐승의 눈이 반짝였다.

짐승이 다시 입을 벌리자 한스의 몸이, 아니 한스 몸의 일부였던 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아아아악!!”

제 동료가 잔혹하게 죽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들어온 길을 되짚어서, 어떤 이는 바로 옆의 풀숲에 뛰어들어서, 또 어떤 이는 깜깜한 숲의 어딘가로.

챙그랑!

도망치면서 누군가가 던진 횃불 하나가 오두막의 창문을 깨부쉈다.

“앗!”

횃불의 불은 라일라가 낡은 옷으로 만든 커튼에 옮겨 붙었고, 그것은 다시 바싹 마른 나무로 만든 오두막으로 옮겨 붙었다.

라일라는 당장 불을 꺼야겠다는 생각으로 오두막 안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부엌에는 양동이가 있었고, 그것으로 뒤쪽의 시냇물을 길어다가 불을 끄면…….

그렇게 생각하며 움직이려던 라일라는 덜컥, 그대로 굳어 버렸다.

천천히 라일라는 뒤를 돌았다. 거기에는 피 흘리는 시체가 있었다. 그 너머에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남자도 두어 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검은 짐승이 있었다.

오두막의 불을 끄면? 그다음에 자신은 계속 여기에 사는 것일까? 평소와 다름없이?

이제, 사람이 죽었다.

도망간 사람들은 전부 그게 마녀의 탓이라고 할 것이다.

숲속의 오두막에 사는 마녀가 검은 짐승을 불러내서, 사람을 죽였다고. 과연 그들이 자신을 가만히 둘까?

숨죽인 채, 아무 피해도 주지 않고 살아도 자신을 죽이려고 들었던 사람들인데?

라일라의 아버지는 그녀를 죽여도 된다고 허락했다.

항상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완벽하게 버림받은 라일라였다.

불은 천천히 오두막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고 있었다.

“끝이네.”

라일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10년 동안 살았던 오두막이 불타고 있는데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라일라의 모든 물건이 저 안에 있는데도, 무엇 하나 꼭 가지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저 안에는.

밖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부모는 그녀를 버렸다. 친구는 없었다. 연인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라일라에게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천천히 라일라가 다시 뒤를 돌자, 이제 아예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은 검은 짐승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라일라를 해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송곳니도, 날카로운 손톱도 모두 숨긴 채였다.

“너는…….”

입을 열었던 라일라는 이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누구냐고 물어본들, 짐승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본 들 마찬가지였다.

대신, 라일라는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왜 난 해치지 않아?”

이것 역시 대답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짐승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금빛의 눈이 라일라를 관통하듯이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어쩐지 익숙한 눈빛이라고,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눈이라고 라일라가 생각하는 순간, 뒤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라일라가 뒤를 돌자,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불탄 오두막의 지붕이 내려앉고 있었다.

“엇!”

밀어닥치는 열기에 라일라가 두어 발자국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 오두막은 더욱더 맹렬하게 불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위험하겠…….”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라일라가 고개를 돌렸을 때,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커다란 고양이처럼 얌전히 앉아 있던 검은 짐승은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라일라가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흔적도 없이 이미 사라진 뒤였다.

“다시, 혼자네…….”

불타오르는 오두막을 배경으로 라일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짐승일지라도 제 편은 처음이었다. 누군가-누군가라고 하기에는 좀 어려울지 몰라도- 자신을 도와준 것도 처음이었다.

라일라의 쓸쓸한 중얼거림을 들으며, 그녀의 오두막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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