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14화 (14/88)

14.

“말도 안 돼.”

아리아드네는 꼭 서른 번째로 그 말을 중얼거렸다. 만약 이 자리에 그 얄미운 황태자의 시종이 있었으면, ‘말이 됩니다.’라고 자신의 말을 되받아쳤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가 그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내가 아니라고?”

“아리아드네. 이제 제발 진정하고…….”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왈칵 화를 내며 자신을 달래려 하던 제 아버지를 향해서 아리아드네가 돌아서자 그녀의 구두에 깨어진 화병 조각이 밟혔다.

깨어진 것은 화병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구두 굽에 구멍이 뻥 뚫려 버린 그림도 있었고, 벽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던 수사슴 헌팅 트로피는 한쪽 뿔이 부러진 상태였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 역시 한가득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지만, 그것들은 찢어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가장 저렴한 것이라 차라리 그게 찢어지는 쪽이 남작의 마음이 덜 찢어졌을 텐데 말이다.

“무, 물론, 네가 지금 진정하기는 어렵겠지.”

역시 자신의 가장 어려운 상대는 아리아드네라는 생각을 하며 남작은 식은땀을 흘렸다.

“제가 아니라, 라일라라뇨? 그 냄새나는 게 황태자비라뇨?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아버님?”

“말이 안 되지.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내가 정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

“어쩔 수 없다뇨?”

아리아드네의 눈이 위로 쭉- 찢어졌다. 더욱더 사나워진 제 딸의 얼굴에 남작은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했나를 재빨리 되짚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 시종 말처럼, 그 물건도 아버지의 딸이니 그것이 황궁에 가도 상관없어서 이러시는 건가요? 어쨌든 내 딸이 황태자비가 되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정신 차리세요, 아버님! 걔는 마녀라고요!”

버럭 소리를 지르는 아리아드네의 목소리에 끝내 발렌시아 남작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황태자 전하의 취향이 그렇게 이상한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그래요. 그분의 취향이 독특해서 라일라를 데리고 갔다고 쳐요.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으세요?”

“그거야…….”

“당연히 얼마 못 가죠.”

아리아드네는 제 아버지가 생각하고,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 간단한 것을 뭘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 윽박지르며 자신이 대신 대답했다.

“그냥 특이하고, 신기해서 걔를 데려가려는 모양인데, 어디 그게 누구한테 귀염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여자예요? 전 얼마 전에도 걔를 만났는데, 정말로 코가 썩는 줄 알았다고요. 아버님도 아시잖아요.”

“아, 알지. 나도 아는데…….”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지도 제일 잘 아실 거잖아요!”

“얘, 아리아드네야. 지금 이 일이 네 아버지를 몰아붙인다고 되는 일이 아니지 않니.”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작 부인이 제 남편이 당하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슬쩍 끼어들었다. 그녀라고 해서 제 딸의 성깔을 감당해 내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딸 바보로 오냐오냐하는 아비보다는 나았다.

“안 몰아붙일 수가 있나요? 이건 우리 가문의 패망이 걸린 문제라고요.”

“그건 또 무슨 소리니?”

“마녀가 황태자비가 되는 거예요, 어머니.”

아리아드네는 제 이야기를 잘 들으라는 듯, 진중한 눈빛으로 발렌시아 남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당연히 황태자 전하께서 그 독특한 콩깍지가 벗겨지게 되면 그 마녀는 폐위가 되겠지요.”

고개를 돌린 아리아드네가 이번에는 발렌시아 남작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럼, 감히 마녀를 황태자비 자리에 올려서 황실의 계보에 먹칠한 가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 아니. 이건 우리가 라일라를 보낸 것이 아니라, 황태자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 아니냐. 우리는 그냥 그분의 명령에 따랐을 뿐인데.”

“황궁의 높으신 분이 퍽이나 과거의 자신이 판단을 잘못한 것이라고 인정하겠네요. 폐위된 황실 여인들이 어찌되었는지는 알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또 그 가문은요?”

“그거야…….”

발렌시아 남작의 눈이 깜박였다. 역대 온라이언 제국의 황후들은 그 존재가 미미했다. 워낙에 황권이 강력해서인지, 황실에서는 황태자비나 황후를 굳이 세력가의 가문에서 뽑지도 않았다.

뽑힌다고 해서 그 가문이 위세를 떨치게 된다거나, 대단한 권세를 잡게 되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황후 책봉에 세력가들이 크게 힘을 쓰지 않았고, 설사 황후의 폐위를 황실에서 결정하더라도 크게 반대하는 세력도 없었다. 황태자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종종 황실의 역사서에 보면 폐위된 황실 여인들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를 몰랐다.

더불어, 그 가문의 이야기도.

“모르겠구나.”

“그것 보세요. 황후까지 배출해 낸 가문인데, 이렇게 소리 소문이 없잖아요.”

“하, 하지만 폐위되지 않은 황후를 배출한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원래 제국은 황후의 존재가 미미하지 않으냐?”

“선대 황후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분이야 황후가 되신 지, 1년 만에 황태자님을 낳으시고 돌아가셨으니 그런 거죠.”

“됐다. 지금이 무슨 온라이언 제국의 역사 공부 시간도 아니고.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뭔지 그냥 속 시원히 말해 보아라.”

이번에도 남작과 아리아드네의 공방을 말린 것은 남작 부인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라일라에게 질리게 되면, 당연히 걔를 폐위시킬 거고, 우리 가문도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겁니다.”

“아, 아니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마녀가 황태자비가 되도록 도운 거잖아요. 이건 반역죄나 마찬가지라고요.”

아리아드네의 입에서 나온 아찔한 단어에 남작은 비틀거렸다.

맙소사! 반역이라니!

그저 조금 더 돈을 가지고, 조금 더 땅을 가지고, 조금 더 출세하고자 하는 작은 소망을 가진 지방의 남작인 자신에게 반역이라니! 정말로 얼토당토않은 거대한 죄목이었다.

“정신 바싹 차리세요, 아버님.”

남작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이면서, 아리아드네는 그렇게 말했다.

“저한테 다 생각이 있어요.”

“생각이 있다니?”

“당장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주세요.”

“마을 사람……들?”

“네. 오랜 시간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일을, 이제 결단을 내려 주셔야겠어요.”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라일라를…… 없애야 해요.”

“아리아드네!”

“아리아드네!”

제 언니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는 딸의 말에 발렌시아 남작과 남작 부인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 애인지, 우리 가문인지.”

단호한 표정으로 제 부모를 쳐다보는 아리아드네의 얼굴은 비정하기 짝이 없었다. 당황하는 제 부모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속으로 조소를 머금었다.

저들은 결국 자신의 말을 들을 게 틀림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냄새나는 언니 때문에 갓 태어난 아기가 항상 울어 대자, 라일라는 헛간으로 쫓겨났다.

자신도 크면 언니처럼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냐고, 욕실에 틀어박혀서 몇 시간이고 씻기만 하는 아이 때문에, 라일라는 숲의 오두막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라일라는 아리아드네의 인생에서 쫓겨나는 것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걸, 네가 가질 수는 없어. 냄새나는 더러운 너 따위는 절대로.’

* * *

어두운 밤.

하나의 불빛이 하늘이 아니라 지상에서 떠올랐다. 그리고 그에 감응이라도 하는 듯이, 하나둘 불빛은 늘어났다. 그것들은 모여들어 지상의 은하수를 만들어 냈다.

다만, 그 불빛들은 누군가를 비춰 주기 위한 빛이 아니라,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 가는 빛이라는 것이 달랐다.

“이봐,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거야?”

씩씩하게 앞장을 서고 있는 남자를 향해서 조심스럽게 누군가가 물었다.

“아, 남작님께서 허락하신 일인데, 당연히 괜찮지!”

“아니, 그래도 상대는 마녀잖나!”

“왜? 아직도 안 서?”

선두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남자의 다리 사이를 쳐다보았다. 뒤에 있던 정육점 주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은 그의 얼굴에 횃불이 비쳐서는 아니었다.

“아, 안 서긴 누가 안 서!”

남자는 버럭 소리쳤다.

“다시 자네의 그게 안 서는 일이 없어지려면, 악의 뿌리를 뽑아야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남자를 보면서, 정육점 주인은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봉에 선 남자는 마을에서 힘으로는 따를 사람이 없다는 한스였다. 소문으로는 다친 소를 제가 짊어지고 집까지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족히 십여 명은 되는 인원들이 저마다 손에 횃불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도 전부 마을에서 힘깨나 쓴다는 장정들이었다.

비록 마녀이긴 하나, 상대는 여자였다. 그것도 작고 말라비틀어진 여자였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라면 그런 여자 하나쯤, 상대 못 할 것도 없었다.

마녀가 저주를 걸기 전에 죽여 버리면 되는, 간단한 문제였다.

그 간단한 것을 이제까지 실행하지 못한 것은 그 작은 여자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빌어먹을 마녀가 남작 영애라서였지 않은가?

이제 마침내 남작님께서 허락해 주었으니, 혹시나 그가 쓸데없는 부정에 다시 그 허락을 철회하기 전에 당장 마녀를 처단하는 것이 맞았다.

“별일 없겠지?”

정육점 주인은 일렁이는 횃불들을 바라보며 누군가에게인지 모를 질문을 했다.

이상하게 마음속의 어딘가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자꾸만 벌렁거리는 심장 때문에 남자는 연신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일렁이는 횃불들 때문에 짙은 그림자가 진 익숙한 얼굴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죄 없는 여자를 죽이러 가는 악당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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