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침이 밝았다.
벨차라키 대륙에서 늘 그랬듯 에르카는 어머니처럼 제릭을 깨워 씻고 오게 한 후 또 제릭에게 숲에 가서 먹을 것을 구해 오라고 시켰다.
“먹을 거?”
“그래, 봄 과일이든지 야채든 아니면 씻고 온 데서 물고기라도 좀 잡아오든가. 어서. 빨리.”
“알았어.”
제릭은 제나에게 멋쩍게 웃어 보인 뒤 숲으로 갔다. 이에 제나도 뭔가 먹을 것을 찾으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좀 둘러보고 올게요.”
“그래요, 토끼라도 눈에 띄면 잡아오세요.”
“네, 근데 요정도 고기를 먹나요?”
“그럼, 요정은 이슬만 먹고 사는 줄 알았어요? 아후란의 요정들은 이슬만 먹나 보죠? 아니면 그런 척만 하든지요.”
제나는 연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돌렸다. 그때 에르카의 왠지 차분해진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근데 또 어디선가 오크의 냄새가 나네?”
제나는 가만히 걸음을 세웠다. 돌아보니 머리에 붉은 꽃 하나를 새로 꽂은 에르카가 비춰 오는 아침 햇살 속에서 화살을 당기고 있었다.
표정은 이미 전투적으로 빛나고 있었고, 힘껏 당긴 시위는 당장에라도 제나의 안면에 꽂힐 듯했다.
“무슨….”
제나가 어색한 미소로 묻자 에르카는 그 앙큼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제 입술의 피에서 오크 냄새가 나던데 말이야. 설마 제릭과 함께 오크를 잡아먹었을 리 없고, 아마도 입술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일 텐데 왜 오크의 냄새가 나는 걸까?”
“ …… .”
“인간은 맡을 수 없는 그 희미한 냄새를 요정을 느낄 수가 있지. 자, 어서 해명해 보실까? 어떻게 해서 당신의 피에서 오크의 냄새가 나지? 설마 인간의 탈을 쓴 오크라도 되는가?”
정확히 꿰뚫어 보는 에르카의 눈빛에 제나는 이제껏 감추고 있던 전투적인 미소를 떠올렸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글쎄… 난 기억이 나지 않아. 혹시 모르지. 날아가는 새가 오크의 피 한 방울 떨어뜨렸는데 하필 그게 내 입술에 닿았는지도 말이야.”
“호호, 거 참 아후란의 요정 같은 표현 방식이군. 재미있어. 자, 더 이상 보여 줄 수 있는 게 있나? 아니면 헛소리는 그게 전부인가?”
퓽!
물음과 동시에 화살이 발사되었다. 요정의 화살이 생각보다 빨랐던 것도 있지만 제나는 그 화살이 애초에 겨냥하고 있던 그대로 발사되었다는 걸 감지하고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톡….
아니나 다를까 화살은 제나의 왼쪽 귓가를 스치며 숲으로 사라졌고, 귓불 아래로는 곧 빨간 핏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화살이 날아간 숲에서 아침 바람이 불어왔다.
“흐음… 역시 오크의 피 냄새야. 왜? 벨차라키에서 내가 오크를 한두 마리 죽여 봤어야지. 그런데 그 생생한 피 냄새가 당신의 피 속에 비밀처럼 숨어 있네? 오호라, 이거 점점 더 재밌어지는데?”
“ …… .”
“자, 제릭이 돌아오기 전에 어서 해명해 보시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오크일지 모른다고 제릭에게 싹 일러바칠 테니까.”
“그럴 필요 없어.”
“없다?”
“화살이 귓가를 스칠 때 기억이 났으니까.”
“무슨 기억? 오크의 탈을 뒤집어쓰기 전의 기억?”
“맞아. 바로 그 기억. 내가 그 오크였다는 기억.”
제나가 고백하며 두 눈을 빛내자 에르카는 즉시 시위를 당겼다. 아무것도 없이 시위만 당겼는데 어느새 화살은 그 자리에서 빛나고 앙큼스러운 에르카의 눈웃음도 시위처럼 팽팽해졌다.
“일단 앉지 그래? 제릭이 돌아왔을 때 화살에 꿰뚫려 벌써 숨이 넘어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마음을 써 줘서 고맙군.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그보다 먼저 내가 내 기억을 지울 테니까.”
“어떻게?”
“불에 태워서. 내 기억과 내 기억을 훔쳐본 너의 기억까지 모두.”
제나는 왼손을 앞으로 내밀며 눈망울에 새겨진 마법 주문을 번뜩였다. 그건 마계의 주술을 거는 방법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마법이 발동되어 손 위로 검은 불꽃이 돋아났다. 활활 타오르는 그 암흑의 불꽃에 에르카의 표정이 놀라 흔들렸다.
“마계의 불꽃? 이제 보니 마법사인가? 전혀 그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죽을 운명이니 가르쳐주지. 바로 성스러운 대신전의 신성마법이 나의 모든 걸 가려 주고 있지. 심지어 내가 오크였던 기억까지 말이야.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벨차라키에서 날아온 어떤 요정이 내 피에서 오크의 냄새를 맡을 줄 말이야. 소름이 끼치고 있어. 하지만 괜찮아. 공교롭게도 사방에서 위험이 밀려들 참이니 내 피를 알아본 널 죽인다 해서 제릭이 날 의심할 리는 없겠지.”
“후후, 그게 네 말처럼 될까?”
“미안해요, 요정 아가씨. 내 오래전 모습과 함께 이 불꽃 속에서 녹아 줘야겠어.”
“누구 맘대로?”
퓽!
화살이 발사되었다. 화살은 정확히 제나의 이마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그러나 에르카는 화살을 새로 당기며 급히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상대로 이마를 꿰뚫린 허상이 아닌 실상이 손아귀의 검은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다.
퓽!
그 화살을 검은 불꽃이 집어삼켰다. 하지만 에르카는 삼키지 못했으니 나무 아래로 번개같이 옮겨 간 에르카는 다시 시위를 당겼다. 흠칫하는 제나의 얼굴을 화살이 꿰뚫고 지나갔다.
‘허상?’
재차 놓쳐 버린 상대에 에르카는 번뜩이며 주위를 살폈다. 그때였다.
“늦었어.”
등 뒤에서 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홱 돌아서며 에르카는 방어막을 펼쳤고 그 위로 마계의 검은 화염이 쏟아졌다. 화염은 방어막을 여지없이 녹여 버렸고 에르카는 시커먼 불길에 뒤덮이고 말았다.
마계의 화염은 불태운다기보다 녹였고 그렇게 이글거리는 검은 불길 속에서 반쯤 녹아 버린 에르카가 진흙 같은 모습으로 꿈틀거렸다.
“미안.”
“ …… .”
“제릭을 향한 너의 사랑은 여기까지야.”
제나는 왼손 위로 연보랏빛 화염을 불러냈다. 그건 스승인 가루모스가 괴물들의 세계인 이계로부터 가져온 불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마계의 불꽃과 달리 이계의 화염은 파도처럼 번져 나가 피해를 극대화 시켰다.
제나는 손을 뻗어 연보랏빛 화염을 날렸다. 그 불길 속에서 요정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화염은 연보랏빛 파도를 치며 주위의 나무들을 집어삼켰다.
솟아난 불길은 아침 햇살 위로 이채로운 불기둥을 이루었고, 그 모습을 아득한 심정으로 바라보다 제나는 정신을 차리고 화급히 자리를 떴다. 제릭의 검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그리고 숲을 뛰어가는 도중 쾌속으로 달려오는 제릭이 보이자 그 검부터 던졌다.
“제릭!”
제릭은 검을 받자마자 마법력을 뿜으며 날아오르려 했지만 제나가 그 손목을 잡았다.
“도망가야 해요. 어제 그 마법사들이 습격을 했어요.”
“에르카는?”
“요정님은 마법사들을 산 쪽으로 유인했어요. 나중에 다시 찾아온다고 했으니 어서 자리를 떠요.”
“알았어요.”
제릭은 제나의 끌어안고 그대로 땅을 박찼다. 에르카는 걱정이 없었다. 지난 칠 년간 함께 전장을 누빈 전사이자 요정 마법사이기도 한 에르카를 아후란의 놀고먹는 마법사들이 당해 낼 리 없었다.
“꼭 잡아요.”
제릭은 제나와 함께 하늘을 내달았다. 벼락 마법을 발해 마법사들을 혼내 준 게 상황을 시끄럽게 만든 것 같아 후회가 들었다. 바위를 박차고 다시 날아오르며 돌아보니 숲 위로 커다란 연보랏빛 화염이 몸을 뒤채고 있었다.
‘에르카….’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이계의 화염을 쓰지 않는 에르카인데, 왠지 불안한 마음도 스쳐 갔다.
대경실색한 크로닌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산등성이를 넘어서자 눈에 들어온 연보랏빛 불길은 다름 아닌 이계의 화염, 화이트 드래건의 냉기 외에는 끌 수도 없다는 가공할 불꽃이었다.
“이, 이런….”
차라리 마계의 검은 불꽃처럼 번지지 않고 한정된 지역을 수천 년간 꽃 한 송이 필 수 없는 땅으로 녹여 버리는 게 낫지, 이계의 화염은 초기에 잡지 못하면 그 피해가 광범위의 끝을 달렸다.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평화의 탑을 비롯한 각 나라의 왕궁에 화이트 드래건을 수소문하라 급보를 날리시오!”
이단자 가루모스의 흔적을 찾는 일보다 파도치듯 번져 가는 저 연보랏빛 화염이 발등의 불이었다.
“당장!”
수십 년 전 대마법사 악비온의 아들을 마계의 불꽃으로 녹여 버리고 다시 그 성을 이 연보랏빛 화염으로 초토화시킨 이가 있었다. 바로 금기의 문을 열고 악의 기운과 소통했던 자.
‘가루모스!’
그를 끝끝내 찾아 죽여야만 하는 절대 이유였다.
높다란 산 정상을 넘어가며 제릭은 지평선 끝에 깨알만 하게 보이는 연보랏빛 화염을 응시했다.
이계의 불꽃….
벨차라키의 일부 마법사들이 간혹 사용하긴 하지만 기존 마법 체계와 충돌하는 부작용이 있는지라 쉬 사용하지 못하는 말 그대로 이계의 마법이었다.
이따금 이계와 소통하는 에르카 역시 드래건들의 공격을 지연시키거나 어떤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잘 쓰지 않았다.
‘그런데 사용했다는 건 그만큼 다급했다는 말인데.’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어제 떼로 몰려온 마법사들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건 사실이지만 누구 하나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게 하진 않은 터였다.
그렇다면 추격해 오더라도 진의를 묻거나 오해를 풀려 하는 게 순서일 텐데 에르카가 이계의 화염을 쓸 만큼 곧바로 몰아붙였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아니면 다른 오해가 있는 걸까? 내가 깨닫지 못한 뜻밖의 오해?’
그에 대한 답을 제나가 주었다.
“제릭의 마법력 때문인 것 같아요.”
“무슨 뜻이죠?”
“자연 마법이 주류인 이곳 아후란에선 그와 다른 모든 초자연적인 힘들은 배척이 돼요. 종교라면 이교처럼 말이죠. 그런데 어제부터 제릭의 이질적인 마법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그걸 감지한 마법사들이 적대감 또는 호기심으로 그 파장을 쫓아온 거죠. 그러다 어제의 그 사달이 난 거고….”
제나의 설명에 제릭은 뒤늦은 깨달음이 밀려왔다.
온갖 다른 마법과 초능력들이 혼재되어 있는 벨차라키와 달리 모든 게 정리되어 있는 이곳 아후란에선 자신의 존재가 투명한 물에 떨어진 물감과 같다는 말이었다.
“알겠어요. 어쨌든 일단 여길 뜨죠.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까.”
제릭은 제나를 안고 다시 하늘을 날았다. 에르카는 서로 영혼이 연결되어 있는지라 곧 다시 찾아올 것이었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숲과 언덕과 산을 넘어 맹렬히 번져 나가던 연보랏빛 화염이 마침내 저항을 받기 시작했다.
자연 마법계의 본거지인 평화의 탑과 각 나라의 왕궁에서 급히 수소문한 화이트 드래건 둘이 하늘을 떠다니며 그 이계의 화마에 새하얀 냉기를 뿜고 있었다.
인간의 세력에 밀려 발카람의 첩첩산중으로 숨어 들어간 드래건들은 자연스레 인간들과 척을 지고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각 나라의 집권 세력과 합의하에 깊은 산중에 편안한 안식처를 마련했고, 권력자는 그곳을 금지로 정해 드래건을 보호 아닌 보호했다.
드래건으로선 고래로부터 지내 온 자신들의 거처에 그대로 머물며 평화로운 삶을 유지할 수 있었고, 집권 세력들은 내쫓기엔 버거운 드래건을 배려하면서 혹시 모를 외적에 대항할 비밀 병기를 갖추고 있다는 안도감을 그 보상으로 받았다.
물론 드래건들이 뜻대로 움직여 주는 건 아니었지만 각 나라의 왕들과 마법사들이 발 벗고 나서면 이처럼 감당하기 힘든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곤 했다.
아무튼 화이트 드래건들은 오후 내내 하늘을 떠다니며 연보랏빛 화염을 차차 물리쳐 나갔고 해 질 녘에 이르러선 불길의 세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초저녁이면 모두 끌 수 있겠군.’
높은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는 푸르스름한 바람은 산등성이를 날아다니는 백룡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안타까이 나무 밑을 내려다보았으니 바로 벨차라키에서 제릭을 찾아 머나먼 길을 날아온 요정 에르카가 시커멓게 녹아내린 채 누워 있었다.
‘불쌍하게 되었구나.’
제나가 이계의 화염을 뿜기 전에 구한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마계의 검은 불꽃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걸 겨우 막아 놓았지만 얼마나 견딜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도와주긴 하겠다만….’
검게 녹아 버린 형상 속에서 가까스로 보호해 놓은 두 눈이 반짝반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악연 중의 악연이로고.’
제릭의 어린 시절 공주님을 석상으로 만들어 버린 데 이어 이제 또 다른 연인을 이렇게 참담하게 녹여 버렸으니 둘의 악연이 지옥처럼 깊어지고 있었다.
그걸 아직 모르는 제릭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날 과연 그날의 오크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라그헨은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릭과 제나는 동굴 안에 마주 앉아 조그마한 마법의 돌에서 피어오르는 주황빛 불꽃을 보고 있었다.
그건 벨차라키의 전장에서 애용되고 있는 마법의 불로 일곱 명 분대에 하나씩 지급이 되었고, 식사를 하거나 추운 겨울날 언 손을 녹이는데 도움이 되었다.
제릭은 제나가 만들어 준 달콤한 차를 마시며 빗소리가 들리는 동굴 밖을 바라보았다. 차분한 그 소리 사이로 금방이라도 에르카의 밝은 목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제릭의 혼잣말에 제나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다 말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제릭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말을 이었다.
“저랑 약간 특별한 끈 같은 걸로 묶여 있거든요. 머나먼 벨차라키에서도 찾아올 정도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당장에라도 뛰어 들어왔을 거예요.”
“특별한 일이라면….”
“뭐, 또 꽃에 정신이 팔려 있다거나….”
제나는 어제 에르카가 형형색색 꽃들을 머리에 꽂고 왔던 걸 기억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자신을 향해 시위를 당길 때도 머리에 빨간 꽃 한 송이를 꽂고 있던 걸 생각했다.
“요정들이 다 그렇지만 에르카도 숲과 꽃을 좋아해요. 근데 에르카는 특히 꽃을 대책 없이 좋아해요. 이계의 괴물이랑 불꽃을 튀기며 싸우다가도 예쁜 꽃을 보고는 그리로 가 버릴 정도죠. 머리에 꽃을 꽂고 있는 에르카의 모습에 괴물이 어리둥절해할 정도니까.”
“아….”
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더 이상 꽃을 꽂을 수 없게 된 에르카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마계의 검은 불꽃을 맞고 부글부글 녹아내리던… 그 위에 이계의 연보랏빛 화염까지 쏟아 버렸으니….
그 불길 속에서 꽃처럼 져 갔을 모습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자 제나는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요?”
“제릭은 마법사가 아닌데 그 놀라운 마법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죠? 원래 마법사였나요?”
“아아, 그건 마법력이 맞지만 제가 마법사인 건 아니에요. 그냥 그 힘은 벨차라키의 검은 드래건 이이제케의 마법력이죠.”
“이이제케?”
들어 본 적이 있는 벨차라키의 거대하고 막강한 흑룡이었다. 몇 년 전 인간족과 대전투 끝에 죽임을 당했다는 풍문이 바다를 건너왔었는데….
“이이제케의 목에 마지막 검을 꽂아 넣은 게 바로 저예요. 그리고 그 순간 이이제케는 자신의 모든 마법력을 토해 내던 찰나였고요. 그 마법력이 검을 타고 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버린 거죠. 벼락처럼.”
그날 이이제케는 자폭하듯 머리가 날아가 버렸고 목에 검을 꽂았던 제릭 또한 벼락에 휩싸여 산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에르카가 쫓아왔을 때 제릭은 짙푸른 벼락들에 휩싸여 있었고, 몸 안에 들어온 드래건의 가공할 마법력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날뛰고 있었다.
에르카는 자신의 마법력을 쏟아 이이제케의 힘을 붙들어 맸고, 그 후 깊은 잠에 빠진 제릭을 등에 업고 온 대륙을 돌아다니며 전설적인 마법사와 요정과 드래건과 이계의 괴물들에게까지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때로 에르카를 내치기도 하고 때론 자신들의 힘닿는 데까지 도움을 주면서 제릭의 자폭을 진정시켰다.
하루하루 자폭과 진정을 오가는 사이 마법력은 차차 안정을 찾았고, 마지막으로 제릭의 몸 위에 돋아난 마법력의 독소들을 에르카가 자신의 생명력으로 훔쳐 내면서 결국 제릭은 이이제케의 막강한 힘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에르카는 생명력의 절반을 잃은 대가로 제릭의 영혼과 한 가닥 끈을 잇게 되었으니 그건 제릭이 이 세상 어디에 있든지 그 끈을 잡고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생명의 은인인 셈이죠.”
제릭의 웃음에 제나는 소름에 싸여 버렸다. 둘 사이의 엄청난 인연을 자신이 오늘 무참히 녹여 버렸으니 당장에라도 에르카의 영혼이 이곳으로 나타나 자신을 죽인 게 바로 이 오크라고 소리쳐 울 것만 같았다. 두려움을 애써 감추고 제나는 나지막이 물었다.
“사랑… 해요?”
제릭은 평온한 눈웃음으로 답했다.
“사랑이라기보다 그냥 편안하고 좋아하는 감정이랄까요. 밤하늘의 정겨운 보름달처럼….”
“ …… .”
제나는 떨려 오는 입술을 다물었다. 동굴 밖 빗소리가 어깨 위로 차갑게 흘러내리는 듯했다.
그 비 내리는 동굴밖엔 검게 녹아내리다 멈춘 에르카가 서 있었다. 손엔 활 모양인 굽은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고 다른 손엔 그처럼 보잘것없는 가지 하나가 화살처럼 쥐어져 있었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글썽인 채 에르카는 동굴을 향해 화살을 당겼다. 하지만 넝쿨로 만든 시위 줄에 화살이 날아갈 리 없었다.
바로 어제까지 마법의 금빛 화살을 당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힘없이 툭 떨어지는 나뭇가지에 에르카는 별안간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 .”
녹아 버린 목과 혀에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마계의 검은 불꽃에 마법력도 모두 빨려 나가 나오는 건 그저 눈물뿐….
에르카는 엎드려 통곡했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아무도 들을 수 없었고 오직 뜨거운 눈물만이 영혼을 흔들고 있었다.
‘제릭!’
어서 나와 보라고, 사랑하는 에르카가 돌아왔다고, 제발 그 괴물에게서 달려 나와 자신을 보아 달라고 오열했지만 참혹히 녹아내린 육신을 제릭이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자신을 밝혀 줄 마법력 하나 남아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이 괴물 같은 모습을 어떻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에르카의 소리 없는 비극만이 밤이 깊도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레에스랑의 비센체성.
그 비밀스러운 홀엔 레에스랑 왕국의 궁정 수석 마법사와 비센체성의 영주 그리고 평화의 탑 마법사들이 모여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침묵 한가운데엔 오늘 하루를 오롯이 불살라 버린 연보랏빛 화마가 잔광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
조금 전 평화의 탑에서 날아온 악비온의 전언이었다.
‘일단 지켜보라….’
이계의 연보랏빛 화염에 평화의 탑도 충격을 받은 모양이지만, 그보다 화이트 드래건을 수소문하는 통에 뒤숭숭해진 각 나라의 집권자들과 전쟁을 우려한 대신전의 입김이 들어온 까닭도 있었다.
“아무튼….”
크로닌이 무거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일부터 샅샅이 뒤져 위치가 발견되면 먼 거리에서 감시하며 지켜보기로 합시다. 결코 이쪽에서 먼저 도발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렇게 지친 하루가 마감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