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17/24)

<5>

아침 햇살이 밝아 오는 산길을 큰 검 한 자루를 등에 차고 걸어가는 이가 있었다.

표정은 아련한 듯 아득했고 눈빛엔 회한과 슬픔 그리고 맺혀 있던 그 무언가가 하늘가에 흩어진 듯 허허롭기도 했다.

‘안녕….’

이별이었다. 지난 삶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일리아에게 늦게나마 왕관을 바침으로서, 그리고 어머니와 같은 히엔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림으로서 이제 이곳과는 영영 이별이었다. 그립고 보고파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하아!”

파란 하늘을 향해 한숨을 터트렸다.

“가자.”

땅을 박차고 쏜살같이 허공을 가른 제릭은 금세 쥴른을 벗어났다. 그리고 해가 중천을 지나 석양에 물들어 갈 무렵 바델의 국경을 넘어 이웃나라인 레에스랑으로 들어갔다.

* * * * * * *

다음 날.

봄볕이 바람 따라 나붓거리는 들길을 제릭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걷고 있었다. 아무래도 고국인 바델을 벗어나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듯했다.

그러다 그 팔이 하나 없던 여자가 생각났다.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현상금 사냥꾼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제나라고 했던가?”

세상의 수많은 행로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은 또 수없이 많았다. 더욱이 삶과 죽음이 화살 비처럼 오가는 전쟁터에선 인연이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아쉬운 차 한 잔의 기억과도 같았다.

하지만 삶과 죽음에 무감각해지는 벨차라키와 달리 땅이 바뀌고 공기가 바뀌어서 그런지 그 만남이 조금 새로운 느낌이긴 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그런 기분으로 시원스레 날숨을 쉬고 들길을 지나 다시 숲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인연에 대답이라도 하듯 길가의 둥그런 바위에 한 여성이 기대앉아 노란 꽃 하나를 코끝에 빙그르 돌리고 있었다. 시선이 닿자 그녀의 눈가에 반가운 미소가 번졌다.

‘제나….’

쥴른의 신전에서 목에 검을 겨누자 겁을 먹고 사라져 버린 자칭 현상금 사냥꾼. 바람에 텅 빈 오른팔이 흔들리는 걸 보며 제릭은 천천히 다가갔다.

“다시 만났네요.”

“신기하네요.”

“뭐가요?”

“이런 우연들이….”

제릭은 턱을 조금 들고 흥미롭게 웃었다.

“내가 무서워서 도망가 버린 거 아닌가요? 이 커다란 검으로 목을 겨눴으니.”

제나는 꽃잎으로 입술을 빙그르 스치며 답했다.

“무서웠죠.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무서워요. 하지만 알 수 없는 끌림도 있지요. 가시가 달렸지만 꺾고 싶은 꽃처럼.”

“그 꽃처럼?”

“아니요, 이 꽃은 가시가 없어요. 그래서 좋아하죠.”

“나도 뭐 그렇게 가시가 있는 편은 아닌데.”

제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건 모른다고, 사실을 알면 그 큰 검으로 당장 목을 벨지 모른다고, 기구한 인연을 가슴 깊이 만끽하며 제나는 노란 꽃을 내밀었다.

제릭이 그 꽃을 받자 제나는 문득 가슴이 한들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미묘한 느낌 너머로 꽃향기를 맡는 제릭의 얼굴이 부셨다.

‘신기하구나.’

늑대 소년의 후려침에 하늘을 날아가던 그때가 떠올랐다. 스쳐 가는 햇빛, 휘감아 드는 현기증과 함께 그 순간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았는데….

세월이 흘러 이렇게 서로 변해 버린 모습으로 그 인연을 이어 가고 있으니 제나는 뭔가 아득한 슬픔마저 느껴졌다.

‘어쩔 수 없지.’

그가 날려 버린 오른팔이 악연처럼 너울지는 그때였다.

슝!

화살 하나가 날아와 제릭이 들고 있는 꽃대를 꺾으며 길가의 나무에 꽂혔다. 둘은 그리 놀라지 않은 얼굴로 화살이 날아온 숲을 돌아봤다.

대답하듯 하나둘 인기척을 내며 모습을 드러내니 한눈에도 산적들이었다.

사방에서 모여든 산적들은 얼추 백여 명 가까운 숫자였고 진즉부터 그들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던 제릭은 담담한 표정으로 꽃대를 버렸다.

“무슨 일이오?”

당황하거나 놀라야 할 사냥감이 오히려 평화로운 눈빛으로 물으니 산적들은 서로를 흘끔거렸다.

등에 차고 있는 커다란 검도 신경을 건드렸고, 바위에 기대앉아 불구경하는 듯한 여자의 표정도 왠지 모를 불안함을 퍼뜨렸다. 그때 숲길 저편에서 천천히 말을 타고 나타나는 두 사람이 있었다.

척 봐도 산적의 두목과 부두목 같은 분위기를 지닌 삼십대 중반의 남성들은 길을 여는 부하들을 지나 제릭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부두목으로 보이는 남자가 전형적인 산적의 대사를 했다.

“반항하면 죽음이요, 우리를 따라 의적의 일원이 된다면 삶이다.”

제릭은 툭 콧바람을 쏘았다. 그런데 나타날 때부터 제나의 미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두목을 향해 제나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 표정을 하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그렸다.

그 모습에 주위의 산적들이 혹시 아는 사이인가 하며 두목을 쳐다봤다.

두목 역시 굉장히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반가워하는 눈웃음으로 쳐다보자 어리둥절하면서도 일단은 볼웃음을 지었다.

“허허, 참.”

그런 두목을 향해 제나는 이 기가 막힌 인연이 놀라워 더욱 활짝 웃어 보였으니, 지금 말에 앉아 있는 산적 두목은 다름 아닌 몰락한 보르헹 가문의 마지막 장자 벤차드 보르헹이었다.

여섯 번째 영혼을 구하러 보르헹 영지의 숲으로 갔을 때 나무 위로 도망간 그 소년을 향해 화살을 쏘아 대던 인물….

당시 오크 고욤이었던 제나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벤차드와 시종 데렌이었다.

‘산적이 되었구나. 산적이 되었어.’

성으로 카린의 석상을 들고 몰려온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인 휴룩 보르헹에게 벤차드의 화살촉을 내보이며 항의했고, 벤차드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지만 그에 대한 분노와 반감은 급속도로 영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휴룩 보르헹은 그 흉흉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애를 썼지만, 그러나 다음 해 고질병인 심장이 문제를 일으켜 급사를 하고 말았다.

뒤이어 영주의 자리에 오른 벤차드는 나름대로 민심을 다독이려 노력했지만 살인자라는 풍문은 더욱 부풀려져 벤차드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이에 휴룩 보르헹의 동생이자 벤차드의 숙부인 슈혼이 사사건건 영지의 통치에 관여했고, 결국 둘은 충돌 끝에 슈혼이 벤차드를 무력으로 몰아낸 것이었다.

벤차드는 병력을 모아 권좌를 되찾으려 했지만 이미 돌아선 민심 앞에 제대로 된 싸움 한번 하지 못한 채 유야무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문제는 보르헹 영지를 독차지하게 된 슈혼 보르헹이 승리감에 도취해 오래전부터 영지 다툼을 벌여 왔던 이웃 릭센가와 전쟁을 벌이는 자충수를 둔 것이었다.

전쟁에서 참패한 슈혼 보르헹은 한 달여간의 공성전 끝에 마지막 성마저 빼앗기고 자살을 했으니, 무주공산이 된 보르헹의 영지는 보르헹 가문을 탄압 및 축출하지 않는다는 레에스랑 국왕의 중재 하에 고스란히 릭센가로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천오백 년 가까이 이어져 온 명문 보르헹 가문의 허망한 몰락과 그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던 오크 고욤, 이제는 아름다운 인간 여성 제나는 한 가닥 연민을 느끼며 턱수염이 덥수룩한 벤차드를 향해 안타까운 미소를 그렸다.

당연지사 벤차드는 표정이 혼란스러워지며 이렇게 물었다.

“나를 아는가?”

제나는 애틋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벤차드의 얼굴엔 감정의 파도가 일렁였고 아니나 다를까 아름다운 여인에게선 잃어버린 그 옛날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잘 알지요. 보르헹 가문의 마지막 장자 벤차드 보르헹. 명궁이라 이름 높았던 안타까운 영주님.”

벤차드와 데렌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사실을 몰랐던 산적들 속에선 놀라는 술렁임이 일었다. 곧 정신을 차린 벤차드는 말고삐를 움켜쥐며 엄한 목소리로 호령을 내렸다.

“듣거라!”

산적들은 자세를 바로 하며 두목을 우러렀다.

“남자와 여자를 데리고 산채로 간다. 함부로 다루지 말고 조심히 대하라.”

자신을 알아본, 십중팔구 보르헹 가문과 어떤 연관이 있는 제나에 대한 예우였다. 그러나 보르헹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제릭은 그 예우를 헌신짝처럼 걷어찼다.

“누구 맘대로?”

말고삐를 돌리던 벤차드는 멈칫했다. 그 눈빛을 대신해 부두목 데렌이 답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조용히 따라오시오. 우리 영도자께서 오늘 동향 사람을 만나 마음이 너그러우시니 그에 감사를 느껴야 할 것이오.”

“나는 동향 사람이 아니니 감사를 느낄 필요가 없겠군.”

제릭의 시큰둥한 대꾸에 벤차드가 묵직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괜한 호기를 부려 소중한 목숨을 헛되이 잃지 말라. 내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고이 보내 줄 테니 얌전히 따라오너라.”

“아, 글쎄 누구 맘대로?”

“정녕 단칼에 죽고 싶은 게냐?”

벤차드의 부라림에 제릭은 등 뒤에서 큼직한 검을 뽑아 깃털처럼 내밀었다.

“능력 있으면.”

“뭐?”

“능력 있으면 죽여 보라고.”

전쟁으로 피 튀기는 벨차라키 대륙 중에서도 오크와 드래건을 상대로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테릴국의 용병대 총대장이었다.

단신으로 드래건의 숨을 끊어 놓은 적도 있는 막강한 전사를 앞에 두고 고작 백여 명 산적의 두목이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으니 제릭은 코웃음이 나왔다.

“아니면 내가 먼저 너희들을 뒤집어 줄까?”

“능력이 있으면.”

“어쭈?”

“능력이 있으면 그리 해 보거라.”

자신의 말을 흉내 내는 벤차드에 제릭은 잠시 웃고 말았다. 그리고 웃음 끝에 제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바위 위로 올라가요.”

“네?”

“바위 위에서 정신 꼭 붙들고 있어요.”

제나는 바위 위로 올라가 웅크리듯 왼손을 짚었다. 동시에 제릭이 커다란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더니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벤차드와 산적들은 호기심 반 경계심 반으로 각각의 무구를 움켰고, 제나는 제릭의 숨겨진 능력을 확인할 기회에 두 눈을 빛냈다.

그때였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검에 푸른색 연무가 모여 드는가 싶더니 그 연무 속에서 빠지직! 갓붉은 벼락 하나가 튀어 올랐다. 순간 제릭은 검을 돌려 기합 소리와 함께 땅에 박아 넣었다.

“이얍!”

늦잠을 자던 대지의 신이 엉덩이를 질렸을까. 화들짝 놀란 땅거죽이 파도를 일으키니 그 웅장한 너울거림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벤차드와 산적들은 모조리 자빠뜨렸다.

비명 소리와 함께 밀려 나간 그 파도는 바위와 나무들을 뿌리째 쳐들었고, 그렇게 숲 전체가 너울지는 가운데 황망한 산적들은 아우성을 치며 튀어 오르고 또 대지의 고랑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대지의 출렁임은 찰나에 멈췄고 눈 깜짝할 새에 돌변한 숲의 풍경은 그야말로 땅거죽의 혼돈이었다.

사선으로 기울어진 바위 위에 웅크린 채 제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제릭을 바라보았다.

‘고위급 이상….’

이만한 파괴력을 마법주문이나 마법진 없이 곧장 폭발시킬 수 있는 존재는 고위급 또는 최고위급 마법사들뿐이었다.

그런데 드래건도 아닌 고작 늑대인간의 피를 가진 한 젊은이가 검으로 벼락을 끌어내 대지를 뒤집었으니 제나는 벌어진 입이 쉬 다물어지지 않았다.

‘뭐야….’

벤차드를 비롯한 산적들 역시 마법사인지 무사인지 모를 제릭을 향해 넋 빠진 공포심을 드러냈으니 제릭은 그들을 향해 한 번 씩 웃는 것을 끝으로 큼직한 검을 등에 척 꽂았다.

“가요.”

그리고 제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나는 그 손을 잡으며 이 일이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킬 것을 직감했다.

잔잔한 연못에 돌멩이가 떨어지면 그에 대한 파문이 번져 나듯 자연스러운 대기의 흐름 속에 이 이질적이고도 가공할 파장은 온 시공을 흔들 것이 자명했다.

‘오히려 잘된 일인가?’

종교가 다른 종교를 박해하듯 마법도 다른 마법의 장점을 흡수한 후 말살시켰다.

만약 제릭이 악비온의 마법사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면 피신처를 제공하는 명분으로 자연스레 가루모스의 지하 동굴로 데리고 갈 수도 있었다.

“날 꼭 잡아요.”

제릭은 제나를 어린아이처럼 허리에 붙들더니 땅거죽이 만들어 놓은 널따란 고랑과 이랑 사이를 휙휙 뛰어 날아갔다.

산적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를 새처럼 지나가는 제릭을 보며 입을 벌렸고, 제릭의 허리에 붙들린 제나의 표정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너 정체가 뭐야?’

지난 십 년 동안 대체 어디서 무얼 하다 온 거냐고,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제나는 제릭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 볼에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지나가는 바람결에 그 마음을 날려 버렸다.

이제 막 국경을 넘어 바델에서 레에스랑으로 날아온 네 마법사는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강력하군.’

이질적인 마법의 파장이 파도처럼 일어났다는 급보대로 저 멀리 대지가 반죽처럼 굽이져 있는 게 보였다. 어쩌면 오늘 지난 수십 년 동안 행방을 찾지 못했던 그 이단자의 흔적을 발견할지도 몰랐다.

‘가루모스….’

맞닥뜨리게 된다면 목숨을 걸어야 함은 자명한 일이었다.

귀찮은 산적들로부터 눈 깜짝할 새에 벗어난 제릭은 작은 산을 넘어 한갓져 보이는 너른 들길에 이르러서야 허리에 붙들고 있던 제나를 내려 주었다.

뛰는 듯 나는 듯 숲과 언덕을 내달리는 도중에 제나가 내려 달라고 여러 차례 청했지만 안전하다 여겨지는 곳에 이르러서야 놓아준 것이었다.

“허억….”

마치 준마처럼 때론 화살처럼 허공을 가로지른 제릭보다 옆구리에 매달려 온 제나가 오히려 더 숨이 가빴다.

“왜요? 멀미났어요?”

제릭이 물어 오자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제나는 살짝 휘청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제릭도 씩 웃었다. 아름답기도 했지만 제나의 웃는 모습은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제릭을 향해 제나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대체 당신의 정체가 뭐예요? 마법사예요?”

“그냥 특별한 능력을 지닌 전사라고만 해 두죠.”

십 년 전 벨차라키 대륙으로 건너가 용병이 된 후 승승장구한 바탕엔 늑대인간의 강력한 힘이 뒷받침 된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몸 안에 꿈틀대는 놀라운 마법력은 순전히 행운의 결과물이었다.

벨차라키의 테릴국을 위협하던 강력한 검은 드래건 이이제케를 마법사들과 수천여 병사들과 함께 기어이 죽음으로 몰아갔을 때 마지막 숨통에 검을 꽂아 넣은 이가 바로 당시 용병대 대장 제릭이었다.

그런데 검을 들이박기 직전 이이제케는 자신의 마지막 마법력을 응집시키고 있었고, 그 찰나에 제릭이 목에 검을 꽂아 넣은 것이었다.

콰지직!

검푸른 벼락이 쳤고, 뿜어 나던 드래건의 어마어마한 마법력은 검신을 타고 제릭의 몸 안으로 몽땅 쳐들어와 버린 것이었다.

번갯불에 휩싸여 날아간 제릭은 그로부터 한 달 가까이 죽은 듯이 잠을 잤고, 마침내 깨어났을 땐 몸 안에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용광로 같은 마법력이 파도를 치고 있었다.

허나 마법을 배우지 못한 제릭은 그 힘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했고, 그저 감정이나 의지가 불길처럼 내뻗을 때 상상치 못한 마법력이 함께 쏟아져 나오곤 했다.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자신의 감정에 마법력을 싣는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한 운용 방법은 알지 못한 채 오늘처럼 검을 통한 기력의 폭발이나 쾌속으로 뛰거나 나는 데에 그 힘을 쓰곤 했다.

햇살처럼 웃는 제릭을 보며 제나가 문득 말했다.

“꿈을 꿔요.”

제릭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꿈이요?”

“네… 꿈을… 꾸는 것 같아요. 바람결에 날리는 저의 이 머리칼까지….”

“ …… .”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제나는 마음속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그대와 달라진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게 마치 새로운 꿈을 꾸는 것 같다고….

‘비극으로 끝나겠지만….’

제나가 서서히 숨을 마시는 그때 제릭이 한 걸음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그 사이로 보드라운 바람이 일었다.

“ …… .”

물끄러미 쳐다보는 제나에게 제릭이 말했다.

“꿈은 밤에 자면서 꿔요. 지금은 이렇게 모든 게 생생한 현실이니까.”

제나의 눈빛이 고요해졌다. 눈앞에 오크 고욤의 모습이 스쳤다. 둘 사이의 악연이 핏빛으로 물들고 텅 빈 오른팔은 바람에 떠오르는데….

“가요.”

제릭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으며 제나는 가슴이 흔들렸다. 함께 걸어가니 뭔가가 잘못되어 감을 느꼈다. 해맑은 제릭의 눈웃음이 푸른 하늘 어딘가를 스치고 있었다.

대마법사 악비온의 휘하, 아후란 대륙의 중부 감찰 마법사들을 이끌고 있는 툴루안의 긴 회색 수염이 떨렸다.

“놀랍군.”

숲은 마치 땅거죽이 파도를 치다 그대로 굳어 버린 듯 나무며 바위며 사람이며 할 것 없이 너울진 그 물결 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놀라워….”

최소한 고위급 이상의 실력이었고 어쩌면 최고위급 마법사의 출현일지도 몰랐다.

“가세. 마법의 파장이 이 길을 따라 흩어지고 있군.”

툴루안을 비롯한 네 마법사는 곧장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둥그렇게 너울진 땅거죽 위에 걸터앉아 벤차드와 데렌이 얼빠진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제릭과 제나는 들길을 걸어가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을 숨 쉬며 동행이 된 서로를 이따금 돌아볼 뿐이었다.

그러다 제나가 저 멀리 산자락에서 자신들을 미행하는 걸 느끼며 말을 꺼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행로를 묻자 제릭은 길가에 피어 있는 풀꽃들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발카람.”

제나의 눈망울에 빛 다른 감정이 일었지만 제릭은 보지 못했다.

‘발카람….’

아후란 대륙의 서남부에 있는 발카람은 광대한 오지에 험준한 산악 지역이었다.

인간족에 밀린 요정과 정령과 오크들을 비롯한 드래건까지 들어와 저마다의 세력을 구축하고서 나름대로 평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는 곳.

각 나라의 왕들이 협의하에 빈국인 발카람을 지원하지 않는 이유도 인간 이외의 종족에게도 존재하고 살아갈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너무 몰아붙이면 필연적으로 생존을 위한 전쟁이 벌어지게 될 터, 발카람은 양측이 이심전심으로 남겨 놓은 마지막 평화 지역인 셈이었다.

제나는 더럽고 냄새나고 그저 사냥해 먹고 소리치며 성교하는 게 일상인 오크의 세계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몸부림치던 자신의 옛 모습이 떠오르자 비릿한 욕지기가 올라왔다.

“발카람?”

태연한 제나의 물음에 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발카람에 볼일이 있어요.”

“무슨 볼일인데요?”

“아주 사적인 일이죠. 어젯밤 꿈처럼.”

제나는 가만히 숨이 눌렀다. 어젯밤의 꿈… 그 꿈이 어떤 풍경일지는 너무도 쉽게 짐작이 되었고, 제나는 제릭이 찾으러 가는 그 오크가 지금 바로 곁에 있다고 고백하고픈 알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꿈을 현실에서 찾으려는 건가요?”

“글쎄요. 꿈이 꿈으로 끝날지 아니면 현실에서 되살아날지는 가 봐야 알겠죠.”

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편 멀리 산자락에서 자신들을 미행하는 자가 갑자기 둘로 셋으로 일곱으로 급격히 늘어나는 걸 감지했다. 그리고 제릭이 발카람으로 가는 건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앞쪽 하늘에서 날아오는 점들이 보였다. 점들은 시시각각 마법사들의 모습으로 커졌고 그걸 시작으로 산자락의 미행자들도 모습을 드러내며 빠르게 다가왔다.

동시에 근처의 숲과 언덕에서 시공의 문을 열고 나오듯 마법사들이 출현하기 시작하니 몇몇은 안개처럼 밀려오고 몇몇은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리꽂아 이내 주위 사방팔방을 마법사 수십여 명이 에워쌌다.

제나는 예상보다 수위가 높은 위기 상황에 눈빛이 차분해졌다.

“마법사들이 우리에게 볼일이 있나 보군요.”

“아마도.”

십중팔구 산적들을 혼내 주며 대지에 벼락을 꽂아 버린 것 때문일 터였다. 제릭은 살짝 후회를 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들입니까?”

이에 마법사들 중 회색 수염이 길게 늘어진 이가 손을 내밀었다.

“궁금한 게 있어 그대를 찾아왔소이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툴루안은 등에 큼직한 검 한 자루를 메고 있는 남자와 팔 하나가 없는 아름다운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남자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궁금하신 게 무엇입니까?”

상대가 적의 없는 응대를 하자 툴루안은 일단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며 말을 받았다.

“조금 전 땅을 울린 커다란 진동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지. 숲 하나가 온통 떠올라 주름져 있던데.”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산적들이 길을 가로막아서요.”

제릭의 덤덤한 대답에 툴루안을 비롯한 고위급 마법사들의 눈빛이 주춤했다. 하지만 강력하고도 이질적인 마법력과 떠돌이 무사 같은 이십대 젊은이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았다. 자연스레 시선이 그 옆에 있는 여인에게로 옮겨갔다.

‘젊은이는 호위 무사고 마법사는 저 여인인 모양인데….’

툴루안은 헛기침을 한 후 다시 제릭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습니까?”

“벨차라키.”

뜻밖의 단어에 툴루안의 눈이 커졌다.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발카람.”

연이어진 예상 밖의 단어에 주위의 마법사들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고, 툴루안은 고동 소리가 커지는 걸 느끼면서도 판단을 유보했다.

‘가루모스와 아무 상관 없는 그저 벨차라키에서 온 여행자인가? 이질적인 마법은 그 때문이고, 발카람 역시 공교로운 행선지일 뿐?’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발카람에 가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제릭은 뚱한 표정이 되며 더 이상 순순히 답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제 그쪽에서 설명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를 쫓아왔는지,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조용히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마법사들이 이렇게 떼로 몰려온 까닭을 말입니다.”

제나는 제릭에게서 들려온 ‘우리’라는 단어에 표정이 미묘해졌다.

반면 툴루안은 이 이상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실체를 확인하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방향을 틀었다.

“타쿠만키.”

좌측 허공에 떠 있던 푸른 피부색의 인물이 땅으로 내려왔다. 청인족 타쿠만키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고 제릭은 시큰둥이 반응했다.

“우리를 쫓아온 이유를 물었는데.”

마차의 바퀴 자국이 나 있는 너른 들길 위로 바람이 불어왔다. 길가의 꽃들이 흔들리고 타쿠만키는 양손을 하늘로 향한 채 마법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릭의 발밑에서 새싹들이 돋아났다. 새싹들은 금세 굵은 등나무 가지처럼 자라며 다리를 휘감았고 제릭은 그 하는 양을 지켜만 보았다.

어느새 팔뚝만큼 굵어진 줄기들은 뱀처럼 휘감아 오르며 몸을 뒤덮었는데, 동시에 제릭이 두 손과 발을 이용해 그 줄기들을 우둑우둑 끊어 내 버렸다.

타쿠만키는 낯빛이 검푸르러지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주위의 마법사들 사이에도 동요가 일었다.

그때 제나가 허리에 달린 날렵한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상황을 좀 더 악화시켜 제릭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우리는 아무 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는 길에 산적들을 만나 혼내 줬을 뿐이고요. 자연 마법의 신봉자들이라면 그 산적들을 잡아 법관에 넘길 일이지 평화로이 여행하는 우리의 앞길을 막을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건 우리가 결정할 일이다.”

타쿠만키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후 다시 열 손가락을 하늘로 향한 채 마법을 발했다.

제나는 땅속의 변화를 감지하면서도 모르는 척 기다렸고 아니나 다를까 발밑에서 조금 전과 같은 굵은 줄기들이 솟아나더니 제나의 허리를 휘감고 하늘로 솟았다.

순식간에 아름드리로 굵어지며 솟은 그 크기와 높이는 족히 천년은 됨직 할 정도로 장관이었고, 제나는 그 끝에 한 마리 새처럼 붙들려 검을 쥔 왼팔을 흐느적거렸다.

그런 제나를 향해 주위의 가는 줄기들이 모여 들더니 한쪽은 검을 쥔 왼손을 옭아매고 다른 쪽은 텅 빈 오른팔 소매를 움켜 옆으로 죽 당겼다.

마치 팔이 힘껏 당겨지듯 연푸른 상의가 찢어질 듯하더니 끝내 옷가슴의 단추가 튀어 나가면서 뽀얀 앙가슴이 드러났다.

“제릭….”

제나의 겁먹은 목소리에 지상의 남자는 감정의 불길이 일렁였다. 번갯불처럼 등 뒤의 검을 뽑아 드니 툴루안을 비롯한 수십여 마법사들이 일제히 공격과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제나는 그 모습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며 경직된 얼굴 속에 미소를 감추었다.

‘그래, 어서 내보여 봐. 나도 너의 실체가 두려울 만큼 궁금하니까.’

보통 검의 세 배 정도 되는 검신을 번뜩이며 제릭은 일갈했다.

“당장 내려놓지 않으면 모두 땅바닥을 기게 만들어 줄 테다!”

타쿠만키는 반응하지 않았고 툴루안은 침묵하며 제릭을 응시했다. 그 역시 제릭의 마법력을 확인할 요량이었다.

제릭은 높다란 나무 위의 제나를 힐끗 본 뒤 검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마법사들은 저마다 빛깔 다른 방어막을 빚어냈고, 순간 제릭의 검에 시퍼런 벼락 줄기가 꽂혔다.

파지직!

툴루안은 흠칫함과 동시에 제릭은 아까처럼 검을 돌려세워 땅에 내리박았다. 대지가 눈을 부라리듯 전율을 하자 마법사들은 당황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 위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모두가 놀라 쳐다보니 먹구름은 금세 하늘을 뒤덮었고 찰나 무수한 벼락 줄기가 소나기처럼 내렸다.

아수라장….

시공을 뒤덮은 벼락들에 비명 소리는 폭우처럼 튀었고 몸부림은 천둥번개가 되어 날뛰었다.

경악….

하늘 위 제나의 표정이 그랬다.

툴루안은 벼락을 맞은 새처럼 고꾸라졌고, 타쿠만키는 번갯불을 맞은 통나무처럼 땅을 데굴데굴 굴렀으며 붉고 푸른 벼락들은 그런 타쿠만키를 쫓아가며 끝까지 지져 댔다.

콰라라락!

그의 마법이 깨어지자 하늘로 솟았던 웅장한 나무는 종이처럼 내려앉았다. 제나는 나무와 함께 얼빠진 얼굴로 하강하다 갑자기 가지가 뚝 끊어지면서 키 높이쯤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얼마든지 부드럽게 착지할 수 있었음에도 그대로 땅에 부딪쳐 쓰러졌다. 입술에 충돌의 아픔이 번졌다.

제릭은 즉각 땅에 박힌 검을 뽑았다. 이에 벼락들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하늘의 먹구름은 썰물처럼 물러 나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하늘 위에서 햇살이 내리비쳤다.

땅에 쓰러진 제나는 일어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두근두근 느끼고 있었다.

검은 든 무사인 주제에 마법진을 그린 것도 아니고 마법주문을 발한 것도 아니면서, 수십여 마법사들을 일거에 벼락 맞은 새처럼 고꾸라뜨려 버렸으니 기가 막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뭐….’

하지만 평화로운 아후란 대륙과 달리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가 일상인 벨차라키에서는 모든 게 격렬했다. 그런 격렬함으로 십 년 동안 오크와 드래건과 이계의 괴물들과 투쟁해 온 제릭에게 ‘적당히’란 말은 죽음과 같았다.

“제나.”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제나는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입술에 맺힌 핏방울에 제릭은 두 눈이 번뜩였지만 더 이상 감정의 폭발은 자제했다.

“가요.”

놀란 눈으로 미적거리는 제나를 번개같이 등에 업고 제릭은 땅을 박찼다.

거의 하늘을 난다고 해도 될 정도로 땅을 한 번 박찰 때마다 휙휙 멀어지더니 순식간에 작은 점 만해져 들길 너머로 사라졌다.

그렇게 제릭이 떠난 후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툴루안은 육체적 정신적 충격에 입도 뻥끗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어서…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해….’

가공할 검사는 가루모스가 숨어 있는 발카람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장 대마법사 악비온에게 고해야 했다.

제나는 제릭의 등에 업힌 채 가슴이 쿵쿵 뛰고 있었다. 커다란 검을 한 손에 들고 힘차게 비상을 할 때마다 덩달아 고동 소리가 하늘을 날았다.

어쩌다 등에 업힌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고 소름이 돋는 것도 같고 뜻 모를 눈물이 돋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너울지는 가슴 어딘가는 이 악연의 현실을 더욱 피 붉게 채색하고 있었으니 제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힘껏 하늘을 가르는 그 비상 속에서 한 소녀의 핏빛 모습 앞에 울부짖던 누군가가 번쩍번쩍 스쳐 가고 있었다.

대마법사 악비온의 두 눈이 광기로 이글거렸다.

“가루모스….”

조금 전 대륙의 중부 감찰 마법사들로부터 날아온 급보는 풍채 좋은 몸집에 늘 웃음을 띠고 있던 악비온을 이와 같이 돌변케 했으니, 이질적인 마법의 발현에 수십여 마법사들이 모조리 나동그라진 건 그와 관련된 일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놓치면 안 돼. 절대로.”

악비온이 주먹을 부르쥐자 옆에 자리하고 있는 수석 마법사 크로닌이 매부리코가 돋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고위급 마법사 서른 명이 레에스랑으로 공간이동을 준비 중입니다.”

악비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한꺼번에 당했다는 육십여 마법사들 중 고위급은 툴루안을 비롯한 넷뿐이었으니 다시 붙잡는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었다.

“나와라. 숨어 있지 말고 죽기 전에 얼굴 한 번 봐야 할 것 아닌가?”

사랑스러운 어린 아들을 마계의 불꽃으로 형체도 없이 녹여 버린 철천지원수, 그 얼굴을 자신의 두 손으로 꼭 산산조각 내야만 했다.

“가루모스!”

악연의 불꽃이 악비온을 휩싸 올랐다.

얼마나 달렸을까.

얼마만큼 도망쳤을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절벽을 뛰고 하늘을 날아 다시 펼쳐진 레에스랑의 어느 이름 모를 숲속에서 제릭은 준마와 같은 두 다리를 세웠다.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이마에선 땀방울이 굴러 내렸다. 그리고 등 뒤를 돌아봤을 때 제릭은 잠들어 있는 제나의 얼굴을 보았다.

꿈을 꾸고 있을까?

등에 닿아 오는 그녀의 숨소리에 평온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오래전 일리아도 이렇게 등에 업어 주곤 했는데….

제릭의 긴 한숨 소리에 제나가 잠에서 깼다. 고개를 들자 평화로운 숲의 기운 속으로 맑은 새소리가 들려오고 햇빛 조각들은 눈가를 간질였다.

“어….”

제나는 그제야 제릭의 등에 업힌 채 잠이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깼어요?”

제릭이 돌아보자 제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등에서 내려왔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며 한 걸음 물러서다가 다리 힘이 풀리며 휘청하고 말았다.

제릭은 제나를 붙잡아 나무 옆 편편한 바위에 앉혔다. 그리고 아까 떨어질 때 다친 그녀의 입술을 물끄러미 보았다.

제나는 왜 제릭이 자신을 그렇게 보는지 몰랐다가 이내 입술의 상처가 따끔거리자 시선을 떨어뜨렸다.

“괜찮아요.”

“뭐가요?”

“ …… .”

“그 정도도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면서 무슨 현상금 사냥꾼인가요? 거짓말이죠?”

거짓말이란 말에 제나는 고개를 들고 따지듯 답했다.

“놀라서 그랬어요. 땅에서 갑자기 솟아난 나무에 붙들린 것도, 벼락이 치고 마법사들이 가랑잎처럼 떨어져 땅을 구르는 광경이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그러는 당신의 정체는 도대체 뭔가요? 검을 쓰는 무사예요? 아니면 마법을 쓰는 마법사인가요? 대체….”

제릭은 검지를 들어 핏물이 말라 있는 제나의 입술에 대었다.

“그냥 커다란 검을 든 무사예요. 어느 날 벼락불을 맞고 조금 특이해진. 하지만 무서워하지 말아요. 그대가 등에 업혀 잠을 잘 정도로 편안한 남자니까.”

제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편안하다니….

그 소녀를 죽인 게 자신임을 알면 그 커다란 검에 벼락을 휘감아 당장 목을 치고 몸을 두 쪽 내는 것도 모자라 활활 불태울 터였다.

‘우리는 악연일 뿐….’

불어오는 숲의 바람이 제나의 오른팔을 흔드는 그때였다.

슝!

화살 하나가 날아와 제나의 옆에 있는 나무에 박혔다. 둘은 흠칫하며 몸을 일으켰다. 긴장된 얼굴로 숲을 살피는 제나와 달리 그러나 제릭은 나무에 꽂힌 화살을 일견하더니 환한 웃음이 되어 버렸다.

화답하듯 우거진 숲에서 뭔가가 휙 날아오더니 가까운 나무 위에 푸르른 새처럼 앉았다.

“분위기 좋으시네?”

요정이었다. 귀가 뾰족한 여자 요정은 푸른빛 전투복 차림에 금빛 활을 들고 있었고, 머리엔 다채로운 크고 작은 꽃들이 꽂혀 있었다. 그녀가 제릭을 향해 조금 앙큼스러운 눈웃음으로 말했다.

“벨차라키에서 그 위명을 떨치고 계신 테릴국의 용병대 대장께서 전장을 버려둔 채 이 먼 곳에서 대체 무슨 바람이신가?”

“에르카.”

제릭이 그 이름을 부르며 빙긋 웃자 제나는 그제야 경계를 풀고 둘을 번갈아 보았다. 아는 사이인가 보았다. 그리고 벨차라키 테릴국의 용병대 대장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랬구나….’

알 수 없던 제릭의 과거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요정 에르카가 훌쩍 날아와 제릭 앞에 섰다. 머리에 꽂혀 있는 꽃들이 흔들거렸다.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다더니 바다 건너 이곳 아후란으로 오다니 말이야. 날 버리고 떠나 버린 거야?”

“그럴 리가. 그것보다 용병대는 어찌 내버려 두고 온 거야? 내가 자리를 비우면 부대장인 네가 이끌어야 하잖아.”

“흥, 그렇게 부대 걱정인 사람이 이 먼 곳에서 다른 여자의 입술에 난 상처나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물음과 동시에 에르카는 제릭의 입에 입맞춤을 했다. 제릭은 피식 웃었고 에르카는 제나를 흘끔 보며 미묘하게 웃음 짓다가 이내 주춤했다. 코를 들어 흐르는 바람결에 후각을 맡기더니 곧 미간을 구겼다.

“어디서 오크의 냄새가 나는데?”

“오크?”

제릭의 눈이 번뜩였고 제나는 심장이 멎는 충격을 느꼈다.

“흠… 그래 오크 냄새야. 가까운 어딘가에 오크 한 마리가 있는 모양인데? 꽃향기 속에서 냄새가 나. 당장 죽고 싶은가? 어디 보자.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숲을 둘러보는 에르카의 모습에 제릭은 검을 움켰다. 제나는 정말 숲속에 오크가 있는 건지 아니면 자신에게서 이미 사라진 오크의 냄새가 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상처 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분명 냄새가 나는데….”

그때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요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가? 하긴 이곳은 벨차라키가 아니니까. 아까 오다 보니까 이상야릇한 냄새가 나는 나무도 있고, 아무튼 꽃들도 바다를 건너와서 그런지 벨차라키와는 상당히 다르고 말이야. 이렇게, 후후.”

에르카는 꽃밭 같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제릭은 경계심을 풀고 피식 웃었다.

벨차라키에선 오크를 수없이 베고 또 베었지만 이곳 아후란에선 그 흔적조차 찾기 쉽지 않았다. 그러니 오크들의 서식지인 발카람에 가기도 전에 그 냄새가 난다는 건 아마 착각일 듯싶었다.

에르카는 이제야 봤다는 듯 제나의 위아래를 훑었다.

“근데 이분은 누구셔?”

제나가 물러서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자 제릭이 답했다.

“친구야.”

“친구? 여자 친구?”

“그건 네 맘대로 생각하고.”

“좋아.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요. 제릭의 생명의 은인이자 칠 년 전부터 함께 전장을 쏘아 다니고 있는 에르카라고 해요.”

에르카가 손을 내밀자 제나는 입을 꾹 닫은 채 그 손을 잡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터이지만 입술에 난 상처가 오크의 냄새를 퍼뜨릴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에르카는 제나가 자신을 무시하는 걸로 생각하고 풋 웃어 버렸다.

“제릭하고 친구가 된 지 며칠이나 된지 모르겠지만 헛생각은 하지 말아요. 제릭은 내 사랑이니까. 다 죽어 가는 걸 지극정성으로 살려 낸 내 아이나 같으니까 말예요. 그렇지, 제릭?”

“하하하.”

제릭은 그냥 웃어 버렸다.

제나는 늑대인간의 피를 가진 남자와 즐거운 요정 여자를 보며 이 기묘하고 혼란스러운 인연의 그물 속에서 자신이 붙잡혀 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도망치고 싶은 느낌….’

그런 기묘한 세 남녀의 하늘 위에선 요정 마법사 라그헨이 여전히 바람의 방향을 바꿔 놓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인간이 된 오크가 과연 언제까지 그 정체를 감출 수 있을지 흥미롭기만 했다.

‘지금은 널 도와주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난 널 발가벗길 거야. 어디 그때까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렴. 제릭의 영혼을 꺼낼 수 있을지 말이야.’

에르카는 웃음을 멈추고 다시 제나를 보았다.

“팔 하나가 없네요?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누가 잘라 버리기라도 했나요?”

제나는 담담한 시선으로 제릭을 보았고, 오래전 미친 듯이 팔을 휘두른 기억밖에 없는 제릭은 에르카의 직설에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미안해요. 내가 너무 솔직하게 물어봤네요. 하지만 친해지려면 서로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근데 왜 아무 말도 없어요? 지금 저 무시하는 거 아니죠?”

제나, 제릭, 에르카. 서로 다른 종족이랄 수 있는 세 남녀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었다.

에르카의 새소리 같은 조잘거림이 하루를 집어삼켰을까.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 흘러 밤이 찾아왔다.

깊은 밤, 조금 이지러진 보름달이 반한 빛을 드리운 숲엔 밤새 소리만 이따금 들려올 뿐 모든 게 고요한 어둠 아래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잠 못 드는 제나는 제릭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돌아누운 채 소리 없는 달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제릭의 고른 숨소리는 편안한 숙면을 이루는 듯했고 요정 에르카가 그런 제릭의 옆에 다정히 누워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전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이 밤의 질감 속에서 제나는 그만큼이나 혼란스럽게 흐르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낮에 제릭의 등에 업혀 잠이 들어 버린 일이며, 느닷없는 요정의 등장과 먹구름에서 쏟아진 무수한 벼락 줄기에 고꾸라지던 악비온의 마법사들까지… 전율에 휩싸이던 그때의 심정과 오크의 피 냄새까지….

하루사이 휘몰아치듯 일어난 그 기억과 감정들에 영혼이 하얗게 바래어진 기분도 들었다.

“ …… .”

제나는 나무의 음영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눈물처럼 반짝이는데….

오크에서 인간 여자가 되었던 순간 그토록 오열하며 기뻐했던 것도 잠시,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며 자신이 인간이란 사실이 당연시되어 언제부턴가 지하 동굴에서 가루모스와 함께 보내는 일상이 그다지 행복하진 않았는데….

‘제릭….’

그런 자신이 오크였던 사실을 되살려 주는 제릭과 운명적인 재회를 이어 가고 있는 지금,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문득문득 돋아나는 눈물 빛 감정은 왜일까.

‘아니야….’

자신은 그가 사랑했던 소녀를 죽여 버린 괴물이었다. 비록 지금은 괴물의 모습을 탈바꿈하고 아름다운 인간 여자가 되었지만 영혼의 기억마저 지울 순 없었다.

‘피 냄새….’

가슴 속 고동 소리가 선명해졌다. 정말 자신의 피에서 그 추악한 냄새가 나는 건지. 할 수만 있다면 이 깊은 밤 자신의 과거인 오크 고욤을 영원히 묻어 버리고만 싶었다.

“왜 잠 못 들죠?”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니 요정 에르카가 조금 떨어진 바위에 앉아 있었다. 그 앙큼스러운 눈매는 아무리 보아도 친해지기 힘들 것 같은 예감을 주었다. 제나는 표정을 추스르고 몸을 일으켰다.

은은한 달빛과 별빛이 숲의 하늘에서 쏟아져 둘 사이에 쌓이는 듯했다.

“그쪽은 왜 일어나셨는데요?”

제나의 물음에 에르카는 다리를 꼬면서 답했다.

“그을쎄요. 그쪽이 잠 못 들며 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 같아서 일어났다고 하면 솔직하다고 할 건가요?”

제나는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내보이는 요정을 보며 온통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애써 미소 지었다.

“그냥… 잠이 안 오네요. 오늘 하루도 알 수가 없고, 내일은 더 알 수 없는 꿈을 꾸게 될 것만 같은지….”

“그런 모호한 표현은 이곳 아후란 대륙에 사는 요정들의 표현법이죠. 우리 벨차라키의 요정들은 저처럼 있는 그대로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같은 요정이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거죠. 제나는 혹시 요정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엘프라도 되나요?”

하프엘프….

제나는 마음속으로 그 말을 뇌어 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걸까. 아득한 별바다를 올려다본 뒤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되고 싶어요. 하프엘프….”

“왜요?”

“왜냐면… 왜냐면….”

제릭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누군가가 저를 더 좋아해 줄 것 같아서.”

“후후, 헛생각 하지 말라고 했죠? 제릭은 내 거예요. 제나는 생각이 많아 보이니까 그냥 어디 철학자나 마법사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아 봐요. 제릭 같은 투사는 나 같은 수다쟁이하고 잘 어울리니까. 달이 깨알 같은 별들하고 잘 어울리듯이 말이죠.”

달은 별들하고 잘 어울린다….

에르카는 제릭이 늑대인간의 후예라는 걸 알고 있는 걸까, 궁금해하며 제나는 숲의 향기를 닮은 미소를 지었다. 오크의 냄새가 아닌 맑은 숲의 향기를 지닌 하프엘프 같은….

고대 아후란 대륙의 신화가 깃들어 있는 발카람.

그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 오지의 깊은 지하 동굴 속에선 복수를 꿈꾸는 늙은 마법사 가루모스가 밤낮의 변화를 알 수 없는 횃불 아래서 제나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지난 십 년 동안 제나 자신만큼이나 달라진 제릭에 대해 좀 더 알아 오겠다고 했는데 기다려도 오지 않고 있었다.

“심각한 문제라도 생겼을까?”

이계와 마계의 마법을 혼합해 새로이 구축한 자신의 마법을 고스란히 물려준 제나였다. 더해서 대신전의 신성마법의 결계까지 두르고 있으니 얼마든지 제릭의 눈을 피해 공간이동을 해 올 능력이 있었다.

“설마 악비온의 개들에게 당하거나 한 건 아니겠지? 아니면 제릭과 어떤 충돌을 일으켰거나… 아니야, 나보다 더 냉철한 제나가 그럴 리 없지.”

도리질을 하던 가루모스의 주름진 얼굴에 문득 모호한 미소가 생겨났다.

“혹시….”

표정에 질투심이 일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젊은 여인의 육체이니 제릭을 한 번 유혹하고 싶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마지막 열 번째 영혼을 꺼내기 전 자축이라도 하듯 사냥감을 맛보고 있는지도 말이야. 후후.”

가루모스는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흐뭇한 상상을 했다. 사랑하는 이의 그 정도 일탈은 얼마든지 참아 줄 수 있었다.

어둠이 짙어 가는 한밤.

산 정상에서 레에스랑의 외딴 숲 지대를 내려다보는 일곱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중엔 제릭의 벼락을 맞고 추락했던 중부 감찰 마법사 툴루안도 있었으니, 여전한 그 충격으로 안광에 힘이 없었다.

그때 곁에 서 있는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마법사가 낭랑히 입을 열었다.

“해가 뜨면 이 숲을 비롯해 근방의 모든 지역을 샅샅이 뒤질 것이오. 툴루안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만에 하나 가루모스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자라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오.”

평화의 탑에서 고위급 마법사들을 이끌고 공간이동을 해 온 수석 마법사 크로닌은 손안의 푸른 벼락을 자그락 움켜쥐었다.

‘벨차라키에서 왔다….’

바다 건너 매일 원초적인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대륙, 그곳에서 온 놀라운 상대와 한 번 겨뤄 보고 싶은 투쟁심이 평화의 탑 서열 두 번째인 크로닌의 두 눈을 빛나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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