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31)화 (131/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31화

‘내가 뭘 생각하는 거람.’

혼자 두근거리며 리암의 의도 같은 것을 헤아려서 뭘 어쩌자는 걸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인데.

마침 그의 차에 도착한 것은 다행이었다. 가방은 뒷자리에, 그들은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비가 차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얼른 문을 닫자, 귀를 가득 메어 왔던 빗소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비교적 고요함을 느꼈다.

물론 이런 감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차 위로 툭툭 떨어지는 새로운 소리로 채워졌지만 말이다.

“엄청 내리네요…… 에취.”

얇은 여름 블라우스에 비가 달라붙은 탓인지 몸에 한기가 든 모양이었다.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흘렸다.

“우산을 제대로 쓰라고 했잖아.”

그러자 운전대 앞에 앉은 리암이 또 걱정이 내비치는 시선으로 다프네를 돌아보았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공작님께서 중요한 가방을 들고 계시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프네가 우물거리며 답하자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재킷을 벗어서 내밀었다.

“걸쳐, 지금 감기라도 걸렸다간 이도 저도 안 되니까.”

“아뇨, 주인의 옷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무척 간단한 방법으로 그녀가 옷을 받아 들게 했다.

“걸쳐, 서튼. 환자잖아.”

“아…… 네.”

다프네는 공손하게 그의 옷을 받아 들며 조금 전에 그가 덧붙인 말을 생각했다.

「환자잖아.」

‘환자를 걱정하는 건 보편적인 일이지.’

그런 당연한 일을 두고서 어째서 리암의 마음을 가늠해 보려고 했을까. 다프네는 자신이 조금 바보 같이 느껴졌다.

그녀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가 건네준 재킷을 입어 보았다. 꽤 품이 넉넉한 탓인지 ‘입는다’ 보다는 ‘파묻혔다’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흐늘거리는 소매 끝을 내려다보면서 조금 웃고 말았다.

“엄청 따듯하군요. 감사합니다.”

감탄하듯 건넨 감사의 말에도 그는 별로 답이 없었다. ‘돌아가면 제대로 세탁해 두도록 해.’ 따위의 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막상 바라본 그는 화가 난 사람처럼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눈동자를 달달 떨고 있을 뿐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다프네가 묻자, 그는 순간 벌어진 입술로…….

“……귀…… 읍.”

이상한 신음만 내뱉더니, 결국에는 운전대에 머리를 처박았다.

“잘 못 들었습니다?”

“아니, 아니야.”

의미 모를 부정의 말을 내뱉은 그는 얼른 고개를 들어 차량을 운전하기 시작했다. 비가 짙은 탓인지 길에는 마차가 거의 없었다.

리암이 운전에 집중하는 듯하여, 다프네는 별다른 말 없이 제 옆의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풍경이라도 바라볼 생각이었으나, 그의 옷에서부터 부드럽게 밀려드는 습한 향기에 자신도 모르게 온 신경이 기울어지고 말았다.

두 눈이 저절로 감겼다.

참 이상했다. 옷을 관리해야 하는 다프네에게 ‘습기’란 멀리해야 할 적이었다.

그런데 녹은 눈이라도 잔뜩 머금은 듯한 이 끈적한 느낌에서, 그녀는 깊은 안정감을 느꼈다. 이 향기에 완전히 안겨 있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아니, 사실은 향기가 아니라…….

‘……미쳤어!’

다프네는 제 생각을 부정하며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무래도 다프네의 머릿속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자꾸만 이런 식으로 생각이 흐르다니.

“차, 차 안은 덥네요. 이거 돌려 드릴게요.”

다프네는 얼른 주섬주섬 재킷을 벗었다. 왠지 이대로 입고 있다가는 더 못된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는 두려움에.

리암은 다프네를 흘긋 돌아보기는 했어도, 금방 다시 정면만을 주시했다.

“갖고 있어, 운전 중에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아.”

그건 아주 당연한 답인데도, 다프네는 망연자실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운전 중인 사람에게 어떻게 옷을 돌려줄 생각이었을까.

다프네는 가지런히 갠 옷을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추우면 다시 입고.”

“괜찮습니다. 아, 저기…….”

다프네는 가능하면 그의 재킷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이야기를 돌렸다.

“수도에 새로운 집을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마침 그에 대해 알게 된 새로운 소식이 있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게 기사까지 난 건가?”

“예, 저도 제목만 읽어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요.”

“별 내용 없을 텐데, 기삿거리로 쓸 만한 일은 아니고…… 그런 가십거리는 왜 다루는지 모르겠어.”

“공작님의 사소한 부분을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어쨌든 돌아가면 마저 읽어 볼 생각입니다. 아마 어떤 용도로 사셨는지 추측한 기사일 겁니다. 보통 그러니까요.”

“나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용도를 기자가 생각해 주다니 고마운 일이군.”

“예? 계획도 없이 집을 사셨다고요?”

“그래.”

“왜요?”

“그냥, 그 집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지가 않았어.”

린든 남작의 집에 그 정도의 가치가 있던 걸까? 다프네는 남작의 행적을 생각하며 조심스레 질문을 건네 보았다.

“혹시 애슐리 슬로언과 연관된…….”

“아니.”

“그럼요?”

“…….”

그는 또 침묵했다. 다만 다프네의 질문을 귀찮아하거나 질색하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말을 무척 신중히 고르는 듯싶었다.

“그 집에는 추억이 있어서.”

한참 만에 답이 돌아왔을 때는, 마침 거세기만 했던 비가 다소 잦아든 탓에 그의 목소리가 비교적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정말로 소중한.”

왠지 모를 쓸쓸함에 다프네는 그가 그 집에 의지하여 헤아리는 기억이 무엇인지 차마 묻지 못했다.

“물론 그 집 안에 책이 많다는 것이 특히 매력적이었지만.”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느꼈는지 그는 애써 가벼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건 확실히 좋은 점이군요.”

“동의해 주니 기쁘군.”

마침 그의 자동차가 저택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결 가늘어진 빗줄기 사이로 마침 하얀 태양 빛이 흘러들어와 다소 눈이 부셨다.

다프네는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로, 곁을 돌아보았다.

“공작님도 귀가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직 일이 조금 남아서. 그대만 내려 주고 다시 나갈 거야.”

“제가 귀찮게 해 드렸군요.”

“신경 쓰지 마. 쉬운 일이니까.”

차량이 언덕을 다 올라왔다. 잘 가꾼 넓은 정원에 이르자 리암은 다소 속도를 늦추었다.

“귀찮지도 않았고.”

“하지만…….”

괜히 마을에서 저택을 오가는 수고를 하셨는데요? 라고 물으려던 것을, 다프네는 그만두었다.

마침 그의 차가 현관 앞에 멈춘 탓이었다.

“정말로 귀찮지 않았어.”

그는 다프네가 반박하려던 것을 알았는지, 굳이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왠지 진한 다정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이상해.’

그저 불편하지 않았다는 말이, 그녀의 귓가에는 꼭 ‘이렇게 하고 싶었다’라는 말로 바뀌어 들리는 것 같았다.

그건 전혀 다른 의미의 말인데도.

‘혹시 이것도 애슐리의 약을 먹은 탓일까?’

기억이 떠오르는 길을 막아서는 독한 약이라고 했으니까, 다프네의 사고에도 영향을 미치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말로.’

그와 다프네의 관계가 변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의 옷에서 느껴진 체취에서 묘한 감정을 느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면…….

“다프네?”

리암이 부르는 소리에 다프네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의 옷이 구겨지도록 꼭 붙은 채였다.

“아, 죄송합니다. 바로 내리겠습니다.”

다프네가 몸을 돌려 차에서 나가려는데, 리암이 얼른 그녀의 손등을 붙잡았다.

“……!”

흠칫 놀라며 돌아보자, 그도 당황했는지 얼른 손을 떨어뜨렸다.

“아, 아니.”

그리고 어째 그는 새빨개진 얼굴로 변명 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우산! 우산을…….”

“아, 어…… 이제 거의 그쳐서 괜찮습니다. 뒷문까지는 금방이니까요.”

다프네는 괜히 제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왠지 손끝이 뜨거웠다.

그는 뒷자리에 놓여 있던 우산을 굳이 다프네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래도 쓰고 가.”

“…….”

그사이에 엔진 소리를 듣고 나온 집사가 리암의 손짓을 따라 뒷자리에 놓인 가방을 들기 위해 문을 열었다.

“서튼은 주 현관으로 들어갈 거야.”

리암이 돌아보며 건넨 말에 집사는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고서 ‘예’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은 몰라도 전 뒷문으로 가도 됩니다. 이렇게 우산도 빌려주셨고요.”

“그대가 걱정돼서 그래.”

“…….”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하자, 오늘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리암의 표정에는 여전히 붉은 기가 남아 있어서, 다프네는 ‘내가 환자니까 친절하게 대해 주는 걸 거야.’라는 생각은 왠지 더 할 수 없게 되었다.

무언가가 있었다.

다프네가 잊어버리고, 그가 억지로 숨기고 있는 어떤 것이.

“공작님, 혹시.”

“음?”

“우리가…….”

“……?”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집사가 문까지 열어 준 이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어서, 다프네는 그에게 고맙다는 말만 남긴 채로 차에서 내려야 했다.

* * *

방으로 돌아와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후, 다프네는 가장 먼저 브리와 아셔를 찾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바쁜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에 일단은 따듯한 우유를 한 잔 챙겨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 옆 스툴 위에 잔을 내려놓은 후, 다프네는 기록실에서 가져온 신문을 몇 가지 꺼내 들었다.

그녀가 잃어버린 기억을 전부 찾을 필요는 없었지만, 적어도 서튼으로서 일할 때 미흡함이 없도록 사회적인 변화는 알아 두고 싶었다.

몇 가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슬로언 가문에 충성하는 가문, 커빙턴 가문에서 마법사를 배출했다는 것.

힐링엄 백작 가문의 몰락.

화재 사건에서 활약한 치안대원들의 공로.

“……사무엘?!”

다프네는 제 동생의 이름이 인쇄된 기사를 몇 번이나 다시 읽다가 잔뜩 울상을 지었다.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다니…….”

다시 만나면 잔소리를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다프네는 자신의 행동 양식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당시의 그녀가 철저하게 동생을 혼내 주었으리라.

다프네는 쓰린 마음을 간직한 채로 다음 신문을 가져왔다. 순서가 섞여 있었는지 비교적 최근 것이다.

리암의 주택 구매 기사가 있었다. 그녀가 가장 마지막에 읽다가 그만두었던 것 말이다.

[슬로언 공작은 린든 남작이 경매에 내놓은 주택을 가장 높은 가격에 사들였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리암이 나타나서 엄청 놀랐었지…… 라며 다프네는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기사는 주택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해당 주택은 본래 힐링엄 가문이 짓고 소유해 왔으나, 최근에 파산하며 린든 남작이 이를 사들였다.

[공작은 죽은 약혼녀의 주택을 매입하는 것으로, 깊은 그리움을 채우려는 듯 보인다.]

다프네는 신문을 든 채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