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21화
신을 기리는 조각이 방향마다 새겨진 둥근 지붕의 아래로, 애슐리가 사제와 함께 다프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하얀 정장이 얄미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남자가 부드럽게 녹아드는 미소를 지을 때, 하객 중 일부가 안타까움에 신음했다.
저렇게 근사한 남자가 결국 누군가의 소유가 되고 마는구나, 라고 하는 듯했다.
다프네는 새하얀 수국을 빼곡하게 장식한 중앙 통로를 따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이따금 주변을 둘러보고 싶다는 욕망이 밀려오기도 했지만, 다프네는 함부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직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그의 앞에 다다르자 애슐리가 그녀를 맞이하러 나왔다.
그가 팔을 내밀었고, 다프네가 이를 붙잡았다.
고작 신랑과 신부가 함께 서는 것뿐인데도 성급한 하객 중 일부는 벌써 작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기쁨의 소리를 뒤로한 채, 그들은 계단을 올라 사제의 앞에 나란히 섰다.
곧 예배당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대사제는 약속된 기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성가의 연주에서, 다프네는 처음으로 제 곁에 선 남자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마침 그도 다프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시선이 딱 마주쳤다.
생긋 웃는 미소가 돌아왔다.
다른 사람이 보고 있을 때면 그가 늘 짓곤 하던 상냥한 미소였다.
이렇게 웃고 나면 그는 꼭 다프네가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다프네는 익숙하게 그를 따라 웃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튼, 예쁘게 웃어야지?’라는 협박을 듣기 일쑤였으니, 일단은 맞추어 줄 생각이었다.
다시 사제의 기도가 이어졌다.
서로를 향하던 다프네와 애슐리의 시선이 다시 그를 향했다.
이제 그들의 결혼을 허락받고 신께서 요구하는 부부간의 규율을 맹세할 차례였다.
이 혼인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여, 다프네와 애슐리를 주목하는 하객들의 시선이 더욱 많아졌다.
“애슐리 앨런코트 슬로언 그리고 다프네 앤 서튼.”
사제가 그들을 부르며 두 손을 앞으로 마주 대었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였는데, 신랑과 신부는 이에 따라 정면으로 마주 서야 했다.
곧바로 사제는 애슐리에게 약속된 질문을 건네었다.
신께서 정하신 운명의 배필을 평생토록 존경하고, 다프네의 존엄을 긍정하겠느냐고.
이는 결혼을 약속한 부부라면 모두가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하는 무척 보편적인 질문이었다.
다만 다프네는 사제가 말하는 존경과 존엄이라는 말과 결혼이라는 말이 나란히 놓이는 것이 그저…… 낯설었다. 아마 그런 것을 경험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사실은 눈앞에 있는 남자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예식을 마친 이후로 갑자기 없던 마음이 솟아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도 애슐리는 뻔뻔할 정도로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맹세합니다, 저의 모든 것을 걸고서.”
그 가벼운 맹세를 듣는 순간, 다프네는 ‘말도 안 돼’라는 말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이제 대사제의 시선이 다프네를 향했다.
“다프네 앤 서튼.”
이제 그녀에게도 같은 질문이 돌아오리라.
눈앞에 서 있는 남자, 애슐리 슬로언을 존경하고, 존엄을 긍정하겠느냐고.
맙소사, 그 질문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다프네는 속에서 열이 차올라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그대는…….”
그리하여 대사제가 그 질문을 시작하려는 찰나.
다프네는 애슐리를 향한 시선을 날카롭게 바꾸며 이렇게 답했다.
“아뇨.”
“…….”
대사제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기에, 그녀는 애슐리를 더욱 집요하게 노려보며 다시 답해 주었다.
“절대 못 합니다.”
아무래도 애슐리는 이러한 다프네의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늘 여유로움을 장식처럼 달고 다니던 그의 얼굴이 난생처음 당혹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볼 기회는 그다지 흔치 않았기 때문에, 다프네는 그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더욱 커다란 목소리로 분명히 답했다.
“저는 살인자를 존경할 수도, 존엄을 긍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 단단한 목소리는 둥근 천장까지 타고 올라 고요했던 예배당 전체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조금씩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들었어?
살인자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런 가운데에서 다프네는 여전히 애슐리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볼 뿐이었다.
처음에는 뭐라고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한 채로 굳어 있던 애슐리의 표정이 일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너……!”
그러나 그는 곧 많은 이들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변화였으나, 다프네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정말 죽는 꼴 보고 싶어?”
그가 최대한의 인내를 발휘하여 작은 목소리로 협박했다.
그가 누구를 두고 협박을 하는지는 분명했다. 다프네의 동생, 사무엘 서튼이었다.
지척에 서 있던 대사제가 애슐리의 협박을 함께 듣고서 놀라며 숨을 삼키는 사이, 다프네는 몸을 돌려 예배당에 모인 하객들을 향해 돌아섰다.
호기심과 혼란으로 가득한 많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다프네는 입을 열었다.
“애슐리 슬로언은…… 흡!”
하지만 겨우 시작된 고발은 겨우 거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황급히 다가온 애슐리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단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향해 방긋방긋 미소를 지었다. 선량해 보이는 사람 특유의 분위기를 풍기면서 말이다.
“죄송합니다. 실은 저희가 어제 크게 싸웠거든요. 아직도 토라진 게 풀리지 않아서요.”
그가 장난이 섞인 목소리로 변명을 건넸지만, 어째 분위기는 간단히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어색한 침묵만을 이어 가는 사이,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약혼한 사이에 싸우는 일이야 뭐 자주 있죠. 네? 안 그런가요?”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수도에서 온 린든 남작이었다. 그는 제 옆에 선 남자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동의를 구했다.
“뭐…… 그렇긴 합니다만.”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며 어색하게 굳어 갔던 분위기가 조금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서튼.”
애슐리의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현명하게 굴어야지. 안 그래? 정말로 네 동생이 죽는 꼴 보고 싶어?”
“…….”
“이번에도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다 끝내 버릴 줄 알아.”
저급하기 짝이 없는 말을 마치고 애슐리는 다프네의 입을 막았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리고 꼭 토라진 연인을 달래는 듯 그녀의 양쪽 팔을 붙잡고서 제 얼굴을 바라보게 했다.
그녀가 다시 고분고분해졌다고 생각했는지, 애슐리는 그들의 뒤에 서 있던 대사제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식을 계속해 달라는 뜻이었다.
“……흠.”
대사제는 천천히 목을 가다듬고는 그들 사이에 바로 섰다.
“다프네 서튼.”
엄격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 후, 사제는 한쪽 손을 들어 엄숙하게 선언했다.
“어쩌면 고해 의식 때 그대가 이야기한 것이 모두 사실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당황한 애슐리가 대사제를 돌아보았다.
“애슐리 슬로언은 신성한 예식의 상대에게 협박을 일삼은 것은 물론, 죄 없는 어린아이를 이용하여 제 명예욕을 채우려고 한 정황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교회의 법으로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깊은 죄.”
담담하게 그의 죄를 읊는 대사제와는 달리 애슐리의 얼굴에는 새빨간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성을 잃은 그가 감히 대사제를 향하여 손을 뻗으려고 할 때.
다프네는 새하얀 부케를 높이 들어 올려 그의 머리를 강하게 가격했다.
파앙!
그의 머리 위로 새하얀 꽃잎이 솟아올라, 두 사람 사이로 살랑살랑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대사제는 고개를 높이 들어 올려 선언했다.
“예정된 모든 예식을 멈추고, 애슐리 슬로언을 연행하기 위한 치안대의 입내를 허가하겠습니다.”
* * *
리암 슬로언은 틀리지 않았다.
공작이 남기고, 휴고 마플이 감추어 온 열쇠로 열어 본 서랍 안에는 선대 공작이 마련해 놓은 고발 문서와 증거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다만 이를 꺼낸 것은 다프네가 아니었다.
“그는 나를 계속 감시할 거예요. 당신 외에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요.”
다프네는 클롯모어의 저택에 도착함과 동시에, 그 열쇠를 가장 믿을 수 있는 협력자에게 넘겼다.
“리디아 님.”
“…….”
“그 서랍의 내부를 확인해 주세요. 내용물은 이 주소로 보내 주시고요.”
다프네는 그녀에게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언젠가 수도에서 엘이 언제든 연락하라며 알려 준 것이다.
「응! 시간이 될 때 여기로 심부름꾼 소년을 보내. 난 항상 다프네를 위해서 시간을 비워 두고 있을게! 통상적인 시간은 물론이고 아침이나 새벽도 괜찮아. 한밤중이라 해도 언제든 달려올게!」
리암이 엘에게 열쇠를 맡겼다는 것은, 그를 협력자로 여겨도 좋다는 뜻이리라. 반드시 도움이 되어 줄 터였다.
그렇게 저녁 만찬 후, 다프네가 방으로 와 보니 그 열쇠가 다시 방에 돌아와 있었다.
리디아를 찾아가서 어땠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녀와 필요 이상으로 접촉하면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그 욕망을 꾹 누른 채로 다프네는 직접 리암의 방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내용물은 이제 볼 수 없겠지만, 정말로 서랍이 열리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으므로.
혹시 애슐리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차피 서랍에 있던 서류는 빼돌린 이후이니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니, 어떤 점에서는 차라리 들키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프네가 희망을 안고 열어 본 서랍이 텅 비어 있다면, 그가 몹시 기고만장해할 테니까.
그리고 그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게다가 서랍 안에는 리디아의 지혜가 빛나는 다른 물건이 들어 있었다. 바로 수기로 작성된 슬로언의 역사서 말이다.
이는 예전에 다프네가 앨러스테어를 처음 만났을 때 건네준 것이기도 했다.
혹시 그녀를 ‘진정한 서튼’이라 생각한다면 부디 지지해 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이 자리에 굳이 그 책을 골라 넣어 놓았던 것은 어쩌면 리디아가 다프네에게 보내는 나름의 답변일지도 모른다.
* * *
대사제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문이 조금씩 열리며, 옅은 그림자가 깃든 예배당의 바닥에 태양이 새하얀 빛의 길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여전히 흩날리는 꽃잎 사이에서 이를 돌아보았다.
두 줄로 늘어선 치안대의 가장 앞선 곳에는…….
“공작님.”
빛 속에서도 지극한 어둠뿐인, 새카만 남자.
리암 슬로언이 보라색 눈동자를 빛내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