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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20)화 (120/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20화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다프네는 초췌한 몰골로 눈을 떴다.

리암의 방에서 몰래 서랍을 열어 보려던 것을 들킨 후에는 그 끔찍한 약을 삼켜야 했다.

애슐리는 이를 ‘벌’이라고 했다.

아직도 헛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이런 쓸모없는 열쇠 따위에 기대를 품은 것에 대한.

「얌전히 결혼식이나 기다려. 며칠 안 남았으니까. 너 같은 것과 결혼해 주는 것만 해도 고맙게 여길 줄 알아야지.」

그는 싸늘한 투로 그리 말하며, 토악질을 해 대는 다프네의 등을 몇 번이나 두드렸다.

혼절하듯 그의 방에서 잠이 들었으나, 아침에 깨어 보니 다프네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되돌려 놓았을까?

다프네는 아마 그랬으리라 생각했다. 애슐리는 그녀와 한방에서 밤을 보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후…….”

다프네는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입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터라 빨리 씻고 싶었지만, 지금은 설렁줄을 당겨 하녀를 부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녀는 일단 서랍을 열어 작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 * *

결론적으로 원로들은 애슐리 슬로언을 불러오자던 선택에 만족했다.

그는 의도치 않게 비어 버린 공작의 자리를 완벽하게 대체했다.

비용 지급이 멈춘 탓에 중단되었던 각종 토목공사가 계속되었고, 봄과 여름을 지나며 개최되는 각 지역의 크고 작은 마을 꽃 축제도 무사히 열릴 수 있었다.

매일같이 지방에서 올라오는 의견서에도 애슐리는 ‘공작 대리’의 이름으로 빠짐없이 답변을 주었다.

혼란이 일었던 클롯모어 저택에는 어느새 안정이 찾아왔다.

이제 원로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두 가지뿐이었다.

리암의 억울함이 증명되어 무사히 풀려나 클롯모어로 돌아오는 것.

혹은 애슐리가 결혼하여 그 부인인 서튼이 어서 후계자를 낳아 주는 것 말이다.

원로들에게 이건 반드시 하나를 택해야 할 문제는 아니었다. 공작가의 안정적인 존속을 위해서라도 둘 다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애슐리는 생각이 달랐다.

리암이 무죄를 선고받고 돌아오는 것은 곤란했다. 어떻게 되찾은 자리인데 도로 그에게 이 달콤한 과실을 양보하겠는가.

애슐리가 차지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의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가 이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는 냉정하게 리암을 죽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지도 못했다.

애슐리에게는 바람이 하나 있었다.

자신과 다프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리암에게 소개해 주는 것 말이다.

그 멍청이의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질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를 너무나도 보고 싶다는 욕망에 애슐리는 왕에게 탄원서를 적었다.

사랑하는 동생의 처벌을 제발 뒤로 미루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부디 그가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도 청했다.

이런 그의 속내를 모르는 원로들은 그저 애슐리의 인덕을 칭찬하기만 바빴는데, 애슐리는 그 간지러운 소리를 듣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고집스러웠던 다프네도 자포자기한 듯 제법 그에게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그녀가 함부로 저택을 돌아다니는 일도 없었다. 필요한 것은 하녀에게 부탁하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약을 거부하는 일이 없었다.

다만 점차 건강이 나빠지기만 뿐, 어째 기억이 흐릿해지는 경향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몸 안에 흐르고 있는 맹약이 보호 작용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애슐리는 다프네가 더욱 흥미롭게 느껴졌다.

어쨌든 약은 계속하여 먹여 볼 생각이었다.

그래야 언젠가는 리암에게 다프네의 변절을 지켜보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애슐리가 아버지의 변절을 보아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암, 낫고말고! 리암은 너보다……!」

불쾌한 과거의 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에 애슐리는 애써 고개를 흔들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에 창문을 내다보니, 까만 자동차 한 대가 언덕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애슐리는 감각으로 수도에서 왕이 보낸 시종이 도착했음을 알았다.

그를 대마법사로 임명하는 문서와 새로운 로브를 가지고서 말이다. 이는 곧 치러질 애슐리의 결혼식에서 공식적으로 전달될 예정이었다.

“애슐리 님, 왕께서 보낸 자들이 도착한 모양입니다.”

곧 서부 엠버혼에서 돌아온 아셔가 애슐리의 방으로 찾아왔다.

“고맙구나, 아셔.”

애슐리는 창가에서 돌아서서 아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역시 몹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아셔가 처음 엠버혼에서 돌아왔을 때는 아버지의 일로 애슐리를 다소 경계하는 듯했다.

하지만 고작 며칠 정도 곁에 두고 달콤한 말을 들려주자, 아셔는 금방 다시 예전과 같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참 싱겁고 멍청한 아이구나, 라며 애슐리는 쓰게 미소 지었다.

아마 이런 아셔의 배신도 리암에게는 꽤 아픈 상처가 될 터다.

“던컨에게 내가 바로 나가겠다고 전해 주겠니?”

“네, 서둘러 주시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야.”

애슐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고, 아셔는 얼른 그의 방을 빠져나와 1층으로 향했다.

혼자 남은 애슐리는 여태껏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고 정장 재킷을 갖추어 입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빼앗겼던 모든 것이 그의 손끝에 거의 닿은 것 같았다.

이제 오직 움켜쥐는 것만이 남았을 뿐이다.

* * *

애슐리와 다프네의 결혼식이 열리는 날은 강렬한 여름 햇살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새파란 하늘에는 구름 하나 없어서 태양은 온 세상에 강한 빛을 아낌없이 쏟아 내었다.

하녀의 도움을 받아 하얀 웨딩드레스를 갖추어 입으며, 다프네는 끊임없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조용히 되뇌었다.

‘난 시간을 되돌아왔어. 사무엘을 지키기로 했고 슬로언 공작님의 수행원이야. 그리고…….’

본격적으로 약을 먹기 시작한 이후로 매일같이 되뇌는 말들.

그녀는 혹시 잊은 것이 생길까 이를 작은 수첩에 빼곡하게 적어 놓기도 했다.

다행히 아직은 아무것도 잊어버린 것이 없었다.

그녀가 과거에 적어 놓았던 모든 사건이 또렷하게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분명했다.

비록 언젠가는 많은 것을 잊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까지만은 이 모든 기억이 온전하기를 바랐다.

“어떠세요, 아가씨? 아니, 이제는 마님이라고 해야 하죠?”

하녀 아가씨의 호들갑 소리에 눈을 떠보니 거울 너머로 낯선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하얗고,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응, 좋네.”

다프네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꽃장식을 더 추가할까요? 이 보석 장식은 어떠세요?”

“전부 달아 줘.”

“그렇게 말씀해 주실 줄 알았죠. 기대하세요!”

다프네는 자신이 화려하게 치장할수록 얼굴에 드리운 악의를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편이 나았다. 애슐리를 방심케 하기 위해서는.

하녀가 신이 나서 장식을 달아 줄 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리디아였다.

그녀는 지난 며칠간 애슐리를 찾아가 제 아들을 도와 달라며 읍소했다.

그사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 걸까. 그녀의 얼굴은 보는 사람이 더 안타까울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리디아 님.”

다프네의 목소리에 동정이 깃들었기 때문인지, 곧 그녀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아무 말씀 마시길.”

“…….”

“듣고 싶지 않습니다.”

다프네가 침묵하자, 그녀는 근처에 놓인 부케를 대신 챙겨 들었다.

“대성당까지 이동하실 차량이 준비되었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네.”

다프네는 말없이 리디아를 따라 손님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별관 입구로 가 보니 검은색 차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다프네와 가깝게 지냈던 브리가 엉거주춤 서서 다프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그녀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고 다가왔으나, 리디아가 그들 사이를 막아서며 이를 저지했다.

“바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대사제님을 뵐 시간입니다.”

다프네는 자신을 위해 나와 주었을 고마운 친구를 향해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차량에 탑승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문을 닫아 주려는 리디아에도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리디아 님.”

“……됐습니다. 제대로 하기나 하세요.”

그녀는 불퉁한 얼굴로 그리 답하고는 부케만 건네준 채, 바로 탁 문을 닫았다.

다프네를 태운 차량이 대성당을 향해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 * *

오랜 예법에 따라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다프네는 애슐리를 직접 만날 수 없었다.

다프네는 혼인 예식 전에 의무적으로 치러야 할 사제 면담과 고해 의식을 마치고, 신부 대기실로 돌아왔다.

어느덧 예배당에서 하객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클롯모어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물론, 슬로언 공작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타 귀족들도 멀리에서부터 기꺼이 방문해 주었다.

결혼식은 물론 애슐리를 대마법사로 임명하는 자리인 터라, 수도의 마법사들도 여럿 방문하여 자리를 채워 주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애슐리는 대마법사가 되었음을 자랑하는 것은 물론, 은연중에 슬로언 가문에 대한 권리 역시 손안에 쥐고 있음을 선보일 생각이리라.

종탑에서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예배당 안에 모여든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리가 없어 바깥에 서 있는 이들 역시 기대에 찬 환호성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곧 초를 든 수습 사제들이 찾아와 다프네의 앞에서 공손하게 절을 올렸고, 다프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저희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사제들의 한 발짝 뒤에 선 다프네는 좁은 복도를 지나 많은 사람이 모여든 입구를 지났다.

그녀의 주변으로 끊임없는 축복의 말과 환호성이 울려왔지만, 다프네의 귀에는 제대로 들려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수많은 시선이 닿는 것이 어지러웠다.

어쩌면 지나치게 긴장한 탓일지도 모른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라는 걱정이 들어 쓰러질 듯 숨이 가빠 오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였다.

그녀가 예배당 안에 들어서는 순간, 차분하고 서늘한 공기가 그녀의 콧날을 지나 폐부까지 빼곡하게 채웠다.

이와 동시에 다프네를 괴롭히던 그 모든 괴로움은 사라졌다.

앞서가던 수습 사제들이 한 걸음씩 옆으로 비켜섰고, 다프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 앞에 놓인 새하얀 길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끝에 서 있는 애슐리 슬로언을.

과거에는 그녀의 지옥이었던 남자.

다프네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다프네가 그의 지옥이 될 차례였다.

드디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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