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98화
그 뒤로 똑같은 침대가 세 개나 더 놓여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사용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누군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리라.
침대의 옆에는 텅 비어 버린 노란색 약병과 주인 없는 목도리, 장갑 따위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언젠가 다프네는 사냥꾼의 요람에서 똑같은 장갑을 구매한 적이 있었다.
「그래, 연고 없는 아이들을 돌봐 주는 곳 말이야. 마법사님은 매년 방한용품을 사서, 후원하는 시설로 보내 주고 계시지. 정말 좋은 분이야.」
그렇구나.
다프네는 어째서 지난 생의 자신이, 애슐리의 이러한 ‘선행’에 대해 알지 못했는지 이해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실험체가 될 아이들의 건강 유지를 위해 사서 보내는 것뿐이었다.
그의 더러운 면이 드러날 수 있는 일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서 시설을 후원해 온 것이리라.
“살아 있어. 의식은 없는 것 같지만.”
리암이 아이의 얼굴로 몸을 기울였다. 미약하나마 호흡이 느껴진 듯했다.
소년이 누운 옆에는 시큼한 냄새의 주범인 양동이가 있었다. 토악질하는 것을 받는 데 쓴 것인지, 말라비틀어진 찌꺼기 따위가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루비…….”
다프네는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기차에서 만났던 루비의 동생인 것 같아요. 토마스라고 했어요. 이렇게 생긴 인형을 지난달에 입양 갈 때 꼭 챙겨 갔었다고…….”
“입양이라고.”
리암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작은 탁자에 촛불을 내려놓았다.
그 위에는 노란색 유리병이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병마다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아마 소년에게 약을 먹인 시간인 듯했다.
“……미쳤군.”
서랍을 열어 보자, 거기에는 주기적으로 아이의 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해 놓은 일지와 손가락 길이의 열쇠가 하나 들어 있었다.
“흠?”
열쇠는 이 낡은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세공 장식이 되어 있었다. 일단 열쇠를 옷 안에 넣어 둔 후에는 일지를 펼쳐 들었다.
* * *
리암은 아이를 1층으로 데려와 난로 부근에 눕혀 주었다.
그리고 철제 주전자에 눈과 얼음을 담아와 한번 끓인 물로 간단하게나마 몸을 닦아 주었다.
그렇게 해도 아이의 몸에 남은 악취는 여전했다. 아마 오랜 시간 내버려 두어 아예 몸에 깊이 배어든 것 같았다.
“……의사를 데려올 수 있다면 좋겠는데.”
다프네가 지하에서 외눈박이 인형을 가져와 소년의 곁에 함께 눕혀 주며 걱정스레 말했다.
이에 리암이 흘긋 창문 너머를 확인했다. 아직 늦은 밤중이었다. 적어도 내일 아침에 해가 떠올라 길이 녹을 때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잠시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다시 지하로 내려가 내부를 살폈다.
그리고 아이에 관해 적힌 일지를 다시 꺼내어 살펴보았다.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서체가 무척 눈에 익었다.
“……휴고 마플.”
아셔의 아버지이자, 애슐리의 열렬한 추종자이며 스승이었던 남자.
“기댈 곳 없는 고아들을…… 실험에 이용한 건가.”
차가운 지하에 어린아이를 감금하고 학대하는 것도 모자라서, 실험에 이용했다는 건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중범죄였다.
리암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방에는 아이들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었다. 해바라기 장식이 달린 아이용 머리핀, 작은 장갑, 색 구슬, 삐뚤빼뚤 벽에 낙서하다 만 자국…….
‘슬로언의 땅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대체 이런 잔혹한 일이 얼마나 오랫동안 벌어진 것일까?
리암은 과거에 엘리엇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린아이의 신발 한 짝. 쉰내가 진동하고 상당히 더러워진 것이었어. 공작과의 연관성은 어디에도 없었지.」
“……아버지.”
리암은 신음하듯 부르며, 두 눈을 감았다.
* * *
문득 다프네의 두 눈이 떠졌다. 아직 흐릿한 시야로 작게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길이 보였다.
‘새벽에 장작을 더 넣었어야 했는데.’
실험 일지를 다 읽고 나서 잠시만 눈을 붙인다는 것이, 이렇게 앉은 채로 완전히 깊은 잠에 빠져 버린 모양이었다.
‘……애슐리는 미쳤어.’
어제 읽은 일지의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애슐리가 토마스로 연구하고 있던 것은 망각에 관한 연구였다.
여기에서는 어린 소년에게 주기적으로 약을 먹이고 대화를 반복하며, 그가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몇 달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약을 먹는 기간이 길어지며, 소년의 기억은 몇 개월에서 몇 년에 이르기까지 점점 사라져 갔고, 가장 최근 기록에서는 자신의 이름마저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짐승만도 못한…… 일을.’
분명 기억을 지우는 약이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될지도 모른다.
다프네만 해도 애슐리와의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니까.
하지만 어떤 대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린 소년에게 이런 잔인한 짓을 할 이유는 못 되었다.
다프네는 소년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이 미어졌다. 제발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할 텐데…….
‘아이는 깨어났을까?’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다프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머리 뒤가 무언가에 쿵 부딪혔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저 완전히 잠에서 깨어날 정도의 충격이 있었을 뿐.
다프네는 이제야 자신이 단단하면서도 탄력이 있는 것에 줄곧 푹 파묻혀 안겨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파…… 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사치스러운 물건은 이런 공간에 없을뿐더러.
“더 자도 괜찮은데.”
이렇게 말을 하는 기능도 없으니까.
“아…….”
다프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조금 더 위로 들어 보았다. 그러자 어느 각도에서도 굴욕을 맞지 못할 남자가 그녀의 머리 위에 있었다.
“잘 잤어?”
그는 아침에 어울리는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뒤로 푹 기댄 다프네의 무게를 받아 내느라 불편했을 텐데도.
“어…… 죄송합니다.”
“괜찮아, 좋아하니까.”
대체 뭘 좋아한다는 뜻일까.
이렇게 붙어 자는걸? 아니면…… 다프네를?
다프네는 그렇게 되묻고 싶은 것을 그만두었다.
“조금 더 분명히 말하자면, 붙어 자는 것은 물론 다프네 서튼도 좋아한다는 뜻이야. 물론 그중에서 경중을 따지자면 그대 쪽이 조금 더…… 대체 왜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거지?”
그는 다프네의 허리를 안고 있던 한쪽 팔을 풀어 그녀의 이마를 꾹 눌렀다.
“그, 그야…….”
그가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뭔가 갑작스럽기도 하고 또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것도 같았다.
“…….”
그런데도 다프네는 그런 사정을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다.
불합리하고 괴상하지만, 그런 감정에 대해 전해 들을 때마다 그녀가 안도를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어린이가 있는데 절 안고 계시잖아요.”
“어쩔 수 없었어. 그 어린이가 여기에 존재하는 담요란 담요는 죄다 차지했고 가여운 어른들은 이렇게 얇은 옷으로 추위를 버텨야 하니까.”
“아.”
다프네는 이제야 리암이 그녀를 뒤에서부터 밤새도록 꼭 안고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건 허들링이군요. 생존을 위한 황제펭귄의 지혜 말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야 하니까요, 라며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고개를 쭉 빼 들어 창문 쪽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제 허들링은 필요 없겠습니다.”
다프네는 리암의 품에서 벗어나 곧바로 창문으로 달려갔다.
“드디어 여기에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 * *
“난 반대하고 싶은데.”
리암과 다프네는 다시 옷을 껴입고서, 오두막을 나섰다.
“그대만 여기에 두고 가는 것은 내키지 않아.”
리암은 다프네의 한쪽 팔을 붙잡고서 다소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토마스를 위해 여기에 남겠다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강제로 기억이 지워지는 끔찍한 일을 겪은 아이입니다. 곁에 있어 주고 싶습니다. 혹시 깨어나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알아, 아는데…….”
리암은 그녀의 주장이 지극히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째 쉬이 걸음을 떼지 못했다.
“역시 내키지 않아.”
“그렇다면 빨리 돌아와 주시면 됩니다. 의사와 도와줄 사람들을 데리고서요.”
“물론 그렇게 할 거야. 그대를 잠시 안아 봐도 되나?”
그가 자연스럽게 건넨 질문에 다프네는 얼떨결에 ‘예?’라며 되물었는데, 그는 이를 허락으로 이해했던 모양이다.
다프네는 그의 도톰한 옷 위로 폭 끌려 들어갔다.
“금방 올 거야. 여기에서 사무엘 생각이라도 하고 있어. 그렇게 하면 기분이 좋아지겠지.”
“예.”
“그리고 어제는…….”
그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으로 변했다. 소중한 비밀 이야기를 전하는 듯.
“전부 말해 줘서 고마웠어, 정말로.”
“……아, 아뇨.”
그가 너무나도 진심이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기묘한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사실은 그에게 ‘전부’ 말한 것은 아니었다.
단 한 가지, 아직 그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다프네가 애슐리와 어떤 관계였는지.
몇 번인가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는데, 리암이 ‘좋아한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려주는 바람에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게…… 어쩔 수 없잖아.’
다프네는 그의 코트를 꾹 쥔 채로 리암이 과거에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느 미친놈이…… 형의 약혼녀를 좋아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