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87화
“……!”
“이제는 알겠어.”
그는 다프네의 팔을 당겨 강제로 끌어안았다. 그녀가 저항할 틈 따위는 없었다.
“네가 거슬리지 않는 이유.”
다프네 서튼.
귓가에 기대어 조용히 속삭인 목소리가 끔찍하여 그녀는 몸서리쳤다.
“내 것이었어.”
“……아니야.”
다프네는 황급히 그를 밀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몇 걸음도 채 물러서지 못하고 벽에 등이 부딪히고 말았다.
“아무래도 주인을 죽이는 일을 할 수는 없었을 테지.”
“아니야, 나, 난…….”
“그 하녀 아가씨 때문이라고 말할 생각이네. 그렇지?”
그는 사냥감을 쫓는 듯한 얼굴로 다시 거리를 불쑥 좁혀왔다.
“그건 핑계지, 사실은 그녀의 소망을 깨트릴 각오까지 했었잖아. 안 그래?”
“그건…….”
그는 다프네를 지그시 바라보며 속삭였다.
“주인님을 사랑하는 거야.”
“…….”
“그것도 네 아버지를 죽인 남자를…….”
다프네는 절망하여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가 물어뜯은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진한 통증 탓에 꼭 생각이 굳어 버린 것 같았다.
“괜찮아, 내가 전부 해결해 줄게.”
그는 다프네의 이마 위로 입술을 기울였다. 그리고 눈가와 뺨으로 천천히 지긋한 키스를 남겼다. 꼭 애정이 담긴 듯 따듯했다.
“서리병의 연구는 계속할 거야.”
그는 다프네의 턱을 조금 더 들어 올렸다.
“리암을 더 괴롭히지도 않을 거야. 네가…….”
그는 몸을 숙여 서로의 입술 끝이 스칠 듯한 거리까지 다가왔다.
“여기에서 내 것으로 지내기만 한다면.”
“…….”
“대답하지 않아도 돼.”
그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그렇게 하겠다고 알려 주는 거니까.”
그리고 그는 남은 거리를 좁혀 입술을 기울였다.
지옥 같은 상황을 외면하듯 눈을 질끈 감은 다프네의 시야로 사라진 시간이 떠올랐다. 사무엘이 그녀를 찾아왔던 날이었다.
「꼭 와야 해, 누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마…… 난…… 미쳐서 저 남자의 목을 비틀어 버릴지도 몰라.」
다프네는 그렇게 화를 내는 사무엘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이전에도 돌아온 지금까지도.
‘아…….’
그 순간, 작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서튼 군이 치안대원이 되기로 한 건,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예요.」
며칠 전에 브리가 병실에서 건넸던 이야기의 답을 알 것 같았다.
‘나였어.’
그렇기에 사무엘은 지난 생에서도 위험을 각오하고 다프네를 애슐리로부터 구해 내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다프네는 두려움으로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뜨거운 핏물이 손바닥의 주름을 타고 질척하게 흘러내렸다.
‘……이 남자에게 붙잡히면 안 돼.’
만약 그녀가 다시 지옥에 빠진다면, 상냥한 사무엘은 얼마든지 그녀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
지난 생에 그랬던 것처럼.
존경하는 마법사 조상께서 다시 시간을 돌려준다는 보장은 이제 어디에도 없으니, 도박할 수는 없었다.
‘도망가야 해. 이 남자를…… 뿌리쳐야 해!’
다프네는 그에게 붙잡힌 얼굴과 몸을 비틀었다.
“싫…… 윽!”
“괜찮아요.”
하지만 그는 벽으로 다프네를 터트릴 듯 짓누르며 다가왔다. 단단한 벽 사이에 끼인 듯한 느낌에 그녀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걸요, 서튼 양.”
다시 부드러워진 말투가 도리어 그녀의 공포를 부추겼다.
“놔!”
“날 제대로 봐야죠.”
그가 웃으며 건넨 말에 다프네는 입술을 깨물고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후회했다.
이런 즉각적인 반응은 그가 환장하도록 좋아하는 것 중 하나라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그 증거로 애슐리의 입가에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계속하여 팔과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어떻게 해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점점 힘만 빠지는 탓에 더욱 그를 여유롭게 만들어 줄 뿐이었다.
「약속할게, 다프네. 그대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순간 리암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새해를 축복한다며 이마에 키스하던 순간에 속삭였던 말이었다.
‘거짓말쟁이.’
다프네는 왠지 그에 대한 작은 원망이 들었다.
애초에 여기까지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리암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가 떠올랐다.
이런 순간에 왜 그런지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공작님.’
마음속으로 그를 부를 때는 입술 끝에 애슐리의 호흡이 불쾌할 정도로 진득하게 느껴졌다.
철컥.
그리고 마침, 총기의 잠금장치를 풀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거의 닿을 듯했던 애슐리의 입술도 멀어졌다. 다만 그녀를 짓누르는 힘은 그대로였다.
다프네는 시선만을 돌려 총기의 소리가 들려온 문가를 바라보았다.
“여전하시네요, 그 비열한 성질머리. 여러 사람 괴롭히지 마시고, 차라리 그냥 죽어 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그곳에는 놀랍게도 리암 슬로언이 서 있었다. 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애슐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건 안 돼, 리암.”
애슐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빙긋 웃으며 답했다.
“내 서튼 양이 슬퍼할 테니까.”
그는 다프네의 이름 앞에 소유를 주장하는 말을 덧붙였다. 이에 리암은 잠시 총을 내려 그들의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소유격을 함부로 쓰시기 전에.”
걸음을 멈춘 그는 애슐리의 손목을 쥐었다.
“상대의 계약 상황부터 아셔야 할 겁니다. 물론 형님께서 그런 상식을 아실 거라고 기대한 적은 없지만 말입니다.”
한껏 빈정거리는 말이 끝날 무렵, 비로소 그녀를 옥죄었던 애슐리의 손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리암이 흘긋 시선만을 돌리며 그녀에게 명령했다.
“나가.”
그러나 다프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서 나가.”
그녀가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리암은 애슐리의 관자놀이 옆으로 총구를 대며 차분히 명령을 반복했다.
“……아.”
다프네가 다시 바라본 리암의 얼굴에는 굳은 결심이 새겨져 있었다. 어젯밤부터 다프네 역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죽일 생각이 분명했다.
애슐리 슬로언을, 이 자리에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안…….”
“서튼!”
다프네가 그를 만류하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지,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것도 그녀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부르면서.
다프네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제 그가 단 한마디 ‘나가.’라는 말을 한다면 그녀는 꼼짝없이 이 방에서 떠나게 되리라.
그것이 리암과 다프네의 계약이니까.
다만 리암은 성급히 그녀를 강제하는 대신 약간의 시간을 주었다.
계약에 따른 명령이 아니라, 다프네가 자신의 의지로 물러나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못 갑니다.”
다프네는 그의 의지를 배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 주인을 홀로 두고 가지는 못합니다.”
그녀는 총기의 끝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어 이를 막았다. 꼭 애슐리를 보호하는 듯한 행동에 리암이 놀라며 물었다.
“무슨 짓이지?”
“죽이지 마세요.”
“이 개새끼를?”
다프네는 뭐라고 답할 말이 없었다. 이런 사람을 살려 달라고 부탁하는 제 꼴이 너무나도 우습기도 하여.
하지만 여전히 이 남자의 손에는 브리의 희망이 담겨 있었다. 다프네는 차마 그 사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암 슬로언을 살인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애슐리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니까.
“죽이지 마세요, 제발.”
그녀의 말에 애원까지 달라붙자, 리암의 얼굴이 더욱 분노로 굳어졌다.
아니, 깊은 상처를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
“……공작님.”
침묵을 견디지 못한 다프네가 간절히 부를 때가 되어서야, 그는 가까스로 총기를 천천히 내렸다.
“돌아간다.”
무뚝뚝한 말과 함께, 리암은 그대로 몸을 돌려 만찬실을 빠져나갔다.
다프네는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다행히 애슐리는 그녀의 팔을 붙잡지 않았다.
“서튼 양.”
대신 애처로움을 위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짓임이 분명한 감정이었으므로, 다프네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후회하게 될 거예요.”
다만 저주와도 같은 말에, 다프네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여기를 떠나지 않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겠죠.”
다프네는 그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서 바로 몸을 돌려 만찬실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무언가를 집어 던져 깨지는 소리가 났으나, 굳이 돌아보지는 않았다. 불쾌한 분노만을 만나게 될 뿐이니.
현관으로 나가자, 열린 문 너머로 리암이 짐 가방을 차에 싣는 것이 보였다.
미리 꺼내 두었던 다프네의 짐가방을 챙겨 준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다프네의 걸음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리암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왠지 모를 죄책감이 깊어진 탓이었다.
뒷자리에 가방을 넣은 리암은 문을 닫고서 다프네를 돌아보았다.
“……미처 몰랐네.”
작은 목소리로 그리 말한 리암이 저벅저벅 걸어 다프네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저 미친 새끼를 네가 그렇게…… 아낄 줄은.”
“공작님.”
“내 앞에서 함께 개새끼라며 신나게 이야기를 나눈 건 그냥 아부였던 모양이야.”
“공작님, 전!”
“변명하지 마!”
그는 다프네의 시선을 피하여 고개를 돌렸다. 크게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당장 돌아가서 저 새끼를 쏴 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
“어쩔 수 없어…… 넌 싫겠지만.”
리암은 다프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 서튼.”
명령조의 말에 ‘서튼’을 덧붙일 때, 그는 왠지 주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꼭…….
그가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다프네가 그를 잡을 리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다프네는 의아해하면서도 결국에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붙잡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하.”
다프네가 순순히 손을 잡자 리암은 괴로운 듯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가자.”
그는 힘없이 몸을 돌려 현관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