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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57)화 (57/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57화

* * *

며칠이 더 지나자 첫눈이 내렸다.

오전에 지방에서 올라온 서류 확인을 마친 리암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포근하게 내리는 눈송이는 어느새 클롯모어를 완벽히 하얗게 갈아입혔다.

예쁘네…….

그는 창가에 삐딱하게 기댄 채로 조금 더 내리는 눈을 감상했다.

그러다 문득 처음으로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었던 날이 떠올랐다. 서튼과 함께였다. 리처드 서튼 말이다.

「정말로 고요한 곳에서만 들을 수 있죠. 그러니 작은 도련님, 잠시만…… 눈물을 멈춰 보시겠습니까?」

다정한 그의 권유에 어렸던 리암은 입술을 깨물고서 울음을 참았다. 손에는 개 이빨 자국이 남은 작은 공을 쥔 채였다.

리암이 진정하지 못하는 어깨를 몇 번이나 들썩이며 훌쩍이는 동안, 리처드 서튼은 얼마든지 여유로운 모습으로 그를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하여, 리암이 평소의 호흡을 되찾았을 때.

사락사락.

귓가를 간지럽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미약하여,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리암은 이 작은 소리에 금방 매료되어, 다시 훌쩍일 수 없게 되었다.

“……음.”

과거의 생각에서 벗어난 리암은 바깥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가 좋아하는 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에.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귓가로 들려오는 것은 오르막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들의 비명뿐이었다.

그는 점점 소리가 높아지는 언덕 쪽을 바라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클롯모어의 아이들이 겨울 놀이를 즐기는 소리 역시 꽤 듣기 좋았다.

“공작님, 오후 우편이 왔습니다.”

곧 노크 소리와 함께 다프네 서튼이 그의 방으로 찾아왔다.

그의 충실한 수행원은 이제 더는 우편국 파견을 가지 않았다. 대신 그의 곁을 지키며 리암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대신해 주고 있었다.

이렇게 우편을 가져다주는 일은 물론.

“세금을 징수해 왔습니다.”

오르막을 차지한 비용으로 마을 아이들이 만들어 준 꼬마 눈사람을 운반해 오는 일까지.

그는 아이들이 낸 세금을 두 손으로 받아 창가에 놓았다. 책상에 두었다가는 몇 시간도 가지 못하고 녹아내리고 말 테니.

“잘 만들었군.”

“예, 아셔가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그건 볼만했겠는데.”

리암은 엄격한 아셔가 안경을 고쳐 쓰며 아이들에게 잔소리하는 모습을 쉽게 그릴 수 있었다.

공작저로 향하는 길을 점거했으니, 마땅히 비용을 내야 한다며 으스대었겠지.

그가 작게 미소 짓자, 다프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바라보았다.

“……왜?”

“아, 아닙니다.”

그녀는 시선을 떨어뜨리곤 분주한 손길로 근처에 놓인 빈 찻잔을 트롤리 위로 정리했다.

“말해 줬으면 좋겠군.”

리암이 조심스레 건넨 요청에, 충직한 다프네는 곧바로 응했다.

“……신경 쓰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주기.”

“신경 쓰고 있어.”

당연하다는 듯 건넨 답에 그녀는 살살 고개를 저었다.

“감정적으로 말입니다.”

“아.”

리암은 이제야 다프네가 그의 미소를 신기하게 바라본 이유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 미간에 힘을 주고 다녔던가.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일주기가 다가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슐리 슬로언…… 그러니까, 그의 형님으로부터 얼마 전 연락이 왔었다.

장례식 때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이번 일주기에는 하루나마 클롯모어로 돌아가겠노라고.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말에 알겠노라는 짧은 답을 보내는 것마저도 리암에게는 굴욕이었다.

하지만 슬로언 공작으로서, 가문의 일원이자 왕의 마법사가 방문하겠다는 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방문은 왕이 허가한 일일 테니.

‘8년 만에 처음…… 돌아오는 건가.’

자연스레 리암의 마음에는 짙은 어둠이 스며들었다. 미소를 지을 여유 따위도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약한 속사정을 타인에게 밝힐 수는 없었다.

그 상대가 마음을 나누어야 할 서튼이라고 해도.

“……그렇지. 아버지 생각이 간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어, 다시 겨울이니까.”

그는 죄송하게도 아버지를 거짓에 이용했다.

하지만 그리워하는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으니, 부디 이를 용서해 주기를 바랐다.

다행히 다프네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대는 어떻지? 솔직히 말하면, 생각이 많아 보이는 건 그대도 마찬가지인데.”

사무엘과의 재회로 잠시 웃었던 일을 제외하면, 다프네는 다시 멍하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가끔은 리암이 뒤에서 몰래 다가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어떤 생각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아, 저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저도…… 음,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어졌을 뿐입니다. 다시 겨울이니까요.”

변명일까. 리암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가 조금 전에 아버지를 앞세워 진짜 마음을 감추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두 분, 함께 돌아가셨으니까요.”

“그래, 서부 엠버혼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지.”

“마차…… 를 함께 타고서요.”

“웃기지도 않지.”

쇳덩이 자동차는 믿을 수 없고, 가족인 말은 믿을 수 있으시다던 아버지는 우습게도 그 말이 이끄는 허공으로 영영 떠났다.

“그보다 그대는 어떻게 일주기를 보낼 거지?”

빈 잔을 모두 정리한 다프네는 다시 리암을 마주 보았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척 바쁘지 않을까요?”

리암은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며칠간 작성된 손님 목록이 무척 길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던컨과 이야기해 봤는데.”

“집사님과요?”

“우리는 그대가 온전히 아버지를 그리워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 합의했어.”

“아뇨, 전…….”

다프네가 사양하려 들기에 리암은 이렇게 덧붙여 보았다.

“사무엘 서튼과 함께 말이야. 치안대 역시 부모님의 일주기를 챙길 수 있도록 대원들을 배려해 주지.”

“그렇…… 군요. 하지만 그날은 저택이 무척 바쁠 겁니다. 손님들의 성향에 따라 침구를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음식의 간도 달라지기 마련이니까요. 어디든 일손이 부족합니다.”

“알아, 하지만 여기에서 일하는 누구라도 부모님의 일주기에는 온전히 그리워하는 시간을 보장받아. 저택의 사정에 따라 정해진 권리를 멋대로 바꿀 수는 없는 법이야. 그러니까, 다프네.”

리암은 혀끝이 뻣뻣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 그가 하는 말에 거짓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꼭 변명하는 기분이 들다니…….

“그러니까, 그날은 사무엘과 만나서 저택 밖에서 지내도록 해.”

“저택 밖에서요?”

“그래, 여기에 얼씬거리다가 발견되면 여러 가지 일을 도맡게 되지 않겠어?”

다프네는 잠시 고민이 되는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조심스레 다시 질문했다.

“정말…… 그렇게 해도 됩니까?”

“그래.”

그녀는 왠지 안도하는 듯했다. 사무엘과 오붓하게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대신…… 이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네?”

“나도 시간을 내서 잠시 그대들을 만나러 갈 거야.”

“…….”

“입술 내밀지 마, 오리도 아니고.”

“정확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사무엘을 만나려고 이러시는 거 모를 줄 압니까?”

아무래도 다프네는 리암의 거짓말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모양이다.

그가 진심으로 사무엘을 노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니. 그야 뭐…… 그를 다소 깜찍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커다란 녀석이 소심하게 구는 게 귀엽지 않은가.

“물론 나는 사무엘을 안아 주고 위로해 줄 거야.”

다프네는 눈빛으로 ‘꺼지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리암은 그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정말로 좋아했다.

“하지만 내가 그날 그대들과 정말로 하고 싶은 건…….”

그는 다프네를 조금 더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서, 솔직한 이야기를 건넸다.

이건 절대로 농담으로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리처드 서튼…… 을 추억하는 일이지.”

* * *

다프네가 트롤리를 끌고 나간 후, 혼자 남은 리암은 내키지 않는 과거를 떠올렸다. 아마…… 줄곧 눈이 그치지 않기 때문이리라.

애슐리 슬로언이 후계자였던 시절.

가문의 어른들은 물론이고, 사용인들까지 다정한 ‘애슐리 도련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제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애슐리 슬로언은 모든 이의 관심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꽤 중요하게 여기는 듯했다.

아니, 아주 작은 관심 하나라도 리암이 가져가지 않을까 경계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저질렀던 일들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건 널 살리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야. 아버지께 네가 바보라는 사실을 들키면 안 돼.」

리암은 형님의 말을 진실이라 믿고, 언제나 어두운 구석에서 자신을 죽여야 했다.

그렇게 하여 악랄했던 소년, 애슐리 슬로언은 어린 남동생을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관심과 사랑으로부터 철저하게 격리했다.

……고작, 저택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이유로.

리암은 쓰게 웃으며 다시 새하얀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시절의 그가 정원을 달리고 있었다. 검은 얼룩의 사냥개, ‘대시’와 함께.

「보세요, 형님!」

세상에서 형을 가장 사랑하는 동생은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대시를 그에게 자랑했다.

리암이 처음부터 저택의 사냥개와 가깝게 지낸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굉장히 무서워하여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가을 사냥 대회에서 크게 상처를 입고 돌아온 대시와 마주쳤을 때, 리암은 이 가여운 개에게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제대로 된 치료는 의사와 사냥터지기가 맡았지만, 곁을 지켜 주고 물을 가져다주는 일은 리암도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저를 경계했는데, 지금은 저를 아주 좋아해요.」

그 증거로 리암은 작은 공을 하나 던졌다.

아이가 던져 그다지 멀리 날아가지도 않은 공을, 대시가 날렵하게 입으로 물어 와 리암의 앞으로 가져와 앉았다.

「정말 예쁘고 똑똑하죠?」

「그러…… 게.」

리암은 이토록 마음을 나누는 상대가 생긴 것이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당시의 애슐리가 이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약 그때, 애슐리의 모습을 제대로 봐 두었더라면, 아니 애초에 그에게 대시를 선보이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리암은 더 이상 생각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공을 말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떠들썩한 아이들의 함성 사이로 아주 짧은 고요가 있었고, 그 사이로…….

사락사락.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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