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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39)화 (39/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39화

맹약이 끝나는 날 밤.

다프네는 사무엘이 챙겨 준 봉투 하나만 안고서, 클롯모어로 향하는 기차에 탑승했다.

편안한 일등석 자리를 홀로 차지하고도, 그녀는 벽에 바짝 몸을 붙인 채 주변을 경계했다.

뒤늦게 그녀의 부재를 알아차린 애슐리가 그녀를 쫓아올 것 같다는 생각에.

그렇게 잔뜩 두려워한 것과 달리, 다프네는 무사히 클롯모어에 도착했다. 싱거울 만큼 간단해서 왠지 긴장했던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늦은 밤을 달린 열차에서 내리자, 승강장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사무엘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의 뒤로 커다란 시계가 하나 보였는데, 거의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정말 끝나는구나.’

500년이나 이어진 지긋지긋한 맹약이…….

그 속박이 끝난다면, 왠지 다프네도 자유로워질 것 같다는 희망이 솟았다.

‘무엇보다 이제부터는 사무엘이 함께잖아.’

절대로 그 불행한 시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다프네는 씩씩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암울했던 자신은 그 뒤로 남겨 놓고서.

「사무엘!」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사랑하는 동생을 불렀다.

동시에 시계도 정확히 12시를 가리켰다.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될 시간이 된 것이다.

시선이 마주친 사무엘이 싱긋 웃었다.

그때였다.

그의 이마 위로 붉은 문양이 떠오르더니, 커다란 불꽃이 순식간에 사무엘을 삼켰다.

* * *

다프네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사무엘.”

조용히 그 이름을 다시 불렀다.

곧 그녀의 귓가로 평화로운 새 소리가 대답처럼 들려왔다. 그 여상하고 낯선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리암의 침실이었다.

그녀의 손등 위로 맑은 햇살이 덮여 있었고, 몸을 감싼 이불이 기분 좋게 사각거렸다.

이 사랑스러운 광경은 조금 전에 보았던 끔찍한 사건이 그저 ‘꿈’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프네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느린 걸음으로 방 한가운데로 다가서자, 바닥에 남은 약간의 잿가루가 보였다.

다프네는 이를 손끝으로 쓸었다.

새카만 가루가 묻어났다.

“…….”

캐슬린일까 아니면 그녀가 지니고 있던 어떤 물질에서 떨어진 것일까.

어쨌든 이건 캐슬린 힐링엄이 여기에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비록…… 이제는 완전히 타 버려 그 유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아가씨.”

다프네는 가루가 묻은 손을 제 심장 근처로 이끌어 꼭 끌어안았다.

그 가여운 사람을 지켜 주고 싶었다. 정말로.

‘……미안해요.’

조금 더 빨리 알아차려야 했다. 그녀가 애슐리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걸.

단서는 얼마든지 있었는데…… 아니, 애슐리와의 기억을 제대로 더듬었다면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애슐리…… 슬로언.”

다프네는 그림자조차 두려워했던 남자의 이름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가 예전 약혼녀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꽤 몹쓸 짓을 했으리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아예…… 죽여 버렸을 줄은.’

다프네는 새삼 충격을 받는 자신이 신기했다.

아무리 잔혹한 남자라도 정말로 그렇게까지 할 리는 없다고 은연중에 믿어 왔던 걸까.

다프네는 새카만 가루가 번져 버린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캐슬린 힐링엄의 마지막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붉은 문양 그리고 순식간에 타오르는 화염.

그건 그녀가 본 사무엘의 마지막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가정이 있었다.

아니, 확신이었다.

‘……그렇구나.’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무엘은 맹약에 휘말린 재물이 아니었다. 서튼의 마법은 죄가 없었다.

‘그 남자가…….’

다프네는 어두운 기억 속에서 거대한 애슐리의 그림자를 떠올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온몸이 덜덜 떨렸지만, 결코 기억 속의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마침내 또렷해진 애슐리 슬로언.

‘당신이…….’

다프네는 점점 일그러지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공포뿐이었던 눈빛에는 어느새 깊은 증오만이 남아 있었다.

‘……내 동생을 죽인 거였어.’

* * *

공작가를 방문한 손님들은 연회와 사냥에서 큰 만족을 느끼고 돌아갔다.

그들은 공작을 도와 저택을 멋지게 운용하는 리디아 슬로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중에는 가끔 예의를 잊은 사람도 있는 터라, 리디아를 향해 모욕적인 감상을 건네기도 했다.

“공작님께서 혼인이라도 하시면 부인께서는 일이 없어져서 아주 쓸쓸해지시겠습니다.”

이에 앨러스테어가 발끈하여 고개를 반짝 들었지만, 리디아는 기품 있는 미소를 지으며 제 아들을 저지했다.

“예, 그러게 말입니다. 부디 그 정도로 유능한 공작 부인께서 오시기를 저 역시 간절하게 희망하고 있습니다.”

결국 본전도 찾지 못한 무례한 손님은 걸음을 서둘러 저택을 떠났다.

“……아무래도.”

이를 멀리에서 지켜보던 아셔가 다프네에게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넸다.

“제가 리디아 님에 대해 오해한 것 같습니다.”

“무슨 오해요?”

“부끄러운 내용이라 자세히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좋은 분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경계하고 있었죠.”

마침 배웅을 마친 리디아가 다프네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녀의 눈길에서는 오늘도 노골적인 경멸이 섞여 있었다.

“이 바쁜 시기에 근신까지 하셨다고요, 서튼 양.”

“……네.”

“공작님께 민폐가 따로 없군요.”

지극히 옳은 말에 다프네는 고개를 푹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공작님의 말씀을 따른다더니, 그 결과가 참 근사하기 짝이 없…….”

그녀의 이야기는 기묘한 곳에서 잠시 멈추어졌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다프네가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보니, 어느새 그녀의 앞을 견고하게 막아선 아셔의 등이 바로 보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리디아 님.”

다프네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를 계속 응시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셔 마플이 다프네의 편을 들어주다니……!

수도에서 영양 크림을 사다 준 효과가 여기에서 발휘되는 걸까?

다프네는 안경을 고쳐 쓰는 그가 조금은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피부도 한결 더 좋아진 것 같았고.

“왜냐하면.”

아셔는 이야기를 계속하며 그녀를 흘긋 돌아보았다.

다프네는 살짝 주먹을 쥐어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그에게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최소한의 몸짓이었다.

“이 여자는 멍청해서 공작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반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따르려야 그러지도 못하지요.”

“……뭐라고요?!”

다프네는 너무나도 놀라서 그만 주먹이 앞으로 나가 그의 복부에 명중시키고 말았다.

“억!”

아셔가 배를 감싸 쥐며 바닥을 굴렀고, 이제 다프네를 바라보는 리디아의 눈빛에는 더욱 깊은 경멸이 섞여 있었다.

“아무쪼록…… 당신이 하루빨리 저택에서 나가길 바랍니다.”

그녀는 이 저급한 자리에는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은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앨러스테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는 어머니를 졸졸 따라갔다.

* * *

“그대 덕분에 아셔가 돌아가신 어머님을 잠시 뵈었다고 하던데.”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은 리암이 쿡쿡거리며 농담을 건넸다.

“그건 과장이에요!”

다프네는 두 다리를 통통 구르며 잔뜩 울상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저택은 다프네의 무쇠 주먹에 대한 이야기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셔는 만나는 사람마다 다프네의 주먹 덕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뵈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남자 사용인들에게는 아예 배를 까서 보여 주었다고 한다.

그 말랑한 배 위로 대단한 자국이 남은 것도 아닐 테니, 아마 숯가루 같은 것을 발라서 멍 자국을 꾸며 대었을 것이다.

덕분에 다프네의 별명은 클롯모어의 무쇠 주먹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시내에 접어들어 차가 잠시 멈추어 섰을 때, 그는 고개를 돌려 뒷자리를 돌아보았다.

“지금 상황이 뭔가 굉장히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제게 운전대를 양보하지 않으신 건 공작님이십니다.”

“그야…….”

리암은 가죽 핸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것도 한껏 애정을 담아서.

“이 차는 내가 애정으로 완벽하게 길들인 상태라, 다른 사람 손타는 건 싫단 말이야.”

다프네는 기껏해야 철 덩어리가 그 애정을 느낄 수 있겠냐 싶었지만, 일단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건, 왜 그대가 뒷자리에 앉느냐는 이야기였어. 내 옆이 아니라.”

“그…….”

물론 다프네도 이렇게 감히 편안한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건 다소 뻔뻔할지도 모른다며 반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사, 사용인으로서 공경하는 주인과의 마땅한 거리를 준수하는 것뿐입니다.”

지난 며칠간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간격은 필요 이상으로 가까웠다.

그야, 슬로언과 서튼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몸까지 가까워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애초에 아무런 감정이 없는 신체 접촉을 해 봤자, 다프네와 리암이 얻을 이익은 전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그런 효율 떨어지는 일은 지양하고 싶었다.

“아셔와는 자전거도 함께 탔으면서.”

“그야 아셔는 사용인이지 않습니까.”

“내 영지에서 사람을 신분으로 차별하는 건 불법이야.”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들은 지금 성벽의 치안대로 가고 있었다.

이는 클롯모어에 세워진 몇 개의 ‘왕립 시설’ 중 하나로, 그들은 슬로언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힐링엄 양 실종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러 가시는 겁니까?”

다프네는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갑자기 치안대로 가는 사유가 궁금하기도 했고.

“응.”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처리됩니까?”

“일단 나는 왕의 신하로서, 일어난 일을 그대로 말할 수밖에.”

차량이 시내를 지나, 외곽 지역을 지나는 터라 리암은 조금 속도를 높였다.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그런 내용을 치안대가 믿어 줄까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덮어질 사건이니까.”

다프네는 그와 거리를 두기로 한 것도 잊고 운전석 앞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덮다니, 어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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