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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26)화 (26/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26화

하지만 한 주가 흘러, 드디어 마지막 로미오를 만나는 날이 되었을 때.

다프네는 그날의 자신을 질책했다. 역시 왜 토라졌는지 이유 정도는 물어볼 것을.

그랬다면…….

“짐을 다 싣고 난 후에는 팝콘을 사 오도록 해.”

다프네는 트렁크 세 개를 동시에 든 채로 리암을 삐죽 노려보았다.

그가 오늘 갑자기 클롯모어로 돌아가자고 하여, 그녀는 마지막 로미오를 만날 수 없는 참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너무하십니다, 진짜.”

괴로워하는 그녀와는 달리 리암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게 그렇게 고통스러운가?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본 공연인데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대체 왜 갑자기 돌아가는 겁니까?!”

“그야,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주도 충실한 유흥 일정이…… 아니 사교 일정이 있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클롯모어에 손님이 왔으니까.”

몹시 신이 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다프네의 마음에서 한 가지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시선이 굉장하군. 설마 날 의심하는 건가.”

다프네는 차마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슬로언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수행원의 유일한 즐거움을 빼앗기 위해서, 굳이 오늘 이동한다든가…… 뭐, 그런?”

“아닙니까?”

“그야, 아주 영향이 없다고는…….”

그리 이야기하던 리암은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를 멈추었다.

승강장으로 다가오는 한 사내 때문이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하얀 로브를 입은 마법사.

그 남자가 지나가는 길마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역장은 부리나케 달려 나와 경례까지 올려붙였다.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이에 응할 때, 후드로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잠시 엿보였다.

“……아니구나.”

아는 사람이 아니다, 라는 안도감에 리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무척 긴장했었던 모양이다. 하얀 로브의 마법사 중에는 그가 무척 불편해하는 존재도 있었으니.

그 마법사는 어느새 그들이 서 있는 곳과 무척 가까운 곳으로 다가왔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과 모두의 존경을 받는 마법사이니 일등석을 이용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때였다.

불안으로 꽉 조인 듯한 호흡 소리가 들려온 것은.

리암은 다프네를 돌아보았다.

“다프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초점을 잃은 두 눈동자가 흐릿했다.

“다프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에, 그는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흐, 흐…….”

하얗게 질려 버린 입술에서는 울음도 비명도 아닌 소리가 흘러나왔다. 흡사 지독한 공포에 짓눌린 듯한…….

“……다프네.”

작게 부르는 말에도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리암의 팔을 아프도록 붙잡았다. 꼭 그를 놓으면 여기에서 떨어져 버릴 것처럼, 간절하게.

‘대체…….’

그는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했지만, 감각적으로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어떤 지독한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는 것.

그도 어린 시절에는 줄곧 그래 왔으니…….

리암은 다프네를 꼭 안아 주었다.

“……이제.”

그는 고민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끝없는 공포가 밀려올 때마다 거울 속 자신에게 되뇌던 말을 그녀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그건 다프네의 아버지인 ‘리처드 서튼’이 그에게 알려 준 말이기도 했다.

“없어.”

“…….”

“널 괴롭히는 건 어디에도 없어, 다프네.”

이후로 같은 말을 몇 번 더 차분히 들려주자, 곧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없…….”

고작 그것뿐인 말에도, 그는 “그래.”라며 그녀를 격려했다. 다프네는 이제야 조금씩 떨림이 잦아드는 듯했다.

리암은 안도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잠시 그를 멀뚱히 올려다보던 다프네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리암은 같은 열차에 탑승한 어느 의사의 도움을 받았다. 젊은 의사는 다프네를 진찰하고서 빙긋 미소 지었다.

“딱히 문제 되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리암은 자신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그리 말했지만, 곧 제 무릎 위에 다프네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목소리를 죽였다.

“쓰러졌는데…….”

그는 걱정스레 이야기를 건네며 제 입술을 깨물었다. 리암 역시 오래전에는 무언가를 두려워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신까지 잃은 적은 없었다.

다프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의사가 천천히 입을 뗐다.

“아가씨께서 깨어나시면…… 믿을 만한 의사와 오늘 일에 대해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어 볼 필요성은 있어 보입니다.”

“……그래.”

“지금은 억지로 깨우지 마시고, 이렇게 푹 쉴 수 있도록 두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알았네, 감사를 표하지.”

리암의 진심 어린 인사에, 의사는 고개 숙여 답한 후 명함을 남기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후.”

리암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승강장에서 다프네가 쓰러졌을 때, 리암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아 안았다. 완전히 늘어진 몸은 그에게 기댄 후에도 자꾸만 바닥으로 흘러내리려고만 했다.

그는 다프네를 고쳐 안고서 급한 대로 열차에 탑승했다. 일등석의 의자는 그녀를 눕히기에 괜찮은 자리라고 생각했으니까.

당시에는 어떻게든 편안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은 안타깝게도 열차가 출발한 이후의 일이었다.

리암은 벨을 눌러 직원을 호출하고, 승객 중에 의사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동승한 의사가 있어 간단히 진찰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정말.”

그는 시선을 내려 잠이 든 다프네를 내려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오늘따라 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따듯하네.’

그는 말랑말랑한 뺨을 손끝으로 살살 쓸어 냈다. 열차가 출발할 때만 해도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워서 걱정했었다.

‘무슨…… 일일까.’

고작해야 열여덟의 아가씨다.

그리고 수도에서 그가 알아본바, 다프네 서튼은 누구보다도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누나를 사랑하는 동생과 따듯한 가정부 그리고 가끔 만나는 아버지와도 사랑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예쁜 과거가 아닌가.

하지만 조금 전의 그녀는 꼭…….

헤어 나올 수 없는 공포를 마주한 듯한 모습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그런 경험을 했을까.

‘공포…… 라.’

리암은 다프네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그 단어에 담긴 제 오랜 기억을 떠올렸다.

* * *

어린 시절의 리암은 지금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남들 앞에 나서기보다는 커튼 뒤에 숨어야 겨우 숨통이 트이곤 했다.

만약 당시의 그가 ‘후계자’였다면, 이는 공작가의 큰 숙제가 되었을 테지만, 다행히 그에게는 모든 의무를 이어받을 형님이 있었다.

애슐리 슬로언.

옅은 금발을 지닌 아름다운 소년은 탄생 이후로 줄곧 ‘최고의 공작 후계자’라며 사람들의 찬사를 들었다.

리암은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더 많은 형님을 언제나 존경해 왔다.

‘언젠가는 꼭 형님처럼 될 거야.’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하지만 리암은 곧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어떻게 해도 형님의 그림자조차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리암 슬로언은 너무나도 멍청하고 한심한 인물이라, 어떤 교육을 받아도 갱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된 것에는 형님인 애슐리의 도움이 있었다.

애슐리는 동생이 가정교사를 들일 나이가 되자, 자신이 직접 가르치는 일을 해 보겠다고 나섰다.

리암은 사랑하는 형님이 자신에게 그렇게 시간을 쏟아 준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그래서 항상 수업에 열심히 임하곤 했는데…….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구나, 리암.」

「죄, 죄송해요.」

「아니야, 네 수준을 파악하지 못한 내가 잘못했지. 내일부터는 조금 더 간단한 것을 배워 보자. 네 낮은 수준에 맞추어서.」

기대했던 형님과의 수업은 리암의 멍청함을 하나씩 발견해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네게 맞는 교사를 따로 구해야겠어. 나를 가르친 휴고 마플이라든가.」

휴고 마플은 애슐리의 가정교사를 담당했었는데, 그는 소심한 리암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편이었다. 도무지 공작 가문의 아이답지 않다면서. 자연스레 리암은 줄곧 그를 두려워해 왔다.

「그는 훌륭한 교사지.」

「제,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하지만 벌써 두 번이나 설명했는데, 넌 이해하지 못했잖니.」

「절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하지만 아버지께 네가 잘하고 있다며 매번 거짓말을 하는 것도…….」

리암은 그에게 너무나도 미안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슬로언 공작은 아들들에게 학문만을 요구하는 가혹한 부모는 아니었다.

도리어 ‘건강하게 쑥쑥 자라는 게 최고란다.’라는 말을 해 주는 다정한 아버지였다.

다만 아무리 따듯한 부모라도, 함께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면 서로 알지 못하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리암은 자신이 멍청하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형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수업을 계속해 달라고 하는 것은 그 생각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리암을 위해 거짓말을 감수해 주는 형님과는 달리, 냉정한 가정교사들은 리암의 멍청함을 아버지에게 낱낱이 보고해 버릴 테니까.

「제발요. 아버지께서 제가 멍청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시면…… 실망하실 테고…….」

「하긴…… 목숨이 위험할지도.」

「……네, 네?」

「역대 공작가에 멍청이나 바보가 있다는 말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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