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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20)화 (20/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20화

다프네는 외출 준비를 마치고, 리암의 침실 앞에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내가…… 놀러 가도 되나?’

그녀가 주저하는 사이 그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삐딱한 자세로 나타난 리암은 멋지게 빗어 넘겼던 머리를 헝클어트린 것도 모자라서, 셔츠 단추도 세 개쯤 풀어 둔 후였다.

다프네는 인간의 본능에 따라 자꾸 그의 가슴으로 눈길이 향하려는 것을 얼른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저건 들여다봐도 별 이득이 없는 가슴이었다. 앞으로 지긋지긋하게 마주할 것이 분명하니까.

다프네는 애써 고개를 바짝 들고 일단 그를 향해 헤실헤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그게 역효과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이 구겨졌으니까.

“……친구를 만나러 가는군.”

“가, 가지 말까요?”

“아니.”

그는 지옥 불을 관장하는 악마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즐겁게 다녀오도록 해, 친구와.”

으르릉거리는 듯한 말투와 표정을 보면 어째 친구와 쇼핑을 즐기고 오라는 것이 아니라, 목이라도 따 오라는 듯이 들렸다.

“다, 다녀오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그 멍멍이 자식의 발등을 콱 밟아 주는 것 말고는 없어.”

아무래도 이제 너구리 취급하는 것은 완전히 그만둔 모양이다. 개나 너구리나 모두 귀엽기는 마찬가지라, 둘 다 칭찬으로 들리긴 하지만 말이다.

“노력해 보죠.”

다프네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노력을 맹세하고는 얼른 저택을 나섰다.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 왕의 발등을 밟으라니.’

다프네는 엘과 약속했던 수도의 분수대로 가는 내내 리암의 심술궂은 말을 생각했다.

‘그건 사형에 처할 중죄잖아.’

아무리 다프네가 슬로언에 충성하는 서튼이라고 해도 그런 부탁은 못 들어준다.

절대로.

그리 생각하며 분수대 근처에서 종종거리고 있을 때.

“아야!”

그녀의 바로 뒤에서 한 남성의 앓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언제 다가왔는지 엘이 그녀의 뒤에서 제 발등을 감싼 채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엘!”

다프네는 얼른 그 앞에 마주 앉았다. 그는 연신 손으로 제 신발 위를 꾹꾹 문지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프네가 뒷걸음치다가 제대로 그를 밟은 모양이었다.

“미안해, 괜찮아? 내 뒤에 있을 줄은 몰라서…….”

“으, 응. 하나도 안 아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그의 입술 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굉장한 고통을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프네는 괜찮아?”

“지금 날 걱정할 때야?”

“그야…… 깜짝 놀란 것 같아서.”

엘이 눈치를 살피며 건넨 이야기에 다프네는 왠지 웃고 말았다.

‘정말 사무엘이랑 비슷하다니까.’

아무래도 사무엘이라는 이름에는 상냥한 마음이 깃드는 것이 틀림없었다. 동생 사무엘도 친구 사무엘도 언제나 다프네를 염려해 주는 것을 보면.

“난 괜찮아. 그보다 일어날 수 있겠어?”

다프네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잡아 줄게.”

“어, 나 손 더러운데…….”

그는 조금 전까지 구두를 만지작거렸던 손을 연신 바짓단에 열심히 문지르고서야 손을 맞잡았다.

“왠지 부끄럽다.”

그가 뺨을 붉히며 그리 이야기하는 동안 다프네는 나름대로 괴력을 발휘하여 그를 우뚝 일으켜 주었다.

위로 쑥 올라가는 엘을 바라보고 있으니, 다프네는 그가 엄청 자랐다는 사실이 재차 실감이 났다.

이렇게 마주 서 있으면 바짝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라니.

엘은 여전히 다프네의 손을 쥔 채로 고개를 꾸벅였다.

“고마워.”

“내가 잘못한 건데 뭐.”

이제 슬슬 손을 놓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는 다프네와 달리 그는 어째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프네 손, 여전히 차갑다.”

“어, 수족냉증이라.”

“손 시리지 않아? 장갑은?”

“정신없이 나오다가 잊어버렸어. 정말이지, 사용인 실격이라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는 얼른 주머니를 뒤지더니 얇은 장갑 하나를 찾아냈다.

“이거라도 끼울래?”

“엘이 끼우려고 가져온 거 아니야?”

“응, 그렇긴 한데. 나도 신사의 도리를 하고 싶어서 그래.”

“맙소사, 사무엘 라모니아가 신사의 도리를 말하다니!”

다프네가 놀리듯 외치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내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이런 신사의 도리를 다하는 건 다프네 쪽이었다.

괴롭힘을 일삼는 학생들 사이에서 그를 구해 주지 않았나.

“노, 놀리지 마. 나도 이제 가문을 이끄는 신사란 말이야.”

그는 귀 끝까지 빨개진 채로 얼른 다프네에게 장갑을 건넸다.

“고마워, 근데 대체 언제 가문을 잇게 된 거야?”

“졸업하고 나서 바로…….”

그건 그의 아버지가 그새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인 듯하여, 다프네는 얼른 웃음기를 지웠다.

“어…… 난 네가 슬픈 일을 겪은 줄은…….”

“아, 아냐! 부모님은 예전에 돌아가셨어. 내가 공부하는 동안은 조모님께서 가문을 이끌어 주셨거든…….”

그건 꼭 왕실과 비슷한 이야기였다.

뭐, 세금 한 푼 안 내는 애송이에게 가문을 온전히 맡기지 못하는 건 어디나 똑같을 테니까.

“그보다…… 네게 슬픈 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엘은 다프네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걱정스레 물었다.

“뭐, 나는 괜찮아.”

다프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까지고 분수대에 서서 수다만 떨 수는 없을 테니까.

“괜찮다니.”

엘이 곧바로 그녀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아?”

다프네는 그를 향해 살짝 눈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물었고, 엘은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말하면 다프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은 지난번 역사에서 만났을 때, 조금 놀랐어.”

“놀랐다고? 왜?”

“변한 것 같아서…… 조금.”

“변하다니? 어디가?”

다프네는 마침 지나가는 상점가에 비치는 제 모습을 흘긋 바라보았다.

튼튼하고 번듯했다.

“뭔가…… 무리하는 것처럼 보였어. 잘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그는 잠시 우물거렸다.

“꼭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사람처럼…… 설명을 잘 못하겠다. 혹시 내가 착각했다면 미안해.”

다프네는 잠시 고민했지만, 곧 그가 큰 착각을 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프네는 살기 위해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죽음에 도달하기 위해 달릴 뿐.

“아냐, 착각할 수도 있지. 그 정도로 많은 짐을 옮기는 건 죽을 만큼 힘든 일이거든.”

가볍게 답할 즈음, 마침 잡화 가게 앞에 도착했기 때문에 다프네는 얼른 가게 문을 열었다.

다행히 엘은 그녀의 변화에 대해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찾은 ‘사냥꾼의 요람’은 엄밀히 말해 사냥용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다프네는 이곳의 방한용품을 숭배했다.

‘사무엘은 몸이 약하니까.’

찬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감기에 걸려서 고생하는 아이가 지금쯤 목장에서 앓아누운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다.

‘편지로는 늘 괜찮다고만 하지만…….’

양들이 풀을 먹는 언덕은 바람이 매섭고, 추위도 한층 빠르게 오는 곳이다.

‘사무엘이 감기라도 들면 곤란해.’

이 세상에는 아픈 노동자만큼 서러운 존재도 없는 법이다.

푹 쉴 수 있다면 모를까, 항시 일이 있는 목장에서는 마음 편히 눕는 것조차 어려웠다.

‘가장 비싼 장갑을 사 줘야지.’

손이 따듯하면, 사무엘은 감기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장갑을 사고 보니, 바로 옆에 놓인 머플러 가 눈에 들었다.

‘머플러도 사자.’

그렇게 얼른 장바구니에 넣고 나니, 옵션으로 딸린 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귀까지 덮는 모자로, 따듯해 보이는 건 물론이고 귀엽기까지 했다.

‘어쩔 수 없지. 세트 상품은 처음부터 한 몸이니까.’

그러자 사장님께서 ‘이 양말을 사면, 같은 것을 하나 더 주마.’라고 말씀하셨다.

하, 1+1이란 건가. 탁월한 상술에 그녀는 전율했다. 게다가 양말은 매일 빨아 신으니까, 1+1일 때 쟁여 두는 것이 현명한 소비였다.

다프네는 양말을 3켤레 샀다.

그랬더니 사장님께서 ‘일주일은 7일이니, 4켤레를 서비스로 주마. 대신 다른 손님들에게는 비밀이다.’라며 잔뜩 선심을 써 주셨다.

다프네는 안심했다. 이로써 사무엘의 발은 일주일 내내 따듯하겠지.

신이 나서 장바구니를 채워 가던 다프네는 자신이 무언가를 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뭘까.

“저, 저기 다프네. 내가 뭘…… 골라 주면 되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엘과 상의하며 천천히 고르려고 했는데.

‘사무엘을 따듯하게 해 준다고 생각하니 왠지 눈이 뒤집혀서, 그만.’

함께 와 준 친구의 존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장갑은 이 치수가 맞아?”

그때, 그녀의 장바구니를 살피던 사장님이 질문을 건넸다.

“아, 네! 동생에게 보낼 거라서요.”

“서튼 군이 와서 직접 껴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말이야.”

“아마 거의 맞을 거예요, 얼마 전에 봤을 때 제 손보다 한마디 정도 더 컸거든요.”

다프네는 제 오른손을 쫙 펼치며 설명하고는 살짝 잘난 척도 곁들였다.

“손이 크면, 나중에 키도 엄청 크기 마련이죠.”

예전 생애에서 다프네는 성인이 된 사무엘의 키가 너무나도 커서 무척 감격했었다.

어렸을 때부터 손과 발이 그리 크더니……!

“한 마디 더 크다고 해도 말이야, 그렇게 부정확하면…….”

사장님이 어째 미심쩍다는 듯 이야기를 건넬 때,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엘이 불쑥 제 손을 내밀었다.

“이 정도라는 거지?”

“응?”

다프네가 되묻자, 그는 웃으며 그들의 손을 완전히 맞대었다.

이렇게 놓고 보니, 마침 그의 손이 다프네보다 한 마디 정도 더 길었다. 애초에 손바닥의 넓이부터 다르긴 했지만.

“다프네보다 내가 한 마디 정도 더 크잖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다프네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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