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3)화 (13/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3화

“가문 회의는 생각보다 자주 열렸고, 저는 그때마다 회의장에서 어르신들의 시중을 들었어요.”

이건 그녀의 정보가 꽤 신빙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프네는 더욱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앨러스테어 님께 사죄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것보다는 슬로언 부인께 잘 말씀드리는 편이 나을 거예요.”

“앨러스테어 님의 모친이신 리디아 슬로언 님 말이에요?”

다프네는 손님 목록에서 보았던 이름을 떠올리며 물었고, 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회의에서 실질적으로 앨러스테어 님이 제시할 의견을 결정하시는 건 그분이니까요.”

그런가?

다프네는 언뜻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고집쟁이 다프네는 많은 것을 혼자서 결정하고 싶어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아버지나 페이지 부인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했었다.

그들은 이를 보호자의 의무라고 불렀다.

덕분에 다프네는 한겨울에 얇은 옷만 입고 거리를 다니는 불상사를 겪지 않았다. 지금이야 뼈가 시리다며 질겁할 일이지만, 어릴 때는 왠지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긴 옷을 고르는 사소한 일에도 어른들이 제시한 의견을 따르는 나이인데…….’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가문 회의에 의견을 내는 일이니 어른의 말을 따르지 않을까?

“그러니까 다프네, 지금은 앨러스테어 님께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중에 간식을 몰래 챙겨 드리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좋아하실 테니까요. 아직 어린애시잖아요.”

“정말 그럴까요?”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다른 원로들도 리디아 님의 의견을 훨씬 더 존중하는걸요.”

그건 꼭 ‘어린애의 말에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라는 투로 들렸다.

하긴 이런 거대한 가문을 이끄는 중요한 회의의 수장이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음…….”

“바쁘지 않다면 만찬 전에 리디아 님의 방에 시중을 갈 기회를 만들어 봐요. 공정하신 분이니 정중히 말씀드리면 귀를 기울여 주실 거예요.”

다프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브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리디아 님은 언제 저택에 도착하셨어요?”

“앨러스테어 님이 오시고 잠시 후에 오셨어요. 어쨌든 다프네가 그분을 뵐 수 있도록 다른 하녀들에게 말해 줄까요?”

고마운 권유였으나, 다프네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일단 지금은…….”

그녀는 씩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앨러스테어 님께 용서받는 일에 신경 쓰고 싶어요.”

“아이참, 회의가 내일인데 그럴 시간이 어디에 있어요? 어차피 그분은 회의에서 의견을 내지도 않으실 텐데.”

“그분은 누구보다도 짙은 슬로언의 피를 지니셨잖아요. 저는 서튼의 자손으로서 앨러스테어 슬로언 님을…… 회의의 누구보다도 중요하게 여기고 싶어요.”

다프네가 그리 말할 때.

서재 안쪽에서 툭, 하고 책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그쪽을 바라보니, 서가 사이로 작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왠지 그 실루엣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너어!”

곧 분노 어린 앨러스테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와 브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얼른 허리를 반으로 접어 숙였다.

‘맙소사, 어떻게 하지?’

이렇게 뒷말을 하다가 걸렸으니, 공작의 수행원은커녕 당장 모가지가 잘려서 성에 걸린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다프네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제 옷을 만지작거리며 앨러스테어의 불호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분명히 조금 전과 같이 「이런 치욕은 처음이다.」라며 다프네를 죽일 듯이 노려보겠지.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다프네가 기대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설마…… 너무 많이 화가 나서 할 말을 잃은 건가?

의아해진 다프네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보았다.

여전히 서가 사이에 선 소년은 얼굴이 당근보다도 더 붉어져 있었다.

아마 몹시 화가 나 있기 때문이리라.

“……!”

순간 다프네와 눈이 마주치자, 이젠 소년의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어, 엄청 화가 났나 봐……!’

다프네가 그리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숙일 때.

“나, 난! 너 같은 건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거다!”

앨러스테어는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외치고는 서가 밖으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다프네는 절망적인 얼굴로 그가 사라진 문을 지켜보았다.

“……부끄러워하시는 것 같았죠?”

함께 사죄하던 브리가 그렇게 물었을 때, 다프네는 그럴 리가 있느냐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부끄러워하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분노를 참아 내는 얼굴이었다.

비슷한 표정을 아셔 마플이 짓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으니 확신할 수 있었다.

앨러스테어는 다프네에게 엄청 엄청 화가 난 것이 틀림없었다.

* * *

다프네는 앨러스테어가 떨어뜨린 책을 챙겨 들었다. ‘슬로언의 역사’라는 수기로 무척 오래된 것이다.

그녀는 가볍게 책을 훑어보고는 이를 챙겨 앨러스테어의 방으로 찾아갔다.

노크하자 누구냐는 날카로운 질문이 돌아왔다.

“다프네 서튼입니다.”

이렇게만 답하면 ‘돌아가!’라는 싸늘한 답이 돌아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녀는 얼른 재치를 발휘하여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떨어뜨리신 책을 가져왔습니다.”

“……피, 필요 없어.”

그럴 줄 알고 또 준비한 것이 있지. 다프네는 품에서 얇은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쿠키도 있습니다.”

그녀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이건 그냥 쿠키가 아니었다.

“초콜릿과 마시멜로가 함께 박혀 있지요. 먹으면 살이 찔 것이 분명한 맛이 납니다. 그건 정말로 끝내준다는 뜻이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분께만 드리는 겁니다.”

이건 어린 시절, 토라진 사무엘을 바깥으로 끌어내는 마법 같은 대사였다. 물론 오늘도 그 마법은 충분히 제힘을 발휘해 주었다.

문이 열렸다.

앨러스테어는 침대에 엎드려 있었는지, 머리와 옷이 엉망이었다.

소년은 여전히 분노로 빨개진 얼굴을 한 채, 다프네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쿠키…… 줘.”

“물론이죠. 많이 드세요.”

다프네는 포장된 쿠키를 그의 손에 톡 올려놓고, 품에서 작은 빗을 하나 꺼내었다.

공작의 수행원이 될 날을 꿈꾸며 언제나 품고 다니던 것이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앨러스테어 님.”

다프네는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삭삭 빗고, 옷깃과 푸른 보석 펜던트도 바르게 해 주었다.

그를 완벽히 단장하고 나서야 다프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사하세요.”

“흥.”

이에 소년은 삐죽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그렇게 말하면 누가…… 좋아할 줄 알고?”

“좋아하시겠죠. 근사한 성인 남자가 되실 거잖아요? 가령…….”

다프네는 앨러스테어에게 예시로 제시할 근사한 성인 남자가 누가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그녀의 아버지? 물론 근사하시지만, 귀족 소년에게 제시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상대일지도 모른다.

마땅한 상대를 떠올리지 못한 다프네가 주저하기 때문인지, 앨러스테어가 자신이 떠올린 대상을 얼른 이야기했다.

“……공작님처럼?”

“네?”

다프네는 기겁하며 되물었다.

리암 슬로언이 근사한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다프네는 그와 싱싱한 무가 나란히 있다면, 싱싱한 무 쪽에 조금 더 가슴이 뛸 것이다.

무는 생으로 익혀서도 맛있지만, 리암 슬로언은 생으로도 익혀서도 도무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하시면 안 돼요, 그보다 더 멋진 남자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넌 서튼이면서 슬로언을 사랑할 줄 모르는 거야?”

“사용인이 주인을 사랑하면 안 됩니다.”

다프네는 엄격한 투로 리암과 자신 사이에 딱 선을 그었다. 그것이 바로 프로 수행원의 올바른 자세라는 듯.

하지만 앨러스테어는 이에 찬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다시 표정이 구겨졌다.

“못 써먹겠군.”

“……네?”

“서튼은 단순한 사용인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는 건가.”

그리 말한 소년은 포장된 쿠키를 다프네의 손에 다시 돌려주었다.

“너 같은 걸 잠시라도 진정한 서튼이라고 생각한 내가 멍청이지!”

다프네는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진정한 서튼이라고 생각했다고? 언제? 조금 전에 서재에서? 설마 뒷말을 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인 건가?

“대체 서튼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다프네가 발끈해서 외치자, 앨러스테어도 두 주먹을 꼭 쥐고 외쳤다.

“그게 무엇이든 넌 절대로 서튼의 후계자가 될 수 없어! 절대로! 나, 앨러스테어 슬로언이 모든 영향력을 발휘해서 널 그만두게 할 거야……!”

“무슨 일이죠?”

그때,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는 목소리에 깃든 우아한 억양에서 상대의 신분을 가늠하고는, 깊이 몸을 숙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다프네 서튼입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조금 불편해하는 답에, 다프네는 더욱 깊이 허리를 숙일 뿐이었다. 여인의 따가운 시선이 정수리를 찌르는 것 같았다.

“앨러스테어.”

한참 만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어머…… 니.”

“복도에서 서튼과 언쟁을 하다니, 슬로언답지 못한 일이군요.”

“……죄송합니다.”

앨러스테어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서, 사죄하는 말을 건넬 때는 거의 속삭이는 것에 가까웠다.

다프네는 새삼 조금 전에 서재에서 들었던 브리의 이야기를 실감했다.

회의에서 의견을 내는 것은 앨러스테어가 아니라 어머니인 리디아라는 사실 말이다.

“슬로언은 명령하고, 서튼은 이행한다. 이 간단한 규칙은 근 오백 년간 소중히 지켜져 왔습니다.”

다프네의 시야로 리디아의 붉은 구두 끝자락이 보였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모양이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신이 공작님을 모시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은 확실하겠군요.”

“……!”

“슬로언 공작님께 필요한 것은 단순한 사용인입니다. 고분고분한 손과 발은 감히 제 의견을 품지 않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