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2화
* * *
이건 꿈이 아니다.
그걸 깨달은 건 응접실에서 나오고 세 시간이나 더 지나서였다.
‘꿈이 아니라면…… 이건 대체…….’
복잡한 머릿속을 헤집던 다프네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지금이 어떤 순간이든 그것이 무엇이 중요할까.
‘사무엘을 죽게 할 수는 없어! 절대로, 그 아이가 죽는 그런…… 끔찍한 시간으로는…….’
설령 그 결과 그녀가 맹약과 함께 불타올라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사무엘만큼은 지켜야 해.’
시간이 없었다.
잠시 후면 공작가에 속한 사람들이 이 집에 들이닥치게 될 테고, 사무엘은 그대로 공작령까지 끌려가 꼼짝없이 새로운 젊은 공작의 수행원으로 지내게 되리라.
“사무엘을 멀리 보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사무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공작령에서 거행되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할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아이이니 아무리 설득해도 이를 그만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사무엘이 공작령에 가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어.’
강제로 사무엘을 막았다가는 그 아이가 스스로 공작가로 뛰어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장례식이 끝날 때 즈음 재빨리 다른 곳으로 기차를 태워 보내는 거야.’
공작령에 남은 ‘서튼’이 다프네뿐이라면, 공작가도 그녀를 수행원으로 삼을 수밖에 없으리라.
다프네가 확실하게 공작의 수행원 역할을 해낸다면 그들은 굳이 사무엘을 추적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으리라.
남은 5년의 맹약이 지켜지면 그만일 테니까.
* * *
“정말로 우리끼리 이동해도 괜찮은 거야? 우리는 공작가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잖아.”
공작령인 ‘클롯모어’로 향하는 완행열차의 3등 석에서 사무엘이 걱정스레 질문을 건넸다.
그가 그런 걱정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충성의 맹약이 남은 기간은 고작 5년.
남매의 아버지는 자신이 그 의무의 마지막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들과 딸이 가능한 한 공작가와는 관계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곤 했다.
이제 더는 슬로언 공작가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오죽하면 사무엘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야 처음으로 ‘공작님’의 얼굴을 뵈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지난 생의 다프네는 그의 얼굴조차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이따금 신문에 그의 얼굴이 실리긴 했지만, 흑백의 저화질로 인쇄되어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의 형님…… 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봤지만. 음, 뭐 형제니까 닮았으려나.’
다프네는 잔뜩 굳은 얼굴에 강제로 미소를 덧입히곤 사무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페이지 부인이 챙겨 준 커다란 빵 봉지가 들려 있었다.
“당연히 괜찮지! 웃챠.”
다프네는 괜히 씩씩한 척을 하며, 커다란 트렁크를 들어 올렸다. 꽤 무거운 탓에 한 번에 짐칸까지 올릴 수가 없어서, 일단 지금은 의자에 올려 두었다.
“내가 한다니까…… 누나는 무거워서 제대로 들지도 못하잖아.”
“연약한 네게 이런 걸 들게 할 것 같아?”
“최소한 내가 누나를 돕게 해 줘.”
“누나 말 들어! 넌 빵 봉지 담당이야. 그 자리에서 꼼짝 마.”
다프네는 제 동생을 아주 엄격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사무엘은 시무룩해져서 얼른 다시 자리에 앉아 빵 봉지만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프네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사무엘은 저렇게나 하얗고 말랐으면서도 다프네가 곤란할 때마다 도와주려고 했었지…… 라는 생각에.
열다섯 살인 지금은 그나마 키가 조금 더 자랐다고는 하지만, 그는 여전히 깡마른 소년에 불과했다.
“으쌰.”
다프네는 기합 소리를 내며 무거운 트렁크를 다시 들어 올렸다.
트렁크의 끝이 짐칸에 거의 닿으려고 할 때, 다프네는 새로운 문제를 하나 알아차렸다. 그녀의 키가 조금 부족하다는 것 말이다.
얼른 발끝을 들자, 가까스로 트렁크 끝을 짐칸의 모서리 위로 걸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마침 뒤를 빠르게 지나간 다른 행인이 그녀의 등에 툭 부딪히며, 가까스로 걸쳐 놓은 트렁크가 다프네를 향해 쏟아지듯 떨어지기 시작했다.
“앗!”
얼굴로 떨어지기 시작하여, 그녀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누나!”
놀란 사무엘이 비명을 질렀고, 다프네는 꽤 커다란 고통을 예감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짧은 고요가 흘렀다.
그녀는 놀랍게도 제 몸의 어디도 아프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꼭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가까스로 붙잡은 트렁크는 여전히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다만 무게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곧 트렁크가 스스로 움직여 짐칸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
툭.
그것이 짐칸 위로 완전히 안착하게 되었을 때, 다프네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방이 스스로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까만 가죽 장갑을 낀 커다란 손이 그녀를 대신하여 가방을 올려 준 것이다.
다프네는 조금 뒤늦게 제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팔이 뻗어 나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거기엔 근사한 젊은 신사가 있었다.
아마 스무 살쯤 되었을까.
왠지…… 어딘가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착각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녀가 아는 수도의 신사들은 모두 아버지를 통해 인사하게 된 사람들뿐인데, 그들 중 3등석을 이용할 만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다프네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고,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근사한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네, 고마워요.”
“다행이로군요.”
다프네는 그에게 감사의 뜻으로 페이지 부인이 만들어 준 빵이라도 하나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살짝 모자를 들어 인사를 건넨 남자는 다른 승객들 사이로 순식간에 사라져, 곧 다른 칸으로 이동해 버렸다.
“……가 버렸네.”
다프네는 아쉬워하면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친절한 분 덕분에 살았지 뭐야. 큰일 날 뻔했어.”
“그러게 내가 돕는다니까…….”
사무엘이 불만이 섞인 어조로 중얼거린 말에 다프네는 두 눈을 부릅떴다.
“꿈도 꾸지 마. 조그만 게.”
“누나랑 크게 차이도 안 나는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게다가 누구라도 그렇게 무거운 가방을 혼자 드는 건 무리란 말이야. 대체 그 안에 뭐가 든 거야?”
“별거 안 넣었어. 생활에 꼭 필요한 것뿐이야.”
“뭔데?”
“일단 네 겨울 구두.”
“내 구두가 왜 누나 가방에 있는데?”
사무엘이 따져 묻는데도, 다프네는 손을 꼽아 가며 가방 속 내용물을 읊었다.
“네 장화, 우비, 계절마다 필요한 옷, 만찬에 입을 정장이랑 그리고…….”
그녀가 나열하는 것은 오직 사무엘의 물품뿐이었다. 그로서는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왜? 아주, 내 베개도 챙기지 그랬어?”
“얘는! 누나를 뭐로 보고!”
다프네는 얼른 동생의 팔을 찰싹 때렸다.
“당연히 가져왔지. 네가 좋아하는 무릎 담요와 함께.”
“…….”
“혹시 열차에서 추우면 말해야 해. 알았지?”
“어…… 응.”
사무엘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다프네는 ‘좋아.’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따라 누나의 아이 취급이 더 심해진 느낌인데.”
“무슨 소리야, 넌 아직 열다섯 살이야. 아이인 게 당연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누나도 겨우 열일곱인걸.”
“날 평범한 열일곱 취급하면 안 돼, 어쨌든.”
다프네는 잠시 주변을 경계하듯 두리번거렸다.
그들과 맞은편 자리에는 한 늙은 할아버지께서 앉아 있었는데, 열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잘 들어, 사무엘.”
그녀는 누구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사무엘에게 충고를 건넸다.
“지금부터 무엇이든 누나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알았지? 이건 전부 날 위한 일이야. 들어줄 거지?”
다프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위해서야’라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그녀가 가문의 맹약과 함께 불타오를 때, 사무엘이 자책하지 않도록.
“사실 나는 늘 아버지를 따라서 공작님의 수행원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왔어.”
“……뭐?”
“그러니까 네가 아무리 그 꿈을 바랐다고 해도 소용없어. 서튼가의 장녀는 나고, 넌 내 뜻을 따라야 해.”
“아니, 누나.”
사무엘이 무어라고 말하려는 듯했지만, 다프네는 일단 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녀의 발언에 그가 반발할 구석이 잔뜩 남아 있다는 것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공작님의 수행원이 되는 건 나야. 네가 아니라.”
“저기, 누나의 마음은 알겠지만, 공작가의 사람들이 그런 걸 허락할 리 없잖아.”
수행원은 언제나 주인과 같은 성별을 지닌 자로 발탁한다.
여성 공작이 있는 시대에는 여성의 서튼이.
남성 공작이 있는 시대에는 남성의 서튼이 수행원의 자리를 차지했다.
맹약에 명시된 건 아니지만 그 암묵적인 약속은 지난 500년 동안 한 번도 깨어진 적이 없었다.
“상관없어. 어차피 남은 기간은 겨우 5년인걸. 그러니까 사무엘.”
다프네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도 그들을 모르지만, 공작가의 사람들도 아직 우리의 얼굴을 몰라.”
“누나.”
“너도 장례식에는 참석해. 하지만 가족석에 앉는 건 나뿐이야.
“그럴 수는 없어.”
“난 공작가 사람들에게 절대로 너를 내보이지 않을 생각이야. 너는 장례식에 오지도 않았다고 주장할 거고.”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조금 전에 다프네를 도와주었던 신사가 다시 돌아와 곤란한 듯 이야기를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