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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화 (1/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화

“다녀오셨습니까, 공작님.”

달빛이 내리는 밤, 유서 깊은 ‘슬로언 공작’의 수행원, ‘다프네 서튼’은 허리를 깊이 숙여 제 주인을 맞이했다.

툭.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손질된 구두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다프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공작과 수행원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매정하긴, 사람 섭섭하게.”

서운해하는 말에도 다프네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흐음.”

변함없는 거리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그가 잠시 다프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는 리암이 보내는 집요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수행원과 주인 관계다. 그것은 곧, 야밤에 얼굴 좀 빤히 본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 사이는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사람들은 ‘저렇게 근사한 남자를 두고 어떻게 아무 생각이 들지 않죠?’라고 묻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얼굴도 계속해서 봤더니, 이젠 면역이 생겨서 땅에서 막 뽑혀 나온 싱싱한 무와 다를 것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예,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으니까요.”

“사무엘의 편지가 도착했기 때문은 아니고?”

“……!”

다프네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이 물들었다.

“편지에는 뭐라고 적혀 있지? 그는 잘 지내고 있나?”

“아, 아실 필요…… 없지 않으십니까.”

그녀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공작의 얼굴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이동했다.

별수 없이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

“다프네는 저택에 온 첫날부터, 내가 사무엘의 이름만 불러도 질겁했었지.”

그야…….

다프네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유를 떠올리며 제 입술만 깨물었다.

전부 ‘맹약’ 때문이다. 그녀의 가문과 공작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빌어먹을 저주와도 같은 ‘충성의 맹약’ 말이다.

“누가 알면 내가 사무엘을 잡아먹고 싶어 하는 줄 알겠어. 남자에겐 흥미 없는데 말이야.”

공작은 남자에겐 흥미가 없어도, 남을 괴롭히는 일에는 흥미가 있으실 테니 다프네는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난 그냥 사무엘을 수행원으로 삼고 싶은 순수한 마음뿐인데.”

“……!”

다프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세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섰다.

“제발 제 동생에게 관심 두지 마세요!”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그는 허리를 굽혀 가며 웃었다.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이.

“하지만 그대가 사랑하는 동생이잖아. 내게도 친형제나 다름없어.”

“친형제가 아닙니다! 관계없는 생판 남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사무엘이 좋아.”

“차라리 절 좋아하세요. 얼굴만큼은 제법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녀의 외침에 잠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 * *

다프네가 회귀하기 전 마지막 기억은, 남동생의 죽음이었다.

“……사무엘.”

다프네는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 앞에서 처절하게 무너졌다.

‘어째서, 그 누구도 맹약의 최후에 대해 몰랐던 거지?’

다프네가 알고 있었던 서튼 가문의 맹약이란, 단 한 줄의 문장뿐이었다.

「향후 500년 동안 서튼의 후계자는 슬로언의 ‘명령’을 어길 수 없다.」

수백 년 전, 슬로언에게 목숨을 빚진 마법사 서튼이 제 피에 마법을 걸어 만든 ‘절대적 충성’의 맹약이었다.

왜 도움은 본인이 받고, 똥은 후대가 치워야 하는지는 다소 의아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제약은 ‘서튼’에게도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그들은 대대로 공작의 최측근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귀족 중의 귀족이라 불리는 인물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때때로 슬로언 공작이 누리는 각종 혜택을 함께 누릴 기회가 온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일상은 물론 여행 중에도 그 곁을 절대 떠나지 않는 것이 ‘수행원’이라는 자리이니까.

더구나 서튼 가문이 그 유명한 ‘마법사 서튼’ 이후로 제대로 된 마법사 하나 배출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취업 혜택은 선조가 남긴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다프네가 열일곱 살이 되던 겨울.

슬로언 공작과 그의 수행원인 다프네의 아버지가 ‘엠버혼’에서 돌아오는 길에 함께 사망하는 불운한 마차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오백 년의 ‘절대적 충성’ 중 겨우 오 년만을 남겨 둔 채로.

사무엘은 아버지를 잃은 충격과 슬픔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곧바로 공작저에 가야 했다.

아버지가 남긴 5년의 충성을 책임져야 할 서튼의 ‘후계자’로서.

그리고 약속했던 5년이 지났다.

서튼을 옭아맸던 저주는 끝났으나, ‘5년을 다 채우면 누나와 함께 공작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어.’라던 사무엘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피에 새겨진 ‘절대적 충성’이 사라질 때.

이를 품고 있던 마지막 후계자 사무엘도 함께 불타올라, 순식간에 새카만 재로 변해 버리고 말았으니까.

그 순간은…… 다프네가 겪어야 했던 어떤 지옥보다도 처참하고 끔찍했다.

다프네는 제 눈앞에서 불타오르며 괴로워하는 남동생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갔으나,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오 년 전, 열일곱 살의 겨울로 돌아와 있었다.

* * *

가장 처음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렸을 때 살던 집의 모습이 보였을 때였다.

지붕 모양을 따라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천장, 작은 꽃무늬가 그려진 하얀 벽지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시계탑의 뾰족한 지붕.

이미 ‘지난 시절의 기억’으로 미루어 두었던 많은 것들이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곧은 손이 어딘가 이상했다.

손끝이 간지러운 곳을 찾듯이 네 번째 손가락의 첫 마디를 만지작거렸다.

다프네는 그제야 자신의 손에 결혼반지나 그것이 만들어 반지에 눌린 자국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엉망이었던 결혼 생활이 아쉬워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몇 년간 줄곧 끼고 있던 것이 사라진 허전함. 그런 것이다.

“이건, 꿈…… 이구나.”

그녀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곤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때때로 인간은 ‘이건 꿈이구나.’라고 인식할 때가 있다고.

어쩌면 사무엘의 충격적인 죽음이 그녀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던 걸까. 이런 꿈까지 꾸는 것을 보면.

‘옷을 갈아입어야 할까.’

그녀의 침대 곁에는 지난 밤에 페이지 부인이 가지런하게 꺼내 놓은 원피스와 구두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남매의 생활을 돕기 위해 고용된 요리사 겸 하녀였다.

‘꿈인데, 굳이.’

잠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일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다프네는 이대로 제 방을 빠져나왔다.

넓지 않은 2층짜리 주택은 그녀의 기억 이상으로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다프네는 이런 것을 무의식의 활약이라고 부르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그녀의 발걸음은 남동생인 사무엘의 방 앞에 도착했다.

“……사무엘.”

작게 중얼거릴 때, 끔찍한 공포가 다시 그녀를 찾아왔다.

‘혹시…… 이 방에 사무엘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과거의 모든 것이 재현되는 자리에, 사무엘의 존재가 없다면 다프네는 다시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꿈에서까지 사무엘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그녀가 하나뿐인 동생의 죽음을 인정했다는 의미인 것만 같아서.

떨리는 하얀 손이 문고리 근처를 하염없이 맴돌았다.

몇 번인가 그 차가운 감촉이 소름이 돋을 만큼 선명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그것을 붙잡지 못했다.

그때였다,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은.

“……누나?”

앳된 소년의 목소리에, 다프네는 즉시 그를 끌어안았다.

혹여 부르면 사라질까, 차마 이름조차 부르지 못한 채로 다프네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 * *

다프네는 퉁퉁 부은 두 눈을 연신 깜빡였다.

그야 이런 상황에 부닥치면 누구라도 이렇게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꿈이…… 안 끝나.’

사무엘을 계속 볼 수 있으니까 좋긴 한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사무엘에게 매달려 엉엉 울기 시작하자, 어리게만 생각했던 동생은 꼭 다 큰 어른처럼 누이에게 ‘괜찮아, 괜찮아, 누나.’라며 위로해 주었다.

어느 정도 울음이 그쳤을 때는 사무엘이 그녀를 다이닝 룸으로 데려갔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페이지 부인은 식사를 차려 주곤 배를 통통 두드렸다.

아마 ‘아침은 든든히 먹어야 해.’라는 뜻 같았다.

다프네는 사무엘과 마주 앉아 식사했다.

포슬포슬한 달걀 요리와 하얀 빵 그리고 페이지 부인이 만든 특제 베리 잼은 무척 맛있었다.

추억하던 그대로의 맛이라, 다프네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아침을 먹고 말았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작은 응접실에서 사무엘과 차를 마셨다.

페이지 부인이 환기가 필요하다며 창문을 열자 싸늘한 겨울바람이 다프네의 뺨을 스쳤다.

“누나가 추울 텐데.”

사무엘은 찻잔을 쥐고 있던 따듯한 손으로 다프네의 양쪽 뺨을 쥐었다.

“난 괜찮아. 하지만 네가 감기에 걸리면 곤란하니까 방으로 돌아갈까?”

“응, 그러자.”

다프네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일찍 잃어야 했던 또 다른 가족을 떠올렸다.

“……아버지.”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는 이야기를 들었을까.

“괜찮아, 누나.”

사무엘이 애써 웃는 얼굴로 답했다. 입술 끝에 가느다란 떨림을 간직한 채로.

다프네는 왠지 기시감이 들었다. 동생의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마침 열일곱 살의 겨울의 일이기도 했다. 그것도 아버지께서 엠버혼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다음 날…….

사무엘은 저렇게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가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라고 말했었다.

“내가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은 감각에 다프네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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