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1부 66화 멜레의 거리
정거장을 몇 번 더 지나 새로운 도시에 도착했다. 역에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보니 중심도시는 아니고 중소도시 정도인 것 같았다.
“이번에 도착한 도시는 ‘멜레’라고 했죠?”
“응. 고대 단명한 인물 중 한 남자의 이름에서 따 온 도시 이름이야.”
“오, 여기는 티고와 다른 점이 있나요?”
“잘생긴 남자들이 많아!”
“네?”
외눈박이만 사는 대륙에 잘생기고 못생긴 기준이 있나? 고개를 돌려 시지프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좀 전에 역에서 사 온 음식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
“뭐야, 못 믿는 눈치네?”
“그야 여기는…제가 사는 곳이 아니잖아요?”
“아아, 네가 살던 곳에는 미의 기준이 조금 다르겠구나.
눈이 큰 것보단 작은 남자가 인기가 많아?”
“아뇨, 그건 아닌데….”
그럼? 짧게 되묻는 말에 무어라 답을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지구에서는 눈이 큰 사람도 작은 사람도 인기는 많다. 연예인 중에서 만인이 잘생겼다고 부르는 이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 모두가 생각하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생긴 기준에 눈, 코, 입. 이목구비 비율과 ‘눈에 끌리는 남자’의 기준에 외눈박이가 주된 미의 기준에는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그럼 눈이 큰 남자?”
“그냥 다 다른 것 같아요. 눈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그냥 그 상대방 자체가 좋아서 끌리는 사람도 있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외모랑 상관없이 상대를 좋게 보는 경우가 있어?”
“단지 외모만 보고 끌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뿐이에요.
성격이나 옷 입는 센스나 친절하고 배려심 있는 행동. 항상 상대의 말에 경청하는 태도…등등 누군가 다른 누군가에게 끌리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죠.”
“내가 루나에게 끌리는 것처럼?”
“그…렇죠. 제가 말하는 건 남녀 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거지만.”
“남녀 간의 사랑이라.”
“지프는 사랑 해봤어요? 짝사랑 같은 거요.”
“그 꼬맹이가 사라지면서 세계가 바뀌었다며. 혹시 내가 짝사랑 이야기 해준 적 없어?”
“아…있었어요. 첫사랑 이야기를 해주셨었어요.”
“그래? 그랬구나….”
그녀는 씩 웃고 정면을 쳐다보았다. 이내 굳게 닫은 입을 비틀 거리며 묵묵히 걸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첫사랑을 생각하는 걸까?
그게 뭐든 상관할 바 아니지. 고개를 돌려 정면을 쳐다봤다. 멜레의 거리는 유럽의 날 좋은 오후 같았다. 북적이는 거리 속에서 벽돌로 채운 땅을 밟았다. 마침 삼일장이 열렸다며 여기저기에 천막이 세워져 시장이 만들어진 참이었다. 시장에 나온 상품들은 과일부터 필기구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녀는 빨간 사과 여러 개를 검은 봉지에 담아 왔고 나는 양념이 발린 고기를 꼬치로 꽂은 음식을 두어 개 집어왔다. 지프는 종종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먹었다. 그렇게 할 일 없이 아삭아삭 소리를 들으며 거닐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이런 불치병에 걸렸으니. 죽기만을 기다려야 하나.”
“너무 낙담하지 마. 너는 혼자가 아니잖아?”
희망적으로 애써 말해주는 그녀의 말이 슬프게 들렸다. 혼자가 아니면 뭐해. 병의 속도가 무섭게 빨라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데.
이후 조용히 숙소를 찾았다. 서로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지프는 결제를 진행했고 나는 그녀의 짐을 같이 받아 방에 넣어두었다. 복도에 나오니 지프가 멀리서 걸어온다. 또각또각 거리는 구두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마침내 지프가 제 앞에 섰을 때 먼저 입을 열었다.
“지프, 제 병 말이에요.”
그녀는 말없이 이쪽을 쳐다보기만 했다.
“이런 병 나아주는 약 같은 건 역시 없겠죠?”
“응…없어.”
“역시가 역시네요. 그럼….”
단칼에 말해버리는 태도에 쓴 것을 먹은 듯 혀가 씁쓸했다.
“어제부터 악화되는 속도를 줄여주는 약초부터 신장에 도움을 주는 식물을 계속 찾아보고 있는데, 너에게 도움이 될 약을 발견하지 못했어.”
“…….”
“그러니까, 아마 지금 의학 기술로는 네 병을 치료하는 건 어려울 거야. 병이 진행되는 속도를 늦춰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특히나 생명의 성장에 관한 부분은 윤리 문제로 연구원이나 황실에서는 꽤 조심스럽게 다루는 중이라서. 안 좋은 쪽으로 이용될 가능성도 높고 그렇게 되면 정말 심각한 사회 문제로 번져 질 것이 분명하거든.”
“생명복제?”
“음, 뭐 그런 것도 있지만 네 경우를 예로 들자면, 신장을 약이나 기술로 자유자재로 늘이고 줄이는 게 가능하고 그 과정이 더 쉽고 편리해질수록 남용하고 과용할 때 받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거거든. 나라에서 통제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겠지.”
“아….”
절대 불가능. 그녀의 말이 비수를 꽂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고.
…진짜 어쩌지?
“이게 이곳에 사는 대중의 입장이야. 그래서 적어도 여기선 안 될 거라는 거야.”
“그렇구…네? 적어도 라고요?”
“적어도. 여기 서대륙에선 저 끝 구석 시골부터 중심 도시, 수도 황성을 찾아가도 절대 치료할 수 없어. 그런 희망도 못 가지고. 황실이고 연구원이고 너를 치료하지 못해서 정말 실험대상으로 쓸 수도 있어.”
“그럼, 어떻게 해야….”
“루나야. 너 여권 있어?”
“네? 여권이요?”
갑자기? 여기서 여권을 물어본다고? 외국 가야 하나?
“아니요? 아마 없을 거예요.”
“어머니께서, 아니 아주머니께서 나중에 유학 보내겠다고 말한 기억이 나는데?”
“그건 저 아니었어요.
하지만 성인 되면 보내려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보세요?”
“앞으로 다른 나라로 가고 대륙으로 넘어가야 하니까. 외국으로 넘어가려면 여권은 필수로 있어야 하잖아. 그게 있어야 비자도 발급 받고 표도 살 수 있지.”
“아…가방에는 안 챙겨왔어요. 새로 만들어야 해요.”
“아. 그렇구나. 집에서 바로 나왔다고 했으니까.”
지프는 이해했다는 듯 손바닥 위에 주먹을 탁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사진관 가서 사진 좀 찍어올래? 너 여권 만들자.”
“네. 지금 바로 다녀오라는 거죠?”
“응. 돈은 여기 줄 테니까 바로 다녀와. 저기 앞에 사진관 있는 거 봤지? 먼데 갈 것 없이 거기 다녀와.
다른 곳에서 왔다지만 회화는 가능하지? 여기서 머문 지도 꽤 되었잖아.”
“물론이죠.”
꽤 머문 것치고 언어를 배운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언어는 물론이고 그새 회화 책도 사서 이젠 짧은 대화도 가능하니까.
“그럼 다른 건 딱히 없고, 이따 오면 같이 네 병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해보자.”
“네, 다녀올게요.”
◆◆◆
“귀 둘 다 보이게 머리 넘기고, 눈썹 양쪽 다 보이게 앞머리 넘겨주세요.
다행히 흰 옷을 입고 오진 않으셨네…아, 넘겼어요?
이제 저기 의자에 앉아요.”
사진관에서는 딱히 몇 마디 안 해도 뭘 해야 하는지 알아서 척척 말해주었다.
그야 식당에서처럼 음식 주문하려고 메뉴판을 보면서 일일이 부를 필요도 없고 ‘여권사진’이라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으니까.
머리를 넘기라면 넘기고 어깨를 펴라고 하면 펴주면 사진은 알아서 찍어주고. 사진을 다 찍은 뒤 돈을 내면 언제 찾아가면 된다는 말까지 해주었다.
“수고하셨소.”
“감사합니다.”
“예예. 오늘 중으로 뽑아 드릴깝쇼?”
“네. 오늘 가능 하나요?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예에. 세 시간 뒤에 오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 아가씨. 나가기 전에 저기 책자 하나씩 가져가쇼.”
“책자요?”
눈으로 사진관 아저씨가 가리키는 손을 따라갔다. 그 끝에는 한 구석에 웬 패션 잡지가 한 아름 쌓여 있었다.
“저게 무슨 책자인데요?”
“모르세요? 이번에 동서대륙 합작 패션쇼라고, 오도르와 아쿠아에서 주최한 대형 패션쇼였지요. 동대륙에서는 불티나게 팔려서 돈 주고도 못 산다는 핫한 책자라는데, 여기는 워낙…알죠? 워낙, 워낙 그래서 반응이 미적지근해요. 물론 황실 눈치 보여서 못 사는 분들도 많지만요.”
오도르라면 오피뉴 오도르. 아쿠아는 아쿠아 테라. 동대륙과 서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들이 주최하고 지원한 합작 책자라는 거지? 근데 그걸 안사서 저렇게 묵혀 두었다는 게 말이 돼?
“그냥 가져가도 되나요?”
“그러시죠. 어차피 곧 버릴 거였수다.”
“그럼 한 개만 갖고 갈게요.”
잠깐만. 어차피 이것도 지프랑 같이 보게 될 거 아니야?
“아저씨, 이거 하나 더 가져갈게요.”
한 개를 빼든 두 개를 빼든 그러든지 말든지. 아저씨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손을 휙휙 올렸다.
그렇게 패션잡지를 두 권 챙겨 사진관 밖으로 나갔다.
◆◆◆
“가자.”
숙소로 돌아오자 방 안에서 손을 흔들던 그녀가 대뜸 그렇게 말했다.
“동대륙으로 가자고요?”
“응, 너를 살리려면 그게 답이야.”
“살려면….”
“예전부터 서대륙은 대부분 과학기술과 의학에 의존하고 있어. 그마저도 윤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분야는 철저히 숨기고 연구도 안 해. 그렇기 때문에 네가 가진 병의 속도를 늦추는 건 될지 모르겠지만, 너는 끝내 죽을 거야.”
“그거야 그렇겠죠. 그럼 동대륙은 아니라는 건가요?”
“원래 동대륙은 원래부터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사람들 보단 진보적이고 예술을 중시하는 나라라서 미래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는 기술들은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더라고.”
“확실히 서대륙의 전체적인 분위기랑은 다른 곳이겠네요.”
“그렇지. 그리고 대표 국가인 오피뉴 오도르의 여황 아라냐는 마법사를 비롯하여 마력으로 치료가 가능한 특수 분야를 연구하고 있어. 그 결과 맞이한 국서가 마탑주 룩스인 거지.”
들었을 때부터 단순한 결혼 동맹이 아닐 거란 생각은 했지만 그런 이야기가 있던 거구나.
“그럼 아라냐와 룩스가 계약 관계인 동시에 결혼한 게 단순한 정치적인 이유만 들어가 있던 건 아니겠네요.”
“응, 맞아! 계약과는 별개로 두 사람은 서로 주고받는 게 있는 거야. 아라냐는 동시에 마력 특수 치료 분야와 마탑주를 비롯하여 마탑 세력을 제 편으로 만들어 힘을 키우는 거고, 룩스는 자신들의 기술과 마력 치료를 공개함으로써 황실과 손을 잡은 동시에 그간 신전과 귀족들이 배척했던 자신들의 존재와 연구 가치성을 존중 받고 하나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는 위치가 된 거야.”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특수 기술이 있으면 제 병이 치료될 가능성이 높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