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1부 62화 태초의 시작
팔락. 팔락. 파라라라라락.
한 장 한 장 넘기며 내용을 읽었다. 아니, 읽을 수 있다.
벤투어 옆에 적힌 뜻을 알아볼 수 있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벤투어 옆에는 한글도 아닌 다른 말이 뜻으로 적혀 있었는데, 모두 알아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문자인데 위에 한글을 따로 적어둔 것처럼. 술술 읽힌다.
“가, 나, 다. 그리고 이건 라.
전부 알아 볼 수 있어. 이게 무슨 말인데 한글처럼 잘 읽혀지지?”
책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벤투어가 적혀 있고 옆에는 다른 문자로 그 뜻을 서술하고 있다.
그걸 알아보고 읽을 수 있다. 발음기호까지. 전부.
“지프에게 부탁해서 영어랑 비슷한 언어로 적힌 책을 받긴 했지만…이게 해답이었을 줄이야!
고작해야 몇 단어 알아볼 줄 알았는데, 옆에 적힌 말로 전부 읽을 수 있어.
근데 이건 어느 나라 말이지?”
페이지를 넘겨봐도 언어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안 적혀 있네. 지프는 이 언어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어쨌든 나에겐 잘 된 일이야. 이거라면 벤투어도 문제없이 읽을 수 있겠어.”
책을 옆에 두고 다른 책을 들었다. 역사책이다.
제목은 밤의 역사서. 국어책을 옆에 펼쳐두고 표지를 넘겼다.
그리고 첫 장을 손가락으로 짚어 하나씩 더듬더듬 읽었다.
“최초의 인류가 등장하기 전 세상은, 밤의 신 닉스와 달의 여신 셀레네가 등장하면서 시작 된다.”
팔락.
첫 장을 펼쳐 내용을 한 문단씩 눈으로 흘기며 내용을 이해했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머리로 글을 읽는 내면의 소리가 엇갈리게 울린다.
[본래 세상은 어두컴컴한 빈 공간 그 자체였다. 고체, 액체, 기체와 같이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빛이 있기 전에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그 속에서 태어난 두 신은 새로운 세계와 끝나지 않는 영원을 만들기 위해 거대한 빛을 띄우고 무한한 낮을 만들었으며…시간은 혼돈에서 질서로 가득 찬 코스모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여기는 진화론 보다 창조론을 믿는 쪽인 건가?
하긴, 지프도 종교 언급을 한 거 보면 종교가 있는 것이 당연한 시대 같은데.
근데 이래서야 역사책을 보는 게 아니라 종교를 공부하는 느낌인 걸.
…좀 더 읽어 봐야겠다.”
[코스모스 시대에선 빛이 어둠을 등지는 것이 당연했다.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에서 사람들은 선과 정의를 우선시하였다. 당연한 이야기 같았지만 과거에는 그리 하지 못했으니.
하지만 여전히 악과 부정의는 음지에서 날뛰고 있었으며, 때로는 양지로 뛰쳐나와 선량한 서민들을 괴롭혔다. 서민들뿐만 아니라 귀족들과 왕이 그것들에게 홀려 전대 역사에서 커다란 실수를 남기고 갔으며, 그로 인해 죽은 가련한 영혼들은 만 번을 넘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단을 만들었다. 법으로써 도덕과 윤리를 따지지 않는 이들에게 벌을 주듯 재단을 만들어 선과 정의의 정석을 보여주고 따르지 않는 이들에겐 노여워한 신께서 친히 벌을 내려주셨다.
재단에 올라가는 제물로는 염소는 순결한 암컷만 가능하고, 소의 경우 너무 뚱뚱하지 않고 적당하게 근육이 잡힌 것이 최고로 꼽힌다.
그러나 인간은 병사하지 않은 범죄자만 가능하다. 병든 영혼은 그 병이 신에게까지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자는 다르다. 신께선 범죄자도 사랑하신다. 이미 죽은 더럽혀진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저승으로 인도해주시며, 본래부터 깨끗했던 영혼을 보내면 다시 환생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
[셀레네와 닉스를 찬양하라. 그 분들은 감히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코로 향이나 체취를 맡을 수 없으며 입으로는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손으로 가리킬 수 없는 거룩한 존재시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그 영광스러운 존함을 감히 언급할 수 있는 이유는 어젯밤, 꿈에 나온 분들이 적을 수 있는 권리를 선사해주셨기 때문이다. 이를 영광으로 여기고 이렇게 글을 남긴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덮었다. 머리가 멍해진다.
“…사이비인가?”
의심했지만 이 책은 서점에서 팔고 있는 국가 정식 도서 중 하나였다.
서점에 갔을 때 직원이 역사책으로 최고라며 추천을 해준 것이었는데.
“서점에서 내가 사기를 당할 줄이야.
머리말만 읽었지만 이건 더 읽을 필요도 없겠어.”
그렇게 책을 뒤로 던져두려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애써 사온 걸 버리기엔 아까웠다.
심지어 저 사이비 같은 책이 국가 정식 역사 도서로 정해져 있고 정석으로 알려졌다는 것인데, 버리는 건 진짜 바보 같은 판단이라.
그런 생각이 들자 책을 뒤로 던져버리는 대신 다음 장을 넘겼다.
[태초의 두 신이 만들어낸 빛은 곧 또 다른 위대한 영광 ‘헬레오스’를 만들어냈다. 신들은 계속해서 늘어났지만 여전히 부족할 것이 없었다. 그야 당연히, 당신들은 그 누구도 감히 해칠 수 없는 존재이오니. 그러나 헬레오스께선, 지금까지도 만물에게 빛을 선사해주는 그 분은 달랐다. 대자연 속에서 딱 한 가지가 빠졌다는 것을 아셨다.]
그렇게 그 분은 우리 벤투족을 포함하여 많은 이들을 창조하셨다. 최초의 종족은 태양의 신이 직접 빚어낸 유사체였기에, 강렬하고 호전적인 성향을 보였다.
날 때부터 제국을 세워 사람들을 지혜롭게 다스리고자 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그 중에서도 크레우스는 남달랐다.
무역, 외교, 특산물을 외치고 있을 때 그는 농사를 외친 남다른 인물이었다. 떡잎부터 통치자의 정석이었던 그는 곧 전 대륙의 최초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농사를 비롯하여 많은 종족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초적이고 실용적인 법을 만들었으며, 또한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해 통치자의 자질을 가진 다른 이들의 딸을 하나씩 부인으로 맞이하여 결혼정책을 펴면서 대륙의 통일을 유지시켰다.
그렇게 맞은 부인을 세어 보니 총 마흔아홉이나 되었다.
그 아래에 황자와 왕자는 자그마치 아흔 여덟이나 되었는데, 기이하게도 공주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때문에 차기 황제를 정해야했던 크레우스 황제는 난감했다. 자신이 낳은 모든 자식이 총명하고 똑똑했으며, 무엇 하나 흠잡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황자들이 모두 자라면 공석인 황제 자리를 넘볼 수도 있고, 그러면 대륙에는 크나큰 피바람이 불 것이었다.
황제는 고심했다. 누구에게 황위를 넘겨줄 것인가?
“…그렇게 첫 황태자의 자리는 첫째 황자 넵튠이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원체 자유로운 성질을 가진 그는 곧 출가를 하며…황태자의 자리는 다시 공석이 되었다.”
그 사이에 대륙 내에서는 이름 모를 큰 전염병이 돌았고, 그로 인해 대륙에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크레우스의 황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세 번째…여섯, 일곱, 여덟 째 황자와 왕자가 모두 병으로 죽어갔다. 황제는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치고 크게 탄식하면서도 다음 황위에 오를 자식을 앉혀야 했다.
크레우스의 황제는 서열에 맞게 고를려고 했으나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서열상으로는 9번째 황자 ‘아이젠’이 앉아야 했으나, 총명함과 명석함을 따지면 아이젠보다 더 어린 10번째 왕자 ‘오비젠’이 더 나았던 것이다. 황제는 다시 고민했고, 어느 날 밤 한 여인을 불러 은밀히 어떤 말을 전했다.
“그러나 아이젠 역시 그 대화를 들었고, 다음 날 황성에는 큰 파란이 일었다. 아이젠 황자가 군대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와 황제 크레우스에게 칼을 겨눈 것이다…?”
전 날 아이젠은 황제와 황비의 은밀한 대화를 엿 들었다. 차기 황제가 될 수 있는 황태자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으려면 제 1 후보인 아이젠을 죽여야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그 길로 발길을 돌려 군대를 모아 다시 달려와 황성 내를 장악하였다.
황자는 살려 달라 간곡하게 말하는 황제의 목을 주저 없이 베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던 오비젠의 어머니 이비아 로치의 목도 베었다. 그리고 제 1 황후와 자신의 어머니 제 4 황후를 제외한, 성에 있던 모든 황자와 왕자, 황비와 황후를 모두 살해하였다. 그렇게 황제 크레우스, 그의 아내를 칭하는 마흔 일곱의 크레니데스. 그리고 그들의 자식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생을 마감했다.
당시 도륙의 현장을 목격한 시녀와 하녀와 같은 사용인들부터 대신들 중 몇몇은 기록으로 남겼는데, 하나 같이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광경이었다는 내용으로 남아 있다.
새 황제가 등극 되자 아이젠은 곧바로 새 황후를 들였다. 그녀의 이름은 ‘보니다’. 이름만큼이나 아리따운 그녀는 아이젠이 황제가 되는데 큰 공신을 세운 당찬 여인이었다. 최초의 여기사, 그것도 평민 출신으로써 최초였으며 기사도 정신에 맞게 황제 아이젠에게 맹세를 한 뒤 황제가 될 때까지 기사로써 그를 지켰다.
새 황제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며, 그 중 장남인 ‘아이테르누스’는 영재이고 칼을 쓰는 데 능숙했으며, 일찍이 어릴 적부터 정치와 외교의 흐름을 읽는데 능하여 그 분야에서 오래 일하였던 대신들과 학자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렇게 전대와는 달리 차기 황태자는 아이테르누스가 되었다.
[아이젠 황제가 통치하는 대륙은 피바람이 불었던 옛 시절을 까무룩 잊어버릴 만큼 평화롭고 태평했으며, 따뜻한 나날만 계속 되어 작물은 풍부하고 종족 간의 다툼은 완화 되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아이젠 시대’라 부르며, 학자들도 불안정하지만 전 역사 중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고 평가한다.]
첫 장은 이렇게 끝났다.
“태초의 시작….”
책갈피로 종이를 한 장 접고 책을 덮었다.
“정말…….”
너무 다르네. 이젠 놀랍지도 않다.
창조론. 종교. 신화적 해석. 기본적인 객관적 서술법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주관적인 해석.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역사책과는 거리가 먼. 차라리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이걸로 당장 뭘 알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도 허투루 보낸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도, 이 세계가 지구의 대한민국과는 전혀 다르고, 달라도 너무 다른 곳이라는 건 알겠어.
종교와 크게 관련이 있는 역사를 가진 곳이라는 것도 알겠다고.”
덮은 책 표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게 역사서라니.
하. 헛웃음과 함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몇 시간 동안 번역책을 보며 책을 읽은 시간을 떠올리며 자조가 지어졌다.
“그래도 아예 쓸모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일단 피곤하니까 자고 일어나면 마저 읽도록 해볼까.”
불을 끄고, 책을 한 쪽으로 밀고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귀로 들리는 이불 끄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