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1부 61화 오피뉴 스캔들
“음, 듣고 보니 익숙하네요.”
익숙하지 않다. 전부 처음 듣는 이야기니까.
벤투어? 우우돈 벤투스…. 이름이 어렵지만 벤투스로 기억해도 되겠지?
여튼 서대륙에선 많이 쓰이는 언어가 벤투어라는 건 알겠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대해 아는 게 없어도 너무 없다. 전교 1등으로 아는 지프 앞에서 역사에 대해 모른다는 걸 알면 나에 대해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전교 1등 이루나가 아님을 알았을 때 거짓말이라고 둘러댈 수도 없다. 이루나에 대한 이야기는 줄곧 아줌마나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과거의 이루나가 자신의 집이나 가게에 찾아왔을 때마다 종종 들었을 것이니까.
“아무튼 지도는 교환하러 가는 게 좋겠다. 이걸 싸게 구입했을 리는 없고. 벤투어로 바꾸러 가자.”
“아니에요. 좋은 경험했다 셈 치고 갖고 있을래요.
그냥 하나 더 사러 가요.”
“음…그래. 이번엔 같이 가서 골라 줄게. 아까는 급하게 받아오느라 그런 것 같은데.
덜렁 대다가 눈 뜨고 코 베일라. 물건 살 때는 꼼꼼히 보고 사.”
“네….”
그녀의 말에 무어라 변명하고 싶었지만 글을 못 알아보니까 잘못 산 것이라고 할 수도 없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먹을까?”
“좋아요.”
말이 끝나고 그릇이 비워질 때까지 말없이 국수만 빨아먹었다. 후루룩 후루룩. 잘 먹는 것 같지 않을 것 같던 시지프도 정신없이 먹다 국물까지 깔끔하게 먹었다.
육수가 그릇에 부딪쳐 튀어 오른 몇 방울이 다시 그릇으로 들어간다. 찰랑이는 국물은 점점 줄어들고 배는 점점 차오른다.
국수를 먹으면서도 동시에 ‘저 국수 맛있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맛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지간히 배고픈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아침 새벽부터 굶은 자의 허기는 엄청났다.
“잘 먹었다!”
“저도 잘 먹었어요!”
“앞으로 제가 이런 거 다 사주고, 만들어줄 수 있을 땐 만들어 줄게요.
그니까 먹고 싶은 거 있을 때 마다 꼭 말해요. 알겠죠?”
“돈 엄청 빨리 줄어 드실 텐데, 알겠어요!”
누군가 말해준 기억은 없지만 어쩌면 언젠가 어딘가에서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낯선 아저씨가 사탕 준다고 하면 따라가면 안 돼.’
어릴 때부터 배우면서도 그 낯선 아저씨를 따라가지 않는 아이는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어린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다. 같이 있는 사람은 낯 설지도 않고, 아저씨도 아닌 동안의 30대 여성이지만!
“근데 지프. 지프가 이야기하는 거 들었는데 정말 재미있어요. 다른 이야기도 해줄 수 있어요?”
“내가 따로 말할 만한 옛날이야기는 없어서.”
“아…그럼 어쩔 수 없고요.”
“아, 그거 있다. 리베라 공주 스캔들.”
“스캔들이요?”
공주? 왕이 존재하는 나라가 있어? 영국이나 일본 같은?
“이번에 동대륙에서 크게 났다고 하더라고. ‘오피뉴의 리베라가 드디어 한 건 했다!’ 라는 기사 제목으로 1면에 크게 실어줬더라.”
“무슨 이야기인데요?”
“오피뉴가 어디인지는 알지? 오피뉴 오도르.
동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떨친 나라야. 알다시피 땅덩이도 대륙의 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국가고. 서대륙에 ‘아쿠아 테라’가 있다면 동대륙에는 오피뉴가 있는 거지.”
오피뉴 오도르. 아쿠아 테라.
각각 대륙에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넓은 땅을 가진 나라.
짧게 부르면 오피뉴와 아쿠아. 여름에 바다 휴양지가 생각나는 이름이다.
“아쿠아에는 황제가, 오피뉴에는 여황이 있어.
여황이 앉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황권이 강한 여황제는 거의 유일하지.”
“여황제가 힘이 강한 경우가 별로 없어요?”
“응, 보통 다음 황권은 차기 황태자가 쥐고 있어. 그러다 황태자에 문제가 생길 때 황태녀를 세워 자리를 넘겨주기 때문에, 여태 올라온 여황제는 대부분 힘이 약했어.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지. 전대 황제가 처음부터 아들을 낳지 못했거든. 딸도 지금의 여황제 뿐이었고. 그래서 전대 그대로 힘이 넘겨졌어.”
“그게 누구인데요?”
“아라냐. 풀네임은 ‘아라냐 오도르’. 남편은 마탑주 ‘룩스’.”
“불리는 것부터 뭔가 다른 평범한 부부와는 다를 것 같네요.”
“그럼! 계약 관계이자 연애결혼으로 이루어진 부부거든. 오묘하고 기이한 관계지.”
계약 관계인데 연애결혼을 했다고?
계약을 갑을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로 맺은 건가?
“기사로는 부부 중에 진짜 부부의 정석이라는 평을 달아주었던데. 사실 나는 잘 모르겠어. 연애결혼을 한 부부가, 연애결혼 이전에 서로의 목숨을 건 계약을 했으니까.”
“음, 화끈하네요.”
“화끈해도 너무 화끈해서 연애결혼 이야기가 사실인지 의심이 될 정도야. 확실한 건 동대륙 내에서만 세력이 있던 오피뉴가 세계적으로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도 둘이 결혼하면서 더 가속화가 된 것 같거든.”
열띤 설명을 늘어놓는 지프의 눈빛이 반짝인다. 하긴. 요리할 때 아니면 항상 신문을 보고 있었으니 그만큼 정세에 관심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어쩌면 스캔들에만 관심 있는 걸 수도 있고?
“그러면 리베라는 그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에요?”
“그래. 막내딸이지. 작년에 아쿠아 테라의 왕자 아우닥스랑 약혼을 한 사이고.”
“우와, 세기의 사랑이네요!”
“천만에. 평화협정에 나온 조항 중에 결혼동맹이 조건으로 들어가 있어서 약혼한 거야.”
강대국 간에 이뤄지는 약혼. 다시 말하면 약혼동맹인 것이다.
결혼동맹을 맺으면 평화협정이 이어지고 다음 세대까지 그 평화를 유지할 거라는 의미로 하는 거겠지. 아마 둘도 별 일이 없으면 벌써 결혼식을 올렸을 것이다.
“으음…신기하네요.”
“뭐가?”
“그러니까, 동대륙에서 최고로 강한 나라의 공주와 서대륙에서 제일가는 나라의 왕자가 약혼을 한 거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동대륙에서는 막내, 서대륙에서는 장남이 나온 거죠.”
“응.”
“장녀는 왜 결혼을 하지 않은 거예요?”
“아, 그건.
아라냐 여황은 결혼을 안 한 처녀가 있는데도 가장 어린 딸을 보낼 수밖에 없었어. 부득이하게도 조건에 맞는 자식이 리베라 공주뿐이었거든.”
“아하?”
보통 결혼을 한다고 하면 보통 나이가 가장 많은 큰 딸을 먼저 내보낸다. 겹사돈이나 집안의 서열이 꼬이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다. 약혼도 마찬가지다. 약혼을 한다는 의미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어린 막내딸을 내보냈다고? 약혼에 조건에 맞는 경우와 맞지 않는 경우가 따로 있나?
“그냥 약혼한 게 아니니까. 국가적으로 이뤄지는 협정의 일부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는 신아래 이뤄지는 신성한 의식과도 같은 부분이라서 그래.”
“흠, 좀 복잡하네요.”
“그야 넌 아직 종교도 없고, 직업도 없는 미성년자잖니?
지금 나이에는 모르는 게 당연한 거야. 그럴 수 있어.”
“네.”
고작 스캔들인데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지만 꼬치꼬치 캐 물으면 이상하게 볼 거니까 조용히 듣자.
“아무튼, 그러다 이번에 스캔들이 난 거야. 약혼남의 동생이자 아쿠아 테라의 둘째 왕자, 아우구스투스와 사귀는 사이라는.”
예?
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 같은 소리야?
“둘이 사귀어요? 그거 바람 아니에요?”
“말 그대로 소문이 나돈 거고 아직 사실로는 확인된 게 없으니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공주나 아우구스투스 왕자가 먼저 청혼을 하지 않는 이상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어.”
“세상에…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막장 드라마는 어딜 가나 일어나는 구나.
어딜 가나 그런 드라마를 싫어하는 외계인은 없고.
“비록 국가끼리 맺은 결혼동맹에 둘이 맺어지긴 했지만, 마음이 안 맞으면 결혼하고 나서 몰래 정부를 둘지 누가 알겠니? 왕가 끼리 결혼하는데 정부 한둘 쯤 두는 건 일도 아니지. 공개적으로 들키거나 증거가 잡히지 않으면 되니까.”
“그래도…서로 약혼한 사이인데. 그리고 보통 그런 기사가 나면 약혼이 깨지지 않나요?”
“안 그래도 언론에선 둘이 사랑 없는 약혼이라 곧 깨질 거라는 헛소리를 내더라고. 하지만 둘이 약혼한 건 정치적인 목적이지 연애약혼은 아니었잖아.
연애약혼이었어도 국가 끼리 결혼을 올리는 일은 신중하고 중대한 일이지. 아마 둘이 약혼을 깨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봐.”
“그래도…어떻게….”
멍하니 이야기를 듣다 문득 입이 쩍 벌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가 대 국가로 일어나는 막장 드라마는 상상만으로도 오싹하고 순간순간 그들이 느낄 감정과 상황에 대해 온통 끔찍한 쪽으로만 떠올랐다.
“상당히 충격 받은 얼굴이네? 맨날 공부만 하다가 이런 이야기 들으니까 충격적이야?”
“…혹시 한쪽에서 누가 이거 먹고 떨어지라면서 뺨을 날리지는 않던가요?”
“어, 어어? 뭐가 떨어져?”
“아, 아니요. 이따가 다른 이야기도 해주시라는 말씀이었어요!”
“음, 스캔들 말곤 더 없는데?”
“역사 이야기라도 해주세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게 말씀해줄 것 같아요!”
“좋아!”
무심코 반쯤 폈던 오른손을 꽉 주먹 쥔 채 왼 손으로 지프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문구점 회사의 입구 손잡이를 잡고 벌컥 열었다.
“도착! 들어가자.”
“네!”
◆◆◆
“오늘 재미있었어요.”
“나도. 이 근처에서 가 보고 싶은 곳은 다 가 봤니?”
“네. 지프 없었으면 저 혼자 길 헤매고 있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래, 들어가고 내일 보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어어…너도 잘 자.”
달칵. 지프는 방에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가방을 내려두었다. 마트에서 볼 법한 큰 비닐봉지 안에서 사온 것들을 꺼냈다. 문구사에서 새로 산 지도와 역사책을 비롯하여 국어책 등 서점에서 사온 두꺼운 책 두어 권이 침대에 올라가자 매트리스가 약간 눌렸다.
“아예 왕가의 족보로 이루어진 정보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긴 하지만 이 정도면 처음 치곤 나쁘지 않다. 두꺼운 책의 분량에 아찔하긴 하지만 저 자체가 기초 공부일 테니 무조건 외워야 한다. 지구에서도 그렇고, 어느 세계에서든 무지한 것보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책을 집어 들었다. 제목은 모르겠지만 벤투어를 공부하는 국어책이라고 지프가 설명해주었던 것을 기억했다.
공용어를 공부하는 책인데 그 뜻을 알아볼 순 있을까. 여기선 한국어를 안 쓰던데.
그렇게 생각하며 첫 장을 넘겼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