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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76)화 (76/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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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7. 최강 대령한테 마음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유 소령님 없이는 아군에 피해 갈까 봐 파장도 못 쓰면서 어떻게 여기에 남아서 발전기를 고치겠다고 하는 겁니까?”

“…….”

“대령님께서 이러실 줄 알고 제 옆에 있어 달라고 했습니다.”

“…….”

“제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하아. 젠장, 이나리…….

강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해란과 해란의 가이드, 그리고 저 자신. 이렇게 셋이서 은신 어빌리티로 몬스터의 감지를 피하며 발전기를 고치려던 계획이었다.

누가 보면 소대를 위해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혈혈단신으로 몬스터를 막으러 가는 훌륭한 연대장님인 줄 알겠다. 그런 거 아닌데…….

일일이 설명해 주기도 창피하고, 기력 소진한 부상자 주제에 저를 먼저 걱정해 줘서 고맙기도 했다.

안 된다고 뿌리치고 저 녀석을 빨리 여기서 내보내야 하는데, 강은 저만 쳐다보고 있는 나리 때문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대장님. 똥강아지 떨어트려 놓으면 울 거 같은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통신실로 갈까요?]

눈치 빠른 해란이 강에게 물었다.

[안 중위, 통신실 커버할 만한 체력은 돼?]

[적어도 이 중사보다는 제가 낫습니다.]

[그럼 저 꼴통은 내가 데리고 있지.]

[알겠습니다.]

해란이 자신의 가이드를 데리고 강의 곁을 떠나 대열을 따라갔다. 강은 나리와 주환을 향해 손짓했다.

나리는 ‘이리 와, 이나리.’ 하는 강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아무런 파장도 느껴지지 않고 총구도 내려놓은 채로 그가 손짓했다. 머리 위에서 박쥐들이 까득까득 괴기한 소리를 내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가이딩에 사로잡혀 정신없던 것은 어느새 잊고 나리는 강의 머리 위에 쉴드를 겹겹이 둘렀다. 그러고는 주환의 팔 안에서 몸을 일으켜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요.”

주환은 가만히 나리를 올려다보았다.

미치겠네.

주환은 총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켜 나리의 허리를 감싸 안아 올렸다.

“에?”

그러고는 공주님처럼 안아 들고 나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남자한테 함부로 그런 말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말, 이 뭡니까?”

나리가 두 눈을 토끼처럼 뜨고 주환을 쳐다보았다.

“입조심하십시오. 이 중사.”

입조심하지 않으면 입술을 삼켜 버리겠다고 들리는 건 왤까. 주환의 눈빛과 말투에서 짙은 질투가 느껴졌다. 나리는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환을 쳐다보았다.

“최강 대령한테 마음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에?

내가, 저 집착광공 싸가지 최 대령님을? 그러니까 내가 저 남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최강이 최, 최애캐이긴 했습니다만.

10년 동안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서 눈에 씐 콩깍지가 다 벗겨지고, 요……만큼 남은 팬심까지 새카맣게 볶아졌는데. 어떻게 최강을 남자로 좋아하겠습니까? 저 그런 변태는 아니에요!

……하고 버럭 소리칠 뻔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런 거 아니라고 반박할 틈도 없었다. 그저 이 요망한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새삼 억울한 표정을 한 나리가 강 앞에 배달되었다.

팔짱을 끼고 서 있던 강이 나리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리는 빼죽 나온 주둥이를 삐죽거리며 시선을 땅바닥에 꽂고 우물쭈물하다가 슬쩍 강을 올려다보았다.

최 대령님.

생각해 보니 제가 조금 이상하게 들리게 말했지만, 저 그런 사람 아닌 거 아시죠? 작전상으로 말한 거로 잘 알아들으셨죠?

“……뭘 잘했다고 쳐다봐?”

역시, 잘 알아들으신 것 같다. 어후, 괜한 걱정 할 뻔했다고 안심해도 되는데 왠지 모르게 찝찝하고 짜증 나고…….

“잘못한 게 없으니 잘한 거지 말입니다.”

“뭐?”

나리는 무심코 옹알거리며 대들었다가 입술을 꾹 말았다. 맞잡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재빠르게 1초 정도 강의 눈치를 보고 안 본 척 부동자세다.

“허!”

강이 혀를 차며 주환과 나리를 쏘아보았다.

이러다 한 대 맞을 것 같았다. 나리는 그간 경험에서 우러나온 느낌적인 느낌에, 손을 들어 제 입을 톡 때렸다.

큼. 방금 말 취소, 요…….

나리는 아주 가벼운 셀프 응징을 하고는 없던 일처럼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주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면, 주환은 대놓고 이글이글 질투심을 태우고 있었다. 절대로 저 미친놈에게 나리의 곁을 내어 주지 않겠다는 듯이 나리의 자그마한 머리를 제 가슴 속에 묻고 눈을 치켜세우면서 말이다.

페어가 아주…… 지지리도 말 안 듣는다. 저 둘은 몬스터가 우글대는 곳에서 대체 뭐 하자는 건지.

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로 삐딱하게 서서 주환에게 물었다.

“박 소령. 발전기 고칠 줄 알아?”

주환도 강의 눈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부대 내에서 발전기와 친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능력자 군인이 맡은 본분을 수행하기도 바쁜데 발전기까지 뚝딱 고치는 재주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 이거 어떻게 고칩니까?”

나리가 망연자실하게 물었다. 강은 발전기를 노려보며 당연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잘.”

셋이서 잘, 고쳐야지 어쩌겠어.

❖ ❖ ❖

“연장이 필요한데.”

파장에 브레이크를 걸고 일반인 코스프레 중인 강이 주환을 쳐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오른쪽 어깨 부상에 기력 소진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나리도 주환을 쳐다보았다.

“…….”

……난가?

남들보다 월등한 신장과 바다처럼 넓은 어깨, 지구도 거뜬히 들 것같이 우람한 상체와 팔뚝을 가진 듬직한 A급 가이드님은, 몬스터가 뜯어 삼키려고 해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쉴드 어빌리티 이용자였다.

나네…….

공포 영화보다 긴장감 넘치는 이 어둠 속에서 몬스터가 득실대는 벙커 안을 안전하게 돌아다니며 연장을 찾아올 사람은 주환밖에 없었다.

영웅이 될 절호의 기회를 거머쥔 주인공, 박주환은 보이지 않는 손에 등 떠밀리는 심정으로 총을 들었다.

“갔다 오겠습니다.”

“어. 갔다 와.”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강과 나리는 자세를 낮추고 속삭이면서 주환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주환이 나리의 쉴드 막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분위기는 더 어색해졌다.

꿀꺽.

나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강을 돌아보았다.

강은 통신 전파가 있는 곳에 서서 발전기를 고칠 방도를 찾고 있었다.

나리는 강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니 너무 신경 쓰였다.

가이드 없이 에스퍼 둘이 붙어 있으니 당연한 거였지만 주환에게서 들은 말이 있어서 그런지 전보다 더더욱 신경 쓰였다.

강에게 마음이 있는 거 아니냐는 주환의 말에 반박도 못 하고 넘어갔는데, 혹시나 강이 오해하지는 않을까.

나리는 강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암만 생각해도 뭐라 한마디 할 거 같은데 조용했다.

강력한 솔로 부대 파인 강이 자신의 플러팅을 그냥 넘어가는 이유는, 굳이 입 열어 말하기 귀찮다, 아니면 괜찮다, 알았다, 오케이…… 뭐 이런 뜻이긴 한데.

주환과 일한이 자신을 꼬시는 건 안 되고, 내가 일한을 만지는 것도 안 되고 주환이랑 같이 있어도 안 되는데, 내가 최강에게 꼬시는 말을 하는 건 된다고? 그건…….

이, 이상하잖아.

나리는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원작부터 차근차근 곱씹어 보았다. 그런데 앞부분의 대략적인 줄거리 외에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원작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해도, 원래 착하고 챙겨 주기 좋아하는 일한은 그렇다 치고, 강이 갑자기 이상해진 이유가 설마, 나 때무…… 우웩!

거기까지 생각하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지끈거리고 속이 메슥거렸다. 나리는 헉헉 가쁜 숨을 내쉬며 현실을 부정했다.

“하아, 아니야, 아니야. 빨리 ‘멸, 집, 세’를 구해야지. 이러다 내가 죽겠어…….”

답답한 나머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이 나왔는데 귀가 좋은 에스퍼가 물었다.

“그게 뭔데?”

강이 나리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와서 털썩 앉았다. 나리는 화들짝 놀라 반대편으로 엉덩이를 밀면서 어버버 둘러댔다.

“아, 그, 그런 게 있습니다.”

“……?”

강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리를 쏘아보자 나리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쭈뼛거리며 강을 피했다.

“이나리.”

“네. 중사 이, 나, 리.”

“왜 자꾸 피해. 네가 네 옆에 있으라며.”

“이렇게 가까이 붙으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만…….”

됐고.

“방금 그게 뭔데 못 구하면 죽는단 소릴 해?”

나리는 제 어깨에 바싹 붙어서 저를 쳐다보는 강의 얼굴에 대고 ‘대령님 나오는 원작 bl소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요.’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인터넷 소설……입니다.”

“…….”

“…….”

긴 정적이 흘렀다.

강은 너 제정신이냐는 투로 나리를 쳐다보았다.

나리는 죄 많은 입술을 꾹 말아 물고 자신의 멍청한 머리를 원망했다. 그동안 줄곧 반성하고도 나아진 것이 없다니.

나리는 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지금 어깨 부상이라 머리 박는 거 말고…….”

“야.”

“네…….”

나리는 얼른 한 손을 들어 가드를 올렸다. 울먹울먹 소심한 목소리가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너는 내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머리 위에서 몬스터가 언제 쉴드가 걷히는지 노려보고 있는 중이고. 제 상관이신 대령님께서는 저 빌어먹을 발전기 어떻게 고치나, 잘 터지지도 않는 전파로 방도를 찾고 있는 중인데. 부하 녀석은 어깨랑 팔도 못 쓰는 주제에 뇌도 없고 눈치도 없이 소설 뒷얘기나 생각하고 있고, 정말, 정말, 죄, 으읍읍.”

바짝 엎드려서 속사포로 랩을 하는 나리의 입을 강이 막았다.

박쥐들이 나리와 강 쪽으로 푸드덕푸드덕 날아다니며 쉴드에 퉁퉁 부딪혔다. 입 냄새가 독가스급인 몬스터라 두 에스퍼는 숨을 참았다.

[목소리 낮춰.]

코앞까지 좁혀진 강과의 거리에 나리는 머리가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강의 까만 눈동자 옆으로 반짝거리는 상태창이 빨갛게 변했다.

147/94 급격한 심박 수 상승.

그게 누구의 심박 수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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