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내가 바라던 일은 거창하지 않다
나리와 주환이 강의 집무실로 들어가니 일한도 있었다. 그도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투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강은 창밖을 보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햇빛을 등지고 선 그의 날카로운 인상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폭탄선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비장해 보였다.
“기자 회견을 할 거다.”
“예?”
“뭐어?”
“…….”
폭탄이 투하되었다. 나리는 제 귀를 의심하며 좌 주환과 우 일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남자도 이게 웬 말이냐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보다.
“기, 기자 회견을 하시면 대령님께서 잘하시면 되는 일이죠. 그런데 저를 왜…….”
나리가 고개를 기울이며 동그랗게 뜬 큼직한 눈을 끔벅거렸다. 강은 당연하단 듯이 나리를 가리켰다.
“너도 할 거야.”
“저도요?”
“이 중사, C12 때에 있었고, C11 작전의 센터잖나?”
“…….”
나리는 천장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 너머 어디쯤 있을 것 같은 작가에게 따지고 싶었다.
아니,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이름도 없는 엑스트라에게 이렇게 카메라를 들이미는 일이 생겨도 되는 거냐고요!
나리는 이러다가 원작의 원본을 구하기도 전에 자신이 수습할 방도가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세, 센터는 센터인데 팀장님을 두고 제가 어찌…….”
“죄송하지만, 전 제 상관께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리와 주환이 강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발뺌부터 했다.
반면, 일한은 턱을 괴고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나쁘지 않았다. 강이 매번 앞뒤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진행하는 면이 있었지만, 강이 아무 생각도 없이 기자 회견을 하자는 것은 아닐 터였다.
일한은 바로 책상 위에 컴퓨터 화면을 띄웠다.
“기자 회견의 모든 질문을 받아 주기엔 준비할 시간이 없어. 네가 상부에 하고 싶은 말을 하기만 하면 돼. 몇몇 중소 채널이 생방송으로 내보내겠다고 해 준다면 이쪽에 더 유리할 거고.”
강도 일한의 생각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헐……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나리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 잡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나리는 이 스토리에서 이름도 모를 평범한 엑스트라이길 바랐다. 군 상부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관심 없었다.
C12에서 흙아귀에게 삼켜졌던 일, C11의 작전에서 센터 역할을 맡게 된 일, 모두 나리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
내가 바라던 일은…….
나리는 우두커니 서서 부산히 움직이는 일한과 진중하게 의견을 내비치는 강, 묵묵히 듣고 있다가 이의를 제기하는 주환을 바라보았다.
나리의 바람은 저렇게 거창하지 않았다.
한두 발자국 뒤에 서서, 일한이 아프지 않은 것, 강이 가이딩을 받고 성질 좀 죽여 주는 것, 주환과 새로운 것들을 하나하나 나눠 보는 것.
그렇게 소소하게 행복하다가 아프지 않게 죽는 것.
조금 더 욕심내서 전역 후 한 번도 가 본 적 없던 세상을 눈에 담고, 가슴에 품어 보는 것.
“이나리 중사.”
나리는 딴생각을 하다가 퍼뜩 눈을 들었다.
“……한다. 이렇게 말할 건데, 괜찮겠어?”
강이 물었다. 일한과 주환도 나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리는 한두 발짝 뒷걸음쳤다. 바르르 떨리는 손을 꼭 쥐었다. 손바닥에 두껍게 박인 굳은살, 제 가슴과 어깨에 달린 견장, 그리고 고된 훈련과 작전을 겪고 단 배지들이 보였다.
괜찮아야 한다.
다른 대답을 듣고 싶어서 묻는 게 아니니까.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말해야 한다.
빙의하고 나서부터 죽을 뻔했던 그 고비들을, 하늘을 원망할 수밖에 없던 그 개고생을, 못 죽어서 악바리로 버텼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C11 작전은 별거 아니었다.
“……모르겠습니다.”
나리는 얼빠진 바보처럼 대답했다. 작전 개시를 바로 코앞에 두고 나리가 시원치 않게 대꾸하자 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허, 혀를 찼다.
“유 소령님도 없으시고, 최 대령님은 후방에 계신데……. 저 많은 몬스터를…… 저와 박 소령님의 쉴드로 밀고 들어가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시뮬레이션에는 항상 새로운 변수가 튀어나오고, 그 예상값 중에 내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이렇게 공표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주환은 조용히 시선을 내리고 일한은 착잡하게 한숨을 쉬었다.
내일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모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매 순간 죽기 살기로 뛰어든 여덟 번의 시뮬레이션이었다. 그중 실패는 세 번, 중단 한 번, 성공은 가까스로 네 번.
10년 동안 했던 작전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예상할 수 없는 변수들과 맡은 역할로 나리의 심적 부담이 가장 컸다.
강이 창가에 기댄 몸을 떼고 말했다.
“모르긴 뭘 몰라? 넌 하던 대로 해. 수습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누가 말해도 듬직했을 대사인데, 강이 말하니까 세상에서 제일 섬뜩한 소리가 되었다.
뜨, 뜨아아……. 나리는 허옇게 질린 채로 일한을 쳐다보았다. 제발 일한이 강을 말려 주기를 바라면서.
아니, 주환을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강을 막아 달라고. 카메라 앞에서 성공률 반반의 모 아니면 도인 작전으로 전 국민이 희망을 베팅하지 않게 해 달라고.
“뭐 해. 이 중사.”
강이 나리에게 까닥까닥 손짓했다.
“안 따라와?”
“……갑니다.”
대령님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지. 어쩌겠나.
끼잉. 나리는 귀를 축 늘어트리고 비척비척 폭풍 속으로 들어가는 강을 뒤따랐다.
❖ ❖ ❖
“국내 최초 SS급 가이드로 발현된 것은 언제 아셨습니까?”
“황에덴 생도! 현재 육군 사관 학교 생도로 특수 연대에서 훈련 중인 이유가 최강 대령과 페어로 활동하기 위해서입니까? 혹시 그 외의 매칭 테스트를 받으셨습니까?”
“황에덴 생도! 최강 대령과의 C12 구역 모의 훈련은 어땠습니까?”
“황에덴 생도! 최강 대령과 매칭 테스트…….”
질문들이 끝없이 쇄도했다.
장 소령의 옆에 선 에덴은 활짝 웃었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반짝 내리는 한낮의 햇살과 여기저기서 터지는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탄산음료처럼 시원했다.
에덴은 이 장면을 보고 있을 이복형제들과 강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서 입이 찢어져라 웃을 수 있었다.
“가이드로 발현된 건 6개월 전이었습니다. 그동안 이능력자 연구소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요.”
에덴의 답변이 끝나기도 전에 기자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흔들고 마이크를 가까이 내밀었다.
사람들이 앞으로 쏠리자 장 소령과 그 옆에 있던 군인들이 기자들을 뒤로 물렸다. 그럼에도 터진 봇물처럼 질문들이 몰려들었다.
“최강 대령과 매칭되면, 현재 페어인 유일한 소령은 어떻게 되는지…….”
“올 3월에 사관 학교에 입학하셨는데 훈련을 특수 부대에서 받게 되면, 앞으로의 특수 연대 작전에도 계속 참전하시는 겁니까?”
백지장처럼 색소가 옅고 왜소한 아이는 구름옷을 입은 천사처럼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하게 대답했다.
“매칭 테스트는 안 받았습니다. 받을 필요가 없거든요. 모든 에스퍼의 파장을 100프로 조절할 수 있으니 SS급인 거잖아요?”
“아…….”
쏟아지던 질문들이 뚝 끊겼다. 3초 정도 멍하니 굳은 사람들의 표정이 풀리며 특종을 실시간으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제 능력을 발전시켜, 실향민들의 삶의 터전을 하루빨리 회복하는 데 기여하겠습니다. 또한 파장의 부작용으로 고생하시는 에스퍼분들을 돕겠습니다.”
멀리서 그 인터뷰를 듣고 있던 강은 코웃음을 쳤다.
“차기 대통령 납셨군. 황현균 대통령 지지도 오르는 소리가 아주 잘 들려.”
프로 깽판러, 최강은 사람들의 헛된 꿈과 희망을 짓밟기 위해 성큼성큼 긴 다리를 옮겼다.
“이 중사.”
“네! 중사 이나리.”
“어깨 펴라.”
강이 나리의 날개 뼈 사이를 콕 찔렀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인 양 구슬프게 걷고 있던 나리의 등이 버튼을 누른 것처럼 대쪽같이 펴졌다.
“네! 폈습니다.”
“군인답게 당당하게 걸어.”
“네! 군인답게, 당당하게! 하나, 둘, 셋, 넷!”
나리는 장난감 병정처럼 똑딱똑딱 팔다리를 크게 움직이며 군가까지 불렀다. 강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좌 주환, 우 일한은 나리를 불쌍하게 쳐다보았다.
검문소에 가까워지자 에덴을 둘러싸고 있던 기자들이 강을 발견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최, 최강 대령이다!”
그 한마디에 기자들은 강이 있는 쪽으로 카메라를 돌리고 달려들었다.
난데없는 강의 등장에 에덴과 장 소령도 고개를 돌렸다. 강뿐만이 아니었다. 나리와 일한까지 보이자 그들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군사 구역에 촬영 허가 누가 내 준 겁니까. 장 소령입니까?”
강이 물었다. 장 소령은 큼큼 고개를 돌리며 에덴을 자신의 뒤로 세웠다.
“아, 예. 그…… 연대장님 그게 말입니다. 오늘 아침 상부에서…….”
“됐고.”
강은 장 소령의 말을 끊고 제일 앞에 선 용감한 기자의 카메라를 노려보며 물었다.
“기자 회견 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않겠습니까? 얘 퇴교시키라고 했더니, 왜 여기서 얘랑 내가 페어네 어쩌네 지껄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