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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47)화 (4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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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 이 중사는 가이딩을 제대로 받기 싫습니까?

눈앞을 가린 캄캄한 어둠이 마구 뒤흔들리고,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피부에 와 닿았다.

나리는 에덴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아아, 내 팔자야.

꿈에 강이 나오더니만, 일진이 최악이었다.

나리는 죽기 살기로 마지막 한 줌의 파장까지 끌어냈다. 콧속이 비리고 마른 목구멍에서 쇠 맛이 나고 있는 상태였다. 사이코패스지만 SS급 가이드라 그런가, 에덴을 끌어안고 있으니 속은 느글거려도 머릿속은 가벼웠다.

“야! 이! 뭐야! 놔!”

에덴이 나리를 떼어 놓으려고 발버둥 쳤다.

“가만히 있어. 5분 안에 끝나니까.”

나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몸이 훅, 가라앉았다.

“꺄아악!”

에덴은 비명을 질렀다. 나리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쉴드를 둘렀다. 작은 구형의 쉴드 안에 부유 어빌리티로 추락의 충격을 최소화하려 했다.

한계 돌파까지 5분 남았다고 했었다. 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쥐어짜더라도 1000m쯤이야 금방 떨어지겠지. 살집이 큰 대형 흙아귀의 위 속에 있으니 충격이 덜할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눈이 부셨다.

한 줄기 하얀 빛줄기가 어둠을 가른다. 나리는 눈을 찌푸리며 빛을 향해 몸을 돌렸다. 흐릿한 인영이 어둠을 베어 내고 손을 뻗었다.

“이나리!”

강이다.

병 주고 약 주고, 사람 미치게 만드는 악몽 같은 상사의 목소리에 왜 ‘이제 살았다’라는 안도감이 드는 걸까.

붉게 젖은 손이 나리의 쉴드에 닿았다. 나리도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콰과가아아아!

그녀가 쉴드를 걷어 내는 순간, 땅과 하늘이 뒤흔들리며 C12 구역의 옛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파묻히고 말았다.

❖ ❖ ❖

[10일 오후 1시경, 신서울에서 발생한 진도 5.2의 지진의 진원지가 C12 구역으로 확인되었습니다.

C12 구역은 구 경기도 연천군 근방이며 지하 몬스터 중에서 가장 퇴치가 까다롭다는 흙아귀의 최대 서식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번 지진에 대해 군과 연구 기관의 대대적인 조사가 있을 것이라며,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더욱 힘쓸 것이라…….]

삑.

주환은 뉴스를 껐다.

“……박 소령님, 왜 끄십니까? 저 듣고 있었는데요.”

“별 내용 없습니다. 그만 주무십시오. 이 중사.”

나리는 안대를 찬 채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나리도 모르는 사이에 흙아귀의 위액과 산성 가스에 각막이 손상되었다며 군의관은 눈이 더 따끔따끔해지는 안약을 들이붓고 안대를 돌돌 감아 뒀다.

그래서 나리는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배고파요…….”

나리가 힘없이 투정을 부리며 잠들기를 거부했다.

“파장을 너무 많이 뺏겼더니 배고파서 잠이 안 와요.”

“아까 유 소령이 사 온 도시락 세트 다 먹지 않았습니까? 수면제도 먹었으니 곧 잠이 올 겁니다.”

그, 그랬었나?

한참 전에 먹은 거 같은데?

눈이 보이지 않으니 배꼽시계만이 시간을 알려 준다.

“음…… 야식 먹을 시간 아닌가요?”

“아닙니다. 아까 약 먹고 나서 30분밖에 안 지났습니다.”

“그럼, 후식이라도…….”

나리의 워치 기록을 살피던 주환이 우뚝 멈춰 서 나리를 돌아보았다.

창밖으로 새는 아침 햇살이 주환의 굳은 얼굴 위로 내렸다.

나리는 주환의 목소리가 들렸던 곳을 손으로 더듬었다. 아까 이쯤에 주환의 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시트 위에서는 차갑게 식은 온기만 느껴졌다.

“박주환 소령님?”

인기척도 있고 가이딩도 느껴지는데 주환은 어디에서 뭘 하는 걸까.

“후식 가지러 가셨습니까?”

나리가 짓궂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듯한 시선만 느껴졌다. 주환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뻘쭘해진 나리는 손으로 뺨을 긁으며 주환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까 먹다가 뭐 묻었나…….”

주환은 나리의 워치를 내려놓고 나리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도 내가 이런 사람인지 몰랐는데…….”

낮게 잠긴 주환의 목소리가 발치에서 왼쪽으로 돌아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주환은 얼굴을 긁적이는 나리의 손을 잡아 내리더니 그녀를 침대 위로 쓰러트렸다.

“내가 좀 질투가 많나 봅니다.”

시원한 숲속에서 나는 향이 가이딩에 실려 왔다.

나리는 그 신기한 감각을 따라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새는 기분 좋은 가이딩이 잡힐 듯 말 듯 흐르다가 주환의 코끝과 입술이 손에 닿았다.

“웃지 마시죠. 난 지금 꽤 기분 나쁘니까.”

“아. 죄, 죄송합니다.”

나리는 황급히 손을 뗐다.

귀하디귀한 페어 가이드님께 큰 걱정을 끼치고, 푹 쉬어야 할 주말에 생고생을 겪게 해서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제가 가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안 그랬으면 황에덴 생도가 크게 다쳤을 겁니다.”

“…….”

“저어, 황에덴 생도는 괜찮습니까? 황 대통령님 막내딸이라고 들었는데,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면 우리 연대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황에덴 생도는 괜찮습니다.”

“아, 다행입니다.”

애써 웃는 나리의 입매가 우물쭈물 말리더니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최 대령님과 유 소령님도 괜찮습니까?’

물어보고 싶었다. 두 사람이 너무나도 신경 쓰여서 잠이 안 왔다.

하지만 그만큼 주환도 신경 쓰였다. 가이딩한다며 맞잡았던 그의 손이 바위같이 차가웠고, 자신을 부축해 주는 손길도 그저 딱딱하게 할 일만 하고는 멀리 떨어져 버렸으니까.

“왜 날 안 불렀습니까?”

“죄송합니다. 상황이 매우 급하여…….”

“전날 코피까지 흘리면서 파장이 불안정했었던 건 기억이 안 납니까? 다른 가이드 있으니까 버틸 만하겠지. 그렇게 혼자 판단하고 몬스터 경계 구역으로 갈 거면, 내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나리는 주환의 팔 안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하고 연신 사과만 해야 했다.

“아직 페어로 움직여야 한다는 게 익숙하지 않아 미숙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죄송…….”

“익숙하지 않다, 라.”

주환은 인상을 찌푸렸다.

“10년 동안 같이 뛴 팀이 더 익숙하다는 건 알지만, 이제부터는 페어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나리 에스퍼.”

“노, 노력하겠습니다…….”

“대답에 자신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시정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닷!”

나리는 잽싸게 큰 소리로 외쳤다. 대답은 자신 있게 잘하면서, 왜 사람 말을 듣지 않는 건가. 주환은 무덤덤하게 되물었다.

“무엇을 어떻게 노력하실 겁니까?”

아, 그러니까…….

물러서지 않는 주환의 질문에 나리는 점점 얼굴이 달아올랐다.

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은데, 그 정답을 알고 있어도 입 밖으로 내보내기가 부끄러웠다.

“매일매일 박주환 소령님께 가이딩……을 받겠습니다.”

안 그래도 얼굴이 홧홧한데, 주환은 그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나리만 쳐다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리고? 또?

나리는 입술을 짓씹으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서로에게 익숙해지려면 시간만이 답일 터. 지금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붙어 있건만 뭘 더 바라는 걸까?

머리를 굴리던 나리가 입매를 물결 모양으로 만들며 삐죽빼죽했다.

“숙실 내 설거지와 청소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빨래도…….”

“아니, 그거 말고 있지 않습니까.”

“이거 말고……요?”

“예.”

“…….”

나리는 두 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종일 붙어 있게 된 페어 가이드와 더 해야 할 것이라고는 진도 나가기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해란이 손주를 바라는 시어머니처럼 닦달하고 있던 터라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한데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크흠! 그, 그거 말고 그…… 그건 아직 제가 좀…… 마음의 준비…… 아니, 요, 용기가 부족하지 말입니다!”

“예?”

굉장히 부끄러워하면서 새빨개진 나리 때문에 주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쉬운 질문인데,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윽.

나리는 흠칫 어깨를 떨더니 몸을 돌려 쥐구멍에 숨는 것처럼 웅크렸다. 주환은 입꼬리를 올리며 나리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 중사.”

“예. 중사, 이나리…….”

“저한테 제때제때 연락하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아닙니다. 앞으로는 꼭 제때제때 연락하겠습니다.”

“가만히 보면, 이 중사는 제 말은 잘 듣지 않고 자꾸 딴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 아닙니다!”

“아니긴. 분명하게 봤습니다. 딴생각만 하는 거.”

주환은 상체를 숙여 얄미운 나리의 뒤통수에 살짝 입을 맞췄다.

“가이딩, 제대로 받기 싫습니까?”

“…….”

나리는 시트를 움켜쥐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긴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새빨간 귀 끝과 붉게 익은 입술이 드러났다.

“가이딩받는 게 싫지 않습니다만…….”

“그러면 이 중사는 가이드가 누구든 다 좋은 겁니까?”

“……!”

나리는 숨을 멈췄다. 남들처럼 가볍게 넘겨 버리고 싶었던 진실을 마주하자 커다란 비수를 꽂은 듯이 가슴이 지끈거렸다.

누구나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닿기만 해도 혹할 정도로 심장이 뛰는 건 주환이 처음이었고, 일한은 다치지 않게 지켜 주고 싶은 좋은 상사이자 매력적이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닙니다.”

나리는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 쪽으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되도록 후회가 적은 선택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

“누굴 선택하든지 후회가 들고 가슴이 아플 거라면, 그 아픔을 이겨 낼 수 있을 정도의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후회 없는 답변을 드릴 수 있게 제게 시간을 주세요. 그때까지 박 소령님과 유 소령님, 두 분께 적정선 이상의 가이딩을 부탁드릴 수가 없을 거 같아요. 저도 가이딩받을 때 기분이 좋긴 하지만, 받고 나면 부담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거든요.”

눈을 다쳐서 다행이었다.

이런 말, 주환의 눈을 보고 할 용기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유 소령 말이, 이 중사 상태가 심각하다고 하는데.”

“으음, 1년 정도……?”

주환은 혀를 찼다.

허. 썸만 타다가 죽겠다는 건가?

같이 살면서 1년이나 기다리라니, 못 할 짓이 아닌가.

주환은 대놓고 제 앞에서 도발하던 일한이 무슨 심정인지 조금은 알 거 같았다. 일한이 선한 얼굴을 벗어 버린 것처럼 주환도 일일이 챙겼던 매너를 놓아 버렸다.

“1년이나 기다릴 바에야.”

주환은 삐죽빼죽 도망갈 생각만 하는 앙큼한 머리를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 중사가 나한테 더 부담스러워하고 미안해하는 게 낫겠습니다.”

화한 숨결이 나리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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