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은 필요없어 (38)화 (38/148)

039. 저, 가이딩 좀……

“안 가?”

“예! 가, 갑니다!”

알코올로 빨개진 나리의 얼굴색이 허옇게 질리더니 삐거덕삐거덕 조심스럽게 문에 워치를 갖다 댔다.

[본인 인증 완료. 생체 인증을 해 주십시오.]

현관문에 달린 카메라가 반짝거리며 나리의 얼굴을 찾았지만 나리는 자꾸 등 뒤를 흘끔거리며 강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삐빅.

[생체 인증 실패. 다시 시도해 주십시오. 카메라 앞 전방 60cm 내 거리에서 3초간 정면을 응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저 먼저 들어가도 됩니까? 이 각도, 엉덩이 걷어차이기 딱 좋은 각도인데…….”

“…….”

“머리 박아요? 아니면 토끼뜀이라도 뛸까요?”

“왜, 네 숙실 안으로 이동시켜 줘?”

“아, 아닙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리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나리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강은 한참 동안 나리 쪽을 쳐다보았다. 나리도 현관문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감지 어빌리티를 최대치로 끌어 올리고 강의 인기척을 살폈다.

강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나리도 착 달라붙어 있던 현관문에서 떨어졌다.

삐빅, 철컥…….

강의 숙실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리는 파장을 거두고 가슴을 쓸었다.

쿵쿵…… 쿵…….

바짝 긴장했던 심장 부근이 지끈거렸다. 숙취는 아니고, 왜 이렇게 조이고 아프지? 주환이 나타나고 나서부터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나리는 미간을 좁히며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물을 꽤 마셨는데도 속은 진정되지 않았다. 주방 캐비닛과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약봉지를 꺼냈다.

협심증이 올 때마다 먹었던 약이었다.

술 마셨는데 지금 먹어도 되려나? 나도 이제 페어가 있으니까, 파장 때문은 아닌 거 같고……. 소화제를 먹어야 하나?

“하아…….”

오늘 너무 신경 써서 그래. 좀 쉬면 괜찮아지겠지.

나리는 한숨을 늘어뜨리고 방으로 들어가 제 침대에 풀썩 몸을 눕혔다. 허리를 들어 대충 치마를 벗고 셔츠 속에 손을 넣어 갑갑한 브래지어 호크를 풀었다.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빨래해야 하는데…….”

침대가 핑글핑글 도는 거 같고, 심장은 제멋대로 펄떡펄떡 뛰어 아팠다.

“아으으, 나 늙었나……? 이제 술도 안 받나 봐. 내일 의무실에 가서 검진받아야 하나? 하아, 그보다…….”

온갖 말이 중얼중얼 나와도 머릿속에는 한 단어만이 맹렬하게 맴돌고 있었다.

“가이딩…….”

술 탓도 아니고, 약으로 해결할 것도 아니었다.

나리는 워치를 툭 건드렸다.

“소령님……. 어디 계세요?”

❖ ❖ ❖

“나리 중사?”

나리에게 걸려 온 전화에 일한은 계산서에 사인을 하다 말고 멈췄다.

강이 꼴사납게 웩웩거리고 있다고 나리가 SOS를 치기에 천벌 받을 페어 녀석을 수습하러 가려던 중이었는데.

“왜 그래요? 강이 때문에 그래요? 나 지금 가요. 강이 거기 놔두고 나리 중사는 숙실로 가요.”

- 저, 가이딩 좀…….

쥐어짠 듯한 나리의 목소리에 일한은 저도 모르게 말이 거칠어졌다.

“아씨, 최강이 파장 쓰면서 지랄했어요? 지금 가요.”

주환이 일한의 팔을 잡았다.

“무슨 일입니까? 이 중사가 왜.”

너한테 전화를 하는데?

일한은 바쁘게 결제 완료 버튼을 누르고 주환을 쳐다보았다.

“페어 좌표 주십쇼.”

“무슨 일인지 먼저 대답부터 하시죠.”

주환이 순순히 나리의 위치를 알려 줄 리가 없었다. 일한은 주환에게서 돌아서서 나리에게 물었다.

“나리 중사, 지금 어딥니까? 숙사 밖이에요? 숙실? 아니면…….”

“이 중사, 무슨 일입니까?”

- 어? 왜……. 나 왜 코피가 나죠?

“코피?”

-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박 소령님도 있고, 저 잠도 잘 잤었는데요?

“…….”

일한은 고개를 모로 돌리고 주환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이번에 훈련받는 동안, 나리 중사에게 충분히 가이딩했습니까? 그러니까 훈련 끝나고 말입니다. 의무실은 안 갔었죠?”

주환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홱 돌렸다.

“제가 제대로 가이딩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

얘네 뭐야. 정말 미치겠네.

일한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삼켰다. 한껏 비튼 입꼬리로 조소하며 주환을 한심하게 올려다보더니 그대로 순간 이동 했다.

“유일한 소령?”

아차, 주환이 손을 뻗었을 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젠장!”

쾅!

주환은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빈 접시와 빈 술잔이 놓인 테이블 위에 나리가 놓고 간 쇼핑백이 보였다. 그 속에 있는 라이더 슈트와 화장품 몇 가지, 그리고 바이크 키.

주환은 나리가 놓고 간 쇼핑백과 키를 집어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가운 밤바람이 부글거리는 열기 위를 스쳐 지나갔다.

주환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지나가는 무인 택시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나리에게 통화를 걸었다.

“이 중사, 이 중사?”

마음은 급한데 택시는 느리고, 나리는 묵묵부답이었다.

❖ ❖ ❖

숙사 밖? 아니면 안?

나리의 위치를 알 수 없었지만 일한은 그저 감이 가는 대로 그녀의 방, 침대 위로 이동했다.

침대 위에 엎드린 채로 피를 닦아 내던 나리는 갑자기 훅 떨어진 미남 가이드님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기절할 뻔했다.

“유, 유, 유 소령님?”

“괜찮아요?”

일한은 나리의 손에 들린 붉은 휴지 뭉치를 보고 숨이 턱 막혔다. 그는 그대로 나리의 손목을 낚아채서 침대 위에 눕혔다.

“상태 좀 살펴볼게요.”

“에? 바, 박 소령님은 같이 안 오신 건가요?”

일한은 나리의 이마와 목에 손을 대며 파장을 재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왜 박 소령과 같이 와야 합니까? 나, 내가 좋아하는 여자한테 오면서 다른 남자 데려올 만큼 착한 놈 아닙니다.”

나리는 놀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 버렸다. 어둡게 가라앉은 일한의 눈에는 부드러운 온기가 하나도 없었다.

“파장이 엉망진창이네요. 전에 먹던 심장 약, 언제부터 끊었습니까?”

“매칭 테스트 받고 나서부터……요.”

“박주환이랑 안 잤죠?”

“예? 아, 그, 아직…….”

“훈련 후에 제대로 가이딩도 안 받았다고 했고, 오늘도 접촉 가이딩은 많이 안 한 거 같은데 페어가 반경 안에 없으니 불안정한 파장이 튀어나오는 건 당연한 겁니다.”

“아, 그렇군요.”

“아, 그렇군요?”

일한은 무섭게 말꼬리를 비틀었다.

“나리 중사.”

나리는 길게 뻗은 일한의 양팔 안에 갇혔다. 그의 넥타이 끝이 나리의 가슴께에 닿았고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웃음기 없이 굳은 표정은 시선을 뗄 수가 없이 오싹했다.

“페어가 있으면 뭐 합니까? 페어를 페어처럼 다루지 못하면 매일 의무실에서 가이딩받는 것보다도 못합니다. 지금 썸 탈 때입니까? 자기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몰라요?”

일한은 답답했다. 나리가 아무리 둔해도 그렇지, 다른 에스퍼 같으면 아무 가이드라도 잡고 한번 자 달라고 하거나 대형 사고를 쳤을 것이다.

속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끼니마다 소화제와 심장 약을 먹는 에스퍼한테 10년 만에 페어가 나타났다. 그런데 자신의 파장과 일치하는 가이드를 눈앞에 두고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있다고?

최강, 이나리.

너희 둘, 대체 왜 이래.

페어가 있는데, 그것도 상급 가이드가 앞에 있는데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구는 거냐고.

“어떻게 할래요?”

일한이 물었다.

“가이딩, 내가 해 줄까요?”

일한의 입에서 거부할 수 없는 다디단 유혹이 흘러나왔다. 그는 넥타이를 끌러 내리며 손만 잡을 가이딩이 아닐 거라는 뜻을 전했다.

“…….”

나리는 멍하니 일한을 올려다보며 입만 벙긋거렸다.

‘예’라고 해.

이게 그렇게 고민할 일인가?

“3초 안에 아무 대답 없으면 해 달라는 거로 알고 키스할 거야.”

내가 네 입술까지 최대한 천천히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야. 그리고 네가 충분히 ‘아니요’ 하고 날 멈출 수 있는 시간이야.

일한은 속으로 3초를 세며 나리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소령님.”

나리는 손을 들어 일한을 막았다. 사납게 뛰는 심장 소리가 자신의 것인 줄 알았는데, 하얀 와이셔츠 너머로 벅찬 그의 기대와 긴장감이 전해졌다.

“손만 잡아 주시면 안 될까요?”

“진통제만 받아서 못 고칠 병이라니까요.”

이도 저도 아닌 못마땅한 대답에 일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리는 뻐근한 자신의 심장 부근에 일한의 손을 대고 숨을 크게 들이켜며 두 눈을 감았다.

가슴을 관통하고 홍수처럼 밀려드는 가이딩이 온 신경을 타고 저릿하게 울리며 스며들었다.

긴장을 놓자마자 날뛰던 심장이 이제야 제 페이스를 찾아 움직였고, 답답하게 울렁이던 속이 뜨거워졌다.

“이 정도만 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요.”

엉킨 채로 단단하게 굳어 버린 나리의 파장이 생생히 느껴졌다. 이제는 나리 말만 곧이곧대로 들으며 착하게 넘어갈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저 혼자 이동해서 주환이 성을 내며 오고 있을 텐데, 멍청하게 알았다고 할 남자가 어디 있을까. 나리도 주환이 곧 올 것을 알고 임시방편으로 가이딩해 달라고 하는 거겠지.

일한은 두 손으로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색색 쇠한 숨을 내쉬는 나리의 동그란 이마를 쓸어 넘겼다.

“나리 중사가 괜찮다고 하는 말, 거짓말이잖아요. 모른 척 알았다고 넘기지 않을 거니까 확실하게 말해요. 나한테 지금 가이딩받을 건지, 아니면 박주환인지.”

“소령님, 제가요……. 약도 없고 가이딩받아도 낫지 않는다는 선택 장애라는 불치병도 앓고 있어서요.”

“저런.”

나리는 자신의 처지 좀 봐 달라며 일한의 손을 꼭 붙잡고 불쌍하게 훌쩍거렸다. 그런데도 일한은 냉담한 탄식을 내뱉으며 나리의 뺨과 턱을 쓸어내렸다.

“그 불치병도 제가 한번 고쳐 볼게요.”

일한은 나리가 더는 무르지 못하게 입을 맞췄다. 촉, 하고 닿은 입술을 잠시 떨어뜨리고 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시트 위에 흐트러진 나리의 머리카락에서 하얀 목선과 셔츠 자락 아래로 드러난 허벅지까지 훑어 내려갔다.

이 모습으로 손만 잡아 달라니, 말도 안 돼.

“…….”

일한의 날렵한 턱 선이 비틀어지더니 꾹 다물린 잇새를 비집어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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