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네가 사람 가리지 않고 이러니까, 내가 힘들다고
“히끕! 아닙니다! 딸꾹질 나오니까, 끅! 이, 이렇게 코를 막고 마시며언 댑니다.”
나리가 코를 잡고 술잔을 향해 팔을 쭉 뻗었다.
그런데 그녀의 맞은편에서 검은 인영이 나타나 아까운 술을 뺏어 가는 게 아닌가.
“……에?”
나리는 두 눈을 끔벅거리며 못된 방해꾼을 쳐다보았다.
“어라? 최 대령님?”
아…… 씹.
두근두근 기대감에 부풀었던 일한은 이를 갈고, 주환은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지금 몇 시야?”
강이 무섭게 쏘아 물었다. 나리는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워치를 톡톡 두드렸다.
“아앙, 우리 연대장님 시간 물으시러 여기까지 오셨구나. 딸꾹! 현재 시각, 히끅! 9시 15분을 알려 드립니당!”
나리는 헤실헤실 웃으며 손을 이마 위에 대고 경례했다. 강은 치솟는 화를 누르며 테이블 위에 있는 술병을 세기 시작했다.
저런 싸구려 술을 셋이서 10병이나 시켰어?
“이나리, 주말 부대 복귀 시간은?”
“부대 복귀 시간은, 딸꾹, 9시입니다!”
“지금 15분 늦은 거 같은데?”
“어머어머, 세상에나 벌써요?”
“벌써어? 너 바이크는 어떻게 운전해서 가려고 술을……!”
“에이.”
나리가 실실 웃으며 테이블 위로 기어 올라가 강의 손에 들린 술잔을 잡았다.
“운전은 문제없습돠! 여기 이렇게 흡, 안전하고 듬직한 순간 이동 에스퍼 님과 가이드님이 있지 말입니다아? 끅! 그러니까, 검문 없이 숙실로 스을쩍 이동하면 됩니다!”
강은 미간을 구겼다.
“뭐?”
안전하고, 듬직해?
누가? 내가……? 아니면 유일한이?
전에는 운전병 취급 하더니, 오늘은 배달원인 것 같다. 얼마나 마신 건지 감히 여기저기 옮겨 달라고 하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게 능구렁이 급이다.
심기 불편한 강이 빠득빠득 이를 갈며 술잔을 쥐자 잔 가득 채워진 술이 흘러넘쳤다.
“끅! 아, 아꿉게…….”
나리는 강의 손에 들린 술잔을 채 가려고 했다. 하지만 강이 순순히 술잔을 넘겨줄 리 없었다.
“여기서 더 마시면 죽을 줄 알아.”
“마시고 죽자는 구호가, 딸꾹! 괜히 있는 게 아니지 말입니다?”
“…….”
“어차피 히끅, 복귀 시간 늦어서 저 죽이려고 오신 거 아닙니까? 돈 아까우니 막잔은 끝내고 장렬히! 전사하겠습, 끕, 다아…….”
나리는 콧등을 잡은 채로 술잔에 입을 댔다. 넘실거리는 술을 호로롭 마시기 시작했다.
강은 어이가 없었다.
어디서 못 보던 짧은 치마를 입고 테이블 위에 무릎을 걸치고 올라온 것도 기함할 것 같은데, 끝까지 마시겠다고? 강은 나리의 이마를 잡고 술잔을 뺏었다.
“야.”
그러자 나리가 그의 손등 위에 왼손을 올리며 말했다.
“멍!”
‘왜!’
이건, 또, 뭔……. 너, 개…… 나리 됐냐?
강이 정색하며 굳어 버리자 나리는 자신을 왜 불렀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멍?”
“……뭐 하는 짓이야.”
“애교요.”
“…….”
“히잉. 왜 맨날 나 술 못 먹게 하는데요오! 왜앵! 내가 내 돈 내고 마시겠다는데? 최 대령님한테 받은 스트레스 어디에 풀라고요!”
“네가 사람 가리지 않고 이러니까, 내가 못 마시게 하는 거 아냐!”
“저도 사람 가리거든요오? 엄청 낯 가리거든요! 내가 모르는 사람이랑 언제, 어디서, 흥청망청 마셨어요? 아니 그리고, 내가 취하든 말든 대령님이 뭔 상관입니까! 제 보호자라도 되세요? 내 페어는 여기 있는데에?”
까맣고 촉촉한 눈동자를 굴리며 귀엽게 애교 떨던 포메라니안이 갑자기 왈왈 이빨을 세우는 광경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뭐야, 저 여자……. 치정 싸움?”
“군인인가 봐. 대령이라는데?”
귀가 좋은 강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소맥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역겨운 맛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도 너 때문에 무척 스트레스받거든.
“아아! 내 술!”
“이제 없어. 됐지? 이동한다.”
강은 나리의 팔을 붙잡고 훌쩍 사라져 버렸다.
“하, 나 참.”
“…….”
아씨, 최강…….
일한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주환도 말릴 틈 없이 폭풍처럼 지나간 광경에 머리를 짚고 주먹을 내리쳤다.
“최 대령님은 매번 이렇게 깽판 놓습니까?”
주환이 따지듯이 말꼬리를 비틀었다.
“예, 대체로 그렇죠. 예전에는 저를 데리고 도망쳤는데. 오늘은 대놓고 나리를 데리고 가 버리네요.”
일한은 워치로 강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주환의 잔에 남은 술을 따랐다.
“만만치 않죠?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겠어.”
“하아…….”
“박 소령도 꽤 고생하실 겁니다. 이거만 마시고 복귀합시다.”
“지금 술이 넘어갑니까? 최 대령이 뭔 짓을 할 줄 알고.”
“그 녀석이 뭔 짓 못 할 걸 아니까 마시고 가자는 겁니다.”
주환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따지려다가 지난밤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강이 나리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나리는 발작하듯이 거센 거부 반응을 일으켰었지.
“최 대령이 이 중사한테 다가갔을 때 왜…….”
쉿.
일한은 검지를 입술에 대더니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주위를 가리켰다.
“여긴 눈과 귀가 많습니다.”
“…….”
일한은 한숨을 푹 쉬며 의자 등받이에 푹 기대었다.
“박 소령, 나 좀 도와 달라는 말은 안 할 테니 방해만 하지 말아 줄래요? 안 그래도 최강이 맨날 방해한단 말이야.”
“싫습니다.”
“그래요. 그럼 나도 강처럼 깽판 칠 겁니다. 오늘부터 박 소령 방에서 같이 자야지.”
“허, 미친.”
어라? 너 갑자기 말이 짧다?
일한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이를 갈았다.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내가 박 소령을 어떻게 믿고 나리랑 같은 숙실 쓰게 해?”
일한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는 손짓을 하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주환은 받아칠 말을 찾지 못하고 일한을 노려보았다.
“앞으로 한 침대 쓸 사이인데, 그렇게 강렬하게 쳐다보면 곤란합니다. 박 소령님.”
일한은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감히, 네가, 내 데이트를 망쳤겠다?
두고 보라고.
나도 널 아주 망쳐 버릴 거니까.
❖ ❖ ❖
일한만 몰래 알고 있었던 나리의 주량은 소주 3병 정도. 주사는 안 취한 척 멀쩡하게 굴며 술 퍼 주기에서부터 별의별 말―대부분 강의 험담―을 헤실헤실 늘어놓기, 흥에 겨워 애교를 부리며 치근거리기였다.
주량 이상을 마셔도 나리의 필름은 끊긴 적이 없었다. 몇 번의 민망함과 흑역사를 간직한 나리는 자신의 주량을 철저하게 지키는 편이었다.
나리는 그런 자신이 너무나도 미웠다.
“윽.”
부대 안으로 이동하자마자 강은 나리를 놓아주더니 입을 틀어막은 채 벽을 붙잡고 욱욱거렸다. 나리는 그 모습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술이 고프다. 술이 고파아…….
아, 벌써 취기가 싹 가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부러라도 게임에서 질걸.
무작정 술을 뺏기고 순간 이동까지 당한 나리는 헛구역질을 하는 강에게 차마 따질 수가 없었다.
그에게 맞지도 않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켠 것도 모자라 일한의 가이딩이 없는 곳으로 도망쳤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바보.
나리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강의 등을 토닥였다.
“남의 술을 뺏어 먹어서 벌받은 거예요.”
“시끄러.”
내가 누구 때문에…….
“토하세요.”
강이 나리를 밀치며 저리 가라고 했지만 나리는 그 손을 피하면서 강의 등을 계속 두드렸다.
“가. 너도 냄새…….”
역한 냄새 맡으면 너도 토할 거잖아.
“으이그. 됐으니까 얼른 토하시라고요.”
나리는 혀를 차며 더 세게 강의 등을 두드렸다. 먼지가 팡팡 피어오르자 강은 솟구치는 토기보다 등허리가 아파서 기분이 나빠졌다.
“그……만……하라고.”
강이 나리의 손목을 낚아챘다.
두 뺨이 발그레한 나리의 얼굴이, 강아지 같은 천진한 두 눈동자가, 흘러내린 잔머리와 하얀 목선이 천천히, 그리고 너무나도 또렷하게 강의 눈에 박혔다.
그녀의 입술에 묻은 실험실 소독약 냄새 같은 술 냄새가 훅 코를 찔러 들었다. 역한 화학적인 맛과 끔찍한 향이 식도를 긁고 올라왔다.
내가 소주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강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돌리더니 벽을 잡고 울렁거리는 속을 게워 냈다. 나리는 숨을 참고 강의 등을 두드렸다.
물론, 그 와중에 대령님의 꼴사나운 모습을 찍어 일한에게 이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나리는 가만히 강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없이 물었다.
괜찮으냐고.
요즘에 왜 자꾸 대령님이 내 눈앞에 나타나는지 모르겠다고.
“하아.”
강이 벌게진 눈을 끔벅이며 한숨을 쉬었다.
부대로 데리고 오면 시간 좀 제때제때 지키라고 따끔하게 혼내려고 했는데……. 초조해하고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는데.
X발, 짜증 나.
강은 숙였던 상체를 일으켰다.
여전히 나리는 강의 말을 안 듣고 그의 곁에 있었다.
무섭게 굴어도, 못되게 굴어도.
이나리는 여전히 이나리였다.
나리는 강을 올려다보다가 주춤주춤 손을 거뒀다.
“어……. 마실 것 가지고 오겠습니다.”
“됐어. 가서 씻을 거야.”
“예예, 쉬십쇼.”
강은 휘청거리며 몇 발짝을 떼더니 다시 뒤돌아 와서는 나리의 손목을 잡았다.
“에?”
풀벌레 소리가 울리던 숙사 밖이 순식간에 숙실 문 앞으로 바뀌었다. 나리는 영문을 모른 채 제 손목을 잡은 강을 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들어가.”
강은 나리의 손을 놓고 말했다.
“아……. 예, 들어가십쇼.”
나리는 강에게 인사하고는 또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
“……?”
“너 먼저 들어가라고.”
맨날 인사도 씹고 훌쩍훌쩍 가던 분께서 왜 이러신담? 내가 술 마시고 복귀 시각 안 지켰다고 변덕…… 아니 신종 고문을 하는 건가?
안 그래도 까칠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눈매가 붉어서, 평소와 달리 불에 덴 것처럼 홧홧해서, 묘하고 이상한 파장 때문에 나리는 어찌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