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은 필요없어 (3)화 (3/148)

16642607714161.jpg

002. 폭발하면 개나리

이 세계관에서 인류의 15%는 에스퍼로 발현되고, 8%는 가이드로 발현된다고 했다. 초능력을 사용하는 에스퍼는 찾기 쉽지만, 에스퍼의 파장을 조절할 수 있는 가이드는 평소 일반인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찾기가 힘들다.

세계 정부는 대개 2차 성징과 함께 이능력이 발현되는 12세에서 16세까지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전부 이능력 검사를 실행했다. 물론 늦게 발현하는 때도 종종 있었다. 그래 봤자 20대 초반이었다.

자신의 파장과 매칭되는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들의 삶은 비관적이었다. 아무리 의무실에서 가이딩을 받는다고 해도 임시방편일 뿐, 효율은 미미했다. 몸과 정신은 초능력을 사용할수록 망가져서 결국엔 요절했다.

그게 폭주이든 임무 중 전사한 것이든 어쨌든 나리는 가늘고 길게 살기 위해서 초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다.

〈이나리 중사님과 매칭률 87%인 가이드를 찾았습니다.〉

〈에? 정말요?〉

그리고 그녀의 인생관은 기적처럼 매칭된 가이드가 나타났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이능력자 본부에서 온 행정관은 나리보다 더 흥분했는지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대단히 높은 수치예요. 매칭 테스트 하면 더 자세한 결괏값이 나오겠지만 수치가 올라갔으면 올랐지, 예상값 87%에서 내려가는 예는 별로 없습니다. 매칭 테스트 날짜는…… 2일 4시 어떻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그날 제가 늦게까지 임무라서…….〉

상대방에게 연락을 넣으려던 행정관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럼, 3일 오전 10시는요?〉

〈다음 날은 반년 만에 맞는 휴가라 부모님 뵙고 올 건데요.〉

〈그, 그러면…….〉

〈휴가 끝나고 난 뒤에 연락해도 되는 거죠? 급하시면 다른 에스퍼들과 먼저 매칭 테스트 하셔도 돼요.〉

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친 재킷을 입었다. 다른 에스퍼들은 좋아서 펄펄 뛸 소식인데 미련 없이 자리를 뜨려는 나리 때문에 행정관은 크게 당황했다.

〈잠깐만요, 이나리 중사님. 매칭 예상값이 높은 사람부터 테스트하는 게 규칙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가이드에게 연락하겠습니다.〉

나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잠갔다.

원체 무딘 성격이라 정신적인 문제는 그렇다 쳐도 몸이 점점 무너져 가는 것을 하루가 다르게 느끼고 있었다.

〈하하, 제가 낯을 많이 가려서 자만추를 지향하거든요. 제 마음이 준비되면 그분이랑 매칭 테스트 할게요.〉

〈이나리 중사님,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데 자만추를 따질 겨를이 어디 있습니까?〉

〈전 따집니다.〉

나리는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생긋 웃었다.

〈나라와 기관이 중매쟁이도 아니고 누구와 누구를 점수로 매겨서 운명이네 어쩌네 하는 게, 전 좀…… 불편합니다.〉

〈…….〉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리는 그때 기적같이 나타난 자신의 매칭 상대에 대한 정보를 집중해서 듣지 않았다.

만약에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면 어떻게 하나? 싸가지 최강 대령과 매칭되어서 싫은 소리 하나 못 하고―비뚤어진 나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같이 사는 일한을 보니, 페어 매칭이라는 시스템에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성별이 남자라는 것도, 이름이 박주환이라는 것도, 키는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우람하고 다부진 체격에 말끔하게 잘생긴 사람이라는 것,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건 그렇다 치고…….

소, 소령님이세요?

나리는 뜨악한 표정으로 굳어 있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 박주환 소령님, 저 그게 말이죠.”

“변명은 됐습니다. 1달 동안 연락을 기다렸는데, 직업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 없는 분과 억지로 일하는 건 저도 싫습니다.”

주환은 기분이 상했는지 홱 나가 버렸다.

“앗! 박 소령!”

당황한 일한이 주환을 말리려다가 잡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주저앉았다.

“하아, 나리 중사가 이해해 줘요. 박주환 소령이 좀 FM이라……. 일반인은 보통 임무에 나가기 힘든데, 박 소령은 가이드로 발현하기 전까지도 동해 해상 임무 뛰었던 녀석이에요.”

“…….”

“저쪽은 대대로 군인 집안이고, 아버지랑 남동생도 에스퍼라서 자신도 에스퍼로 발현되길 바랐을 겁니다.”

“…….”

“나리 중사?”

나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대답이 없자 일한은 고개를 틀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네. 중사 이……나리. 듣고 있습니다.”

코끝이 벌겋고 작은 목소리는 습했다.

“나리 중사, ……울어요?”

“아닙니다.”

아니긴. 이불을 움켜쥔 두 손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뭐라고 위로해 줘야 할까. 나리가 걱정된 일한은 그녀의 작은 어깨 위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

“유 소령님. 저, 책임감 있고 사명감도 있는 에스퍼입니다.”

일한은 제 손을 말아 쥐고 냉큼 맞장구를 쳤다.

“예. 제가 그건 잘 알죠.”

따뜻한 한마디에 긴장이 녹아내린 나리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흐윽, 최 대령님께서 맨날 저만 갈궈서 그렇지. 저 되게 열심히 합니다! 여태껏 목숨 걸고 최전방 뛰었다고요! 어? 대령님 부대원 중에서 제가 제일 대령님이랑 오래 있었습니다! 임무에서 죽으나, 퇴직해서 죽으나 시한부 1년 남았는데, 그동안 번 돈 쓰고 죽겠다는 게 그렇게 욕먹을 일이냐! 이 개씨키야아!”

쌓였던 감정이 이렇게 폭발할 줄은 전혀 몰랐지만.

“으아아! 나리 중사, 지, 진정해요! 수치 올라요!”

일한은 의무실을 뛰쳐나가려는 나리를 붙잡고 가이딩을 시도했다.

중사 이나리.

거꾸로 해도 이나리.

폭주하면 계급장이고 뭐고 상관없이 덤벼드는 미친개가 된다고 해서 개나리.

강이 그녀만 갈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초능력 사용 한계치로 인한 과부하 폭주가 아닌, 스트레스성 폭주라니. 하늘 같은 대령이 중사 눈치를 보며 부대를 이끌 수 없지 않은가.

SS급 최강의 파장도 막을 만큼 단단한 나리의 쉴드가 부대 전체로 퍼졌다.

의무실 안에 있던 물건들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나리의 머리카락과 일한의 발끝도 공중으로 떠올랐다.

큰일 났다!

팔을 잡는 것만으로는 나리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일한은 나리의 허리를 껴안고 가이딩했다. 위험하리만큼 날이 선 그녀의 파장을 잡아 다시 혈류 속에 넣고 부드럽게 흐르게 하자 허공에 떠올랐던 물건들이 투두둑 떨어졌다.

“후으……. 나리 중사, 진짜 A급 맞아요?”

아니면, 나리와 매칭률이 안 좋은 건가. 일한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반면에 따뜻하고 편안한 일한의 품에 안긴 나리는 봄 햇살을 쐬는 병아리처럼 평화로워졌다.

아, 좋다…….

이래서 최강 대령이 일한을 끔찍하게 잘 챙겨 주는 거구나. 유일한 소령님한테 해 주는 거의 반이라도 나한테 해 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중사.”

쫑긋. 불길한 기운을 듬뿍 담은 음산한 목소리에 나리가 고개를 들었다.

“…….”

좋기는. 개뿔.

“이나리, 너 남의 가이드한테 왜 자꾸 질척대지? 죽고 싶어?”

문 앞에 선 시커먼 저승사자가 눈에 광기를 띠며 물었다. 나리는 엉망진창이 된 의무실, 자신을 껴안고 있는 일한, 그리고 사태를 파악하고 재빠르게 순간 이동 한 강을 보고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뭘 하든 갈굴 테니까.

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성해 보이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뒷짐을 지었다.

오랜 갈굼으로 인한 아주 자연스럽고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이 중사, 대답 안 하나?”

강은 발로 나리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네, 중사 이나리…….”

“강아, 나리 중사 몸도 안 좋은데 그만해.”

일한이 나서서 강을 말리자 강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더 성을 냈다.

“얘, 왜 이래? 너, 내가 전하라는 말 똑바로 전한 거 맞아?”

일한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입술을 말았다. 나리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다가 눈을 깜박였다.

아직 본론이 남은 것이다.

“박주환 소령은 어디 갔어?”

“…….”

“내일부터 페어로 훈련하라고 했는데, 왜 1명이 없냐고!”

예?

내일부터요? 누, 누구랑요?

나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일한을 쳐다보았다.

유일한 소령님?

본론부터 말씀해 주셨어야죠오!

방금 바람맞힌 가이드랑 훈련하라니요!

❖ ❖ ❖

나리와 주환은 서로 시선을 돌린 채 입을 퉁퉁 내밀었다.

“너네, 손.”

“…….”

“…….”

“꽉 안 잡지? 내가 꽉 잡게 해 줘?”

강이 미간을 찌푸리며 윽박질렀다.

일 처리엔 계급장이 최고라고 했던가. 두 사람은 1달 만에 강 앞에서 강제로 매칭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소설 속에서는 제 짝을 만나면 두근거린다든가, 짜릿하다든가, 서로 운명이라고 단번에 알던데.

어색하고 뻘쭘해서 그런가. 아니, 너무나도 긴장해서 그런가. 나리는 제 심장에서 꽹과리 치는 소리만 들렸다.

손에 땀 찬다.

아아, 왜 이 소설엔 신체 강화 어빌리티는 있고, 땀샘 조절 어빌리티는 없는 걸까.

나리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조금만 살살 잡아 주시죠.”

“최 대령님 명령이잖습니까.”

역시나 엄청 쌀쌀맞았다. 이게 다 제 업보인 것을 어쩌랴.

나리는 새하얗게 질린 손바닥에 공기 좀 들어가라고 비틀어 보았다.

“박 소령님, 좀 아픕니다.”

“A급 쉴드 어빌리티를 가진 전투형 에스퍼가 가이드 악력에 아프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나리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입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최악이다. 맞선도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다. 그냥 1달 전에 매칭 테스트 할걸.

주환이 특이 발현 케이스라면서 최강과 일한, 그리고 다른 간부들과 연구원들이 보는 앞에서 뻘쭘하게 손을 잡고 30분이나 있을 줄은 몰랐다.

화면 속 그래프와 숫자를 보고 있는 연구원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뭐가 잘못된 걸까.

연구원들과 얘기를 나누는 최강과 일한의 표정도 자못 심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