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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2)화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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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이나리, 거꾸로 해도 이나리

“잘 먹겠습니다!”

윤기가 흐르는 따끈따끈한 흰쌀밥이 막, 입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어?”

그런데 누가 감히 나리의 흰쌀밥 위에 시뻘건 소스를 뚝, 떨어트린 게 아닌가.

임무 후 첫 끼니에 진심인 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쿵쿵 흥분한 심장과 한창 예민해진 온 신경 세포가 이 첫 숟갈에 집중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영광스러운 흰쌀밥에 스며드는 비린 쇠 냄새, 점점이 번져 가는 붉은색이 고아한 쌀알 위를 주르륵 미끄러지는 것이 슬로 모션으로 소름 끼치게 지나갔다.

불길한 레드 소스는 툭, 투둑, 쉴 새 없이 밥 위로 떨어졌다.

내 밥.

내 달달한 탄수화물!

“으읍! 이나리 선배님, 코피…….”

그제야 나리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자신의 코끝을 막았다. 두 콧구멍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콸콸 흐르고 있었다.

“아씨, 피 냄새…….”

“이 중사, 식사 시간 전에 의무실 안 갔습니까?”

맞은편에 앉은 에스퍼들이 밥맛을 잃었는지 썩은 표정으로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나리 중사! 괜찮아요? 빨리 의무실로! 아니지, 잠깐만 코 잡고 누워 봐요. 내가 빨리 가이딩을…….”

흑! 역시, 날 걱정하는 것은 일한밖에 없구나.

나리는 감동한 눈빛으로 찡한 콧등을 붙잡은 채, 일한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옅은 갈색 머리와 도자기처럼 매끈한 우윳빛의 피부 위에 그려진 잘생김. 일한은 이 세계관의 주인공답게 인성과 얼굴이 열일했다.

아아, 보기만 해도 마음이 녹는다.

나리는 저도 모르게 히죽거렸다. 꿀럭꿀럭 들끓는 코피가 입으로 새면서, 흰 이빨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시뻘건 핏줄기가 잇새로 그어졌다.

면상에 식판 던지고 싶어지는 그로테스크한 미소였다.

“하하하, 전 괜찮습니다. 유 소령님.”

밥맛이 싹 가시게 하는 피 맛이 후각과 미각을 장악하면서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나리는 S급 가이드 일한의 도움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미 페어가 있기 때문이다.

날카롭고 사납게 생긴 냉미남이 나리를 째려보며 일한의 손목을 잡았다.

“이 중사, 뭐 해? 밥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빨리 의무실로 가.”

유일한의 페어, 그것도 SS급 에스퍼. 하늘 같으신 무시무시한 최강 대령의 명령에 나리는 시무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아, 내가 가이딩하면 되는데, 뭣 하러 의무실까지 보내? 그러다 폭주 오면…….”

“부대 내에서 폭주하는 얼빠진 놈은 내 손으로 즉결 처분이다.”

그럼 그렇지.

저 천사 같은 가이드가 페어 없는 불쌍한 에스퍼 좀 응급 가이딩 해 주겠다는데, 그게 그렇게도 싫냐! 쫌생이!

속으로 온갖 불만이 나왔지만,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최강 대령은.

집착광공이니까.

그렇다.

나리는 집착광공과 미인수가 나오는 BL 소설에 빙의했다. 등하교 시간마다 업로드되길 기다리며 봤었던 세기말 SF, 가이드버스 세계관 소설이었다.

현실 세계보다 혹독한 세기말 SF라니, 자비도 없다. 차라리 가이드로 빙의했으면 편하게 잘생긴 주인공 커플을 보며 팝콘이나 먹었지……. 눈 뜨고 일어나 보니 에스퍼였다.

그것도 소설에서는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던 집착광공의 수색팀 말단 대원으로.

내가 저 자식 주식을 사서 연재작을 달렸다니! 미쳤지!

나리는 쿵쿵 발을 구르며 의무실로 향했다.

한창 예민해진 청각이 소곤대는 소리와 쩝쩝거리는 소리, 수저와 젓가락이 식판에 깔짝거리는 소리까지 잡아냈다.

코피는 멈추지 않지. 배는 고픈 건지, 아니면 아픈 건지 속이 메슥거렸다.

정말이지, 온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서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나리는 똥 마려운 사람처럼 다급하게 의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또도도독똑똑똑!

“이, 이나리 중사입니다. 응급 가이딩 좀 부탁합니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 남자가 헉, 소리를 내며 한 발 물러섰다. 계급장과 명찰을 보니 가이드다. 나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코피가 덕지덕지한 손을 뻗었다.

“코, 코드 레드! 폭주 상태 직전이다! 구속 스트랩이랑 진정제, 태블릿 가져와!”

아니, 코피 정도에 폭주까지야…….

나리는 당황스러워 갈 길을 잃은 손으로 애처롭게 허공을 휘저었다.

“저, 저기요오……. 그보다 휴지 좀…….”

“김 대위님! 구속 스트랩 여기 있습니다!”

“정 하사, 당장 이 중사 좀 묶어! 폭주해서 개나리 되기 전에!”

의무실에서도 가장 덩치가 큰 정 하사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나리를 꽁꽁 묶었다.

정말이지, 코피 가지고 별의별 유난을 떤다.

“죄, 죄송합니다. 개나…… 아니, 이나리 중사님. 곧 가이딩해 드리겠습니다.”

“아, 쿨럭, 예……. 저, 이런 부탁 드려서 민망한데…….”

“예?”

나리의 이마와 목덜미에 측정계를 붙이던 정 하사와 약병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던 김 대위가 흠칫 놀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폭주 직전의 에스퍼는 물불을 안 가리고 가이드를 덮치기 일쑤라는 건 소설을 읽어 본 나리도 잘 알고 있었다.

포옹이면 양반, 입술을 비비거나 옷을 갈기갈기 찢어서 그 이상의 스킨십을 짐승같이 해 대는 걸 읽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꼬리가 주책맞게 올라갔는걸.

그러니 의무실 가이드들의 저런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씁, 훌쩍!

나리는 꼼짝없이 묶인 채 콸콸 쏟아지는 코피를 들이마시며 말했다.

“저어, 휴지를 뭉쳐서 제 콧구멍 좀 막아 주시겠어요?”

“…….”

“…….”

“아니, 두 분께서 제 손을 묶으셔서.”

나리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허벅지에 붙여진 손가락을 깔짝거리며 헤헤 웃었다.

“…….”

김 대위의 눈초리에 신참 가이드인 정 하사가 곰 같은 손으로 휴지를 돌돌 뭉쳐서 나리의 두 콧구멍에 쑤셔 넣었다. 남이 해 줘서 깊게 들어가지도 못했는지, 여전히 멈추지 않은 피가 목구멍 쪽으로 왈칵왈칵 쏟아졌다.

“흡, 푸윽! 콜록콜록.”

아아, 나라 구하기 힘들다.

나리는 진정제를 맞고 꼴깍 잠에 빠졌다.

❖ ❖ ❖

약 기운에서 깨어나니 날은 어둑어둑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얽매었던 스트랩은 풀려 있었다.

자는 동안 누군가의 가이딩을 받았는지, 신경이 날카롭다든가 후각과 청각이 예민하지도 않았다. 오래간만에 나리는 개운하게 기지개를 켰다.

“나리 중사, 정신 들어요?”

어머!

이 어둠을 밝히는 햇살 같은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일한이었다.

“예!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리가 손날을 붙여 이마에 대자, 일한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나리의 앞에 앉았다.

“인사는 내가 해야죠. 아까 나리 중사 덕택에 안 다쳤으니까요.”

“예?”

“이번 작전 중에 나 대신 충격파 막아 줬잖아요.”

아아.

나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제 포지션이 탱커이지 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하하, 빌어먹을.

하필이면 에스퍼 능력도 몸빵이다. 최강이 초능력을 쏟아붓고, 괴물들이 커다란 몸뚱어리를 흔들어 대는 위험한 전장에서도 A급 쉴드 능력자, 나리는 항상 최전방에 있어야 했다.

“당연한 거라도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건데 고맙다고 해야죠. 고마워요, 나리 중사.”

일한의 해맑고 보드라운 미소에, 나리는 5초간 숨을 쉬지 못했다.

어느 에스퍼나 마찬가지로 나리도 일한의 S급 가이딩 능력을 갈구하고, 그의 온화한 미소에 평안을 얻으며, 가슴 뛰게 그를 열망했다.

그러나 그들과 나리는 조금 달랐다.

나리는 두 손을 모으고 눈물을 글썽거리다가도 흠칫거리며 홱홱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두 눈에 힘을 주고 단호하게 소곤거렸다.

“유일한 소령님, 미인계를 함부로 쓰시면 안 됩니다.”

“에? 미인계라니…….”

“쓰흡!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숙소로 복귀하시죠.”

속으면 안 된다. 설레면 더더욱 안 된다. 일한이 아무리 착해도 진짜 감사 인사 하려고 의무실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나리 중사, 요즘 Esp 수치가 위험한 건 알고 있죠? 이대로 매칭되는 가이드가 없으면 길어 봤자 1년 이내에 폭주할 거예요.”

“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부터 계속 전역 지원서와 보직 변경 신청서를 열심히 제출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혹시 최 대령님께서…….”

나리는 두 손을 살살 비비며 말끝을 흐렸다. 일한은 고개를 저었다.

“강이가 불허했습니다.”

“둘 다…… 말입니까?”

“네. 둘 다.”

“…….”

이번이 아흔아홉 번째였다. 그리고 나리는 대수롭지 않게 대망의 백 번째 전역 지원서와 보직 변경 신청서를 품에서 꺼내 들었다.

유 소령님, 제에발, 이번에는 집착광공 최 대령에게 잘 전달해 주세요. 저한테 그만 집착하시고 놔 달라고요!

……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일한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그보다. 나리 중사 파장이랑 매칭되는 가이드가 있어요.”

“예. 1달 전에 보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 가이드랑 안 만나요? 아직 매칭 테스트도 안 했다고 들었습니다.”

나리는 우물쭈물하며 일한의 시선을 피해 제 손끝만 꼼지락거렸다.

“그…… 혹시, 나 때문에 그래요?”

엥?

나리는 고개를 퍼뜩 들고 일한을 쳐다보았다. 일한은 머쓱한지 벌게진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마른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니, 그……. 그동안 내가 종종 나리 중사 가이딩을 해 줬잖아요. 소, 손만 잡았었지만. 그래서 혹시…… 나한테 감정이 있어서, 일부러 매칭된 가이드랑 안 만나는 건가 싶어서…….”

“소령님께 감정 없는 에스퍼가 어디 있어요.”

나리의 고백에 일한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쿵쿵 빨라지는 그의 심장 소리가 나리의 고막에 세세하게 들렸다.

“아…….”

객관적으로 봐도 훤칠하게 뻗은 팔다리에 어깨도 넓고, 후광이 보일 정도로 잘생겼고. 매력도 철철 넘치지, 능력 좋지, 유머도 있고 매너 좋고, 집안도 좋지, 누가 감히 일한을 안 좋아할 수 있을까.

“나, 나도 나리 중사 좋은 사람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하지만, 전 그냥 편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을 뿐이에요.”

“에?”

일한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가 겪어 본 에스퍼들은 죄다 죽자 살자 거머리처럼 붙어서 정신없이 가이딩을 쭉쭉 빨기 바빴다. 얼마나 절박한지 불쾌감이 들면서도 동시에 안쓰럽기까지 했는데.

“정말이에요. 그 가이드님 만나서 매칭 테스트 하면 저 또 싸워야 하잖아요? 그럴 바에야 퇴직하고 싶습니다. 가이드님께 죄송하지만, 페어 없는 에스퍼들은 많아요. 언젠가 저보다 매칭률 높은 분 만나시겠죠.”

이나리는 정말 이상한 에스퍼다.

일한은 쭈뼛거리며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나리 중사.”

“네! 중사 이, 나, 리!”

“실은 아까 나리 중사 가이딩, 박주환 소령이 했어요.”

“아, 그렇습니까.”

음…… 박주환 소령님이 누구시죠?

“난 나리 중사가 여태껏 매칭된 가이드랑 안 만났다고 해서 박주환 소령과 대면시켜 주려고 했는데…….”

설마, 서얼마…….

일한을 따라 나리의 고개가 삐걱삐걱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그 말인즉, 지금 우리 둘 다 차인 겁니까?”

훤칠하고 잘생긴, 또 다른 남자가 팔짱을 끼고 나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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