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196화
196. 누구시라고(1)
제피렐리 가문이 무너지고.
노리치 가문과 포든 가문이 무너졌다.
그리고 고먼 가문이 무릎을 꿇었고.
글레이저 가문마저 가주이자 강력한 대선주자이던 프랭크 글레이저가 내란혐의로 입건됨에 따라 그 종말을 고하면서 원탁은 완벽하게 무너졌다.
그리고 사만다 허드는 자유를 되찾았다.
“사만다.”
“포터!”
사만다가 어제 막 입국해 뉴욕에 도착한 포터의 품에 안겼다. 포터는 사만다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됐다. 이제 다 끝났어.”
“그렇죠?”
“그래. 할리우드에서 연락이 오고 있단다. 최연소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은 여배우를 찾느라고 내 전화기가 불이 날 지경이야.”
주드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핸드폰을 손바닥 안에서 통통 튀겼다. 뜨거워서 잡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사만다가 햇볕처럼 따갑게 웃었다.
“저, 연기 다시 할 수 있는 거죠?”
“그럼. 너 같은 배우가 연기를 하지 않는 건 할리우드의 큰 손실이야.”
“다행이에요. 나, 연기하고 싶었거든요.”
사만다가 환하게 웃었다. 주드는 그런 사만다를 보며 속으로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윌리엄 글레이저의 손에 놀아난 이후 사만다는 모든 일에 의욕을 잃은 것처럼 보였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큰일을 당했는데도, 사만다는 다시 연기를 하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끝내주는 배역을 가져올게.”
“주드만 믿어요.”
“참, 그분은?”
주드가 조심스레 상혁에 대해서 물었다. 사만다는 슬핏 처연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했다.
“뉴욕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한 번도?”
“네, 정말이에요.”
주드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프랭크 글레이저가 낙마했다. 분명 그 배후에 상혁이 있을 것이라 짐작한 주드였지만 정작 사만다는 상혁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쁜 사람이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너, 괜찮아?”
주드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은 사만다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왜요?”
“너, 상혁을 좋아했잖아.”
“백마 탄 왕자님이었으니까요.”
사만다는 순순히 인정했다. 맨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와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날 봐주지 않으니까요. 그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다른 곳을 보고 있어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타이밍이 도와주지 않았나 봐요.”
“사만다. 왜 그래. 너, 사만다 허드야. 널 외면할 남자는 없어.”
주드는 그런 사만다가 걱정돼서는 자신도 모르게 사만다를 응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획사 사장으로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
사만다는 만인의 연인이 되어야지 한 사람의 연인이 되기에는 아직 일렀기 때문이다.
연기를 할 마음에 없다면 모를까 연기를 하고 싶다면 더더욱.
“나. 파혼했다고 발표할래요.”
“정말?”
“네. 이제 나도 제자리로 돌아와야죠. 어차피 상혁과 나는 그래야만 하잖아요. 그러기로 약속하고 상혁이 날 도와줬던 거니까요.”
둘 사이의 계약 연애는 끝이다. 상혁은 사만다를 글레이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거짓 약혼을 발표했다. 이제 글레이저 가문이 없으니 거짓 연애를 이어 나갈 필요는 없다.
“구설수가 따라올 거야.”
“욕먹는 건 내가 아니라 상혁일 거예요. 상혁 걱정을 해야죠.”
“그런가.”
주드는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재벌과 여배우의 약혼이다. 그런데 파혼을 발표한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재벌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돌릴 것이다.
“상혁과는 이야기했어?”
“네. 어제 왔었어요.”
“어제?”
주드가 사만다를 빤히 쳐다봤다. 사만다는 주드의 두 눈을 마주 보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자 주드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를 왜 하고 싶은지 알겠다.”
“왜요?”
“너. 상혁이 어디서든 너를 봤으면 하는 거지?”
사만다가 혀를 빼꼼 내밀고는 웃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사만다가 헤헤, 웃었다.
“날 자꾸 거부하길래, 날 안 보는 남자는 처음이라서 그렇게라도 복수하려구요.”
“내가 왜 저렇게 매력적인 여자를 거부했을까, 이렇게 느끼게?”
“네.”
“네가 상혁을 계속 그리워하게 되는 건 아니고?”
주드의 말은 사만다의 가슴을 비수처럼 찔렀다. 하지만 사만다는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래 봬도 최연소 나이로 오스카 여 주상을 수상한 사만다다.
“나도 행복해질 거예요. 주드.”
그녀의 말에 주드는 망치가 세게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사만다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었다. 주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러길 바란다. 사만다.”
사만다의 눈이 창밖의 하늘로 향했다.
* * *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김태양이 상혁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상혁은 그런 김태양에게 손짓해 자리에 앉혔다.
“됐다. 회장님이라니. 뭐 좀 들은 모양이지?”
상혁이 그렇게 말하자 김태양이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더 위자드 코퍼레이션. 로스차일드에서 회장님을 위해 준비한 선물인 것으로 압니다만.”
“정확해.”
상혁이 피식하고 웃었다. 김태양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건 김태양과 함께 미국에 건너와 PMC의 서버실에 틀어박혀 라스베가스에서 한 달 넘게 고생한 두 명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있는 곳은 뉴욕 K타운 안에 있는 한 삼겹살집이었다. 상혁이 오늘 하루 통으로 대관했기 때문에 손님은 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미슐랭 3스타도 가능하다만. 이걸로 되겠어?”
“이거면 충분합니다. 삼겹살에 소주가 그렇게 땡겼거든요. 안 그러냐 너희들?”
“맞슴다. 괜히 옷 입고 가는 것도 신경 써야 하는 그런 데보다는 여기가 났습니다.”
한국으로 가기 전 밥이나 먹자는 말에 삼겹살과 소주를 먹고 싶다고 했던 이들의 취향을 고려했다. 상혁은 피식 웃었다.
“한 달 만에 향수병이라고?”
“기간이 뭐가 중요합니까. 말이 한 달이지 일 년처럼 느껴졌습니다만.”
그건 그런가, 싶어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아마 김태양과 둘에게는 살 떨리는 시간이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덜렁 그 안에 던져두었으니.’
제피렐리 가문의 산하에 있던 세 개의 PMC는 로스차일드에 의해 이리저리 찢겨 다른 PMC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그중 알짜배기는 로스차일드가 아주 잘 포장하여 선물로 남겨 두었다.
“저 친구들은 저기에 그냥 세워 둬도 되겠습니까?”
“상관없어.”
삼겹살집 바깥은 커다란 덩치의 경호원들로 물샐틈없이 경비 중이었다. 골렘(Golem)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발족한 경호회사는 블랙스컬, 레드혼, 아이언실드의 알짜배기 스무 명을 따로 빼내서 만든 경호회사로 일종의 드림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지휘하는 건 블랙스컬의 CEO인 제드 소코비치.
김태양이 맨 처음 당했던 것처럼 자신의 몸속에 벌레 하나를 두고 충성을 맹세한 대신 목숨을 건진 그가 골렘의 사장이 되어 회사를 관리하기로 했다.
더 위자드 코퍼레이션의 경호를 책임지는 회사로 자회사로 편성해 둔 그들은 앞으로 한국에서 상혁의 일을 도울 것이다.
“걔네들은 어때?”
“더블아이요? 쓸 만합니다.”
“에이, 사장님. 쓸 만하다뇨. CIA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빵빵한 애들이던데. 우리 사장님이 걔네들 보고 기가 팍 죽으셨습니다.”
“야!”
김태양이 낄낄거리며 삼겹살을 집어 먹는 부하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더블아이.
글레이저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정보조직도 상혁의 밑으로 들어왔다. 그 역시도 로스차일드가 글레이저에 충성심이 깊었던 이들을 솎아 내어 선물한 정보조직이다.
그곳의 책임자는 김태양.
전 국정원 블랙 출신이니 그들을 관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저러는 것도 엄살이었기 때문에 상혁은 빙긋 웃으며 소주병을 들었다.
“받아.”
“감사합니다.”
쪼르륵, 쪼륵, 쪼르륵.
소주잔 네 잔이 차례대로 차올랐다. 삼겹살은 지글거리며 먹기 좋게 구워졌고, 상혁은 삼겹살 한 점과 함께 소주를 넘겼다.
그러자 부드러운 소주가 기름진 삼겹살을 싹 씻어 내리는 것이 느껴졌고 상혁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띠링! 띠링! 띠링!
그때 김태양과 부하 두 명의 핸드폰이 울렸다. 상혁은 김태양에게 말했다.
“특근수당이다.”
“예?”
“출장비랑 야간 수당이랑 주말 특근까지. 넉넉하게 넣었으니까 확인해도 좋아.”
사람의 마음을 사는 건 돈이 최고다. 다들 저 일을 하는 것도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다. 그 때문에 상혁은 이제 세는 것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많아진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기로 했다.
상혁의 뒤치다꺼리를 하는데 그 정도 돈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허, 허억!”
“이게!”
김태양은 4억, 그 밑의 두 부하는 각각 2억씩 통장에 꽂힌 것을 확인하고는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약 두 달 정도를 고생하고 4억과 2억을 번 셈이니 평범한 공무원 월급이나 받으며 살았던 그들의 눈이 뒤집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미 상혁이 그들에게 충분한 월급을 주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더 바빠지고, 위험해질 테니까 열심히 하라는 뜻에서 주는 거야. 가져오는 성과에 따라 성과급은 앞으로도 계속 지급될 예정이고.”
정해진 월급만을 주며 그 이상을 해 오길 바라는 것은 악덕 고용주고 욕심이다. 사람은 늘 받은 만큼만 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이 받을 수 있는 돈을 정해 놓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된다. 지금 상혁이 김태양에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돈 보고 일해. 사람 보고 일하지 말고.”
딱.
상혁은 씩 웃으며 소주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껏 먹고. 고용주가 있어 봤자 그게 어디 먹히겠어? 여기 있는 고기 싹 다 먹어라.”
상혁은 김태양이나 두 부하가 잡을 새도 없이 사라졌다. 상혁이 폭풍처럼 사라지고 난 뒤 김태양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와 씨.”
“졸라 멋있네요.”
“돈 보고 일하라니.”
국정원에 들어갔을 때부터 나라를 위한 헌신, 나라를 위한 희생 등을 강요받았던 셋은 상혁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람이 아니라 돈을 보고 일하라니.
그게 고용주 입에서 나올 줄이야.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말인가.
“돌아가면 마누라 앞에서 어깨 좀 펼 수 있겠어요.”
“그치?”
“전 결혼할 겁니다.”
김태양이 상혁이 나간 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둘에게 말했다.
“야, 난 여기 뼈 묻으련다. 국정원보다 훨 나아.”
“예전에 그렇게 욕한 건 잊으셨습니까?”
“야, 옛날 이야길 왜 자꾸 꺼내냐.”
그리고 그날 김태양과 그의 전 동료 둘은 거의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신 뒤 경호원들의 등에 업혀 호텔로 돌아갔다.
* * *
[마스터.]
“일호. 한국은?”
[큰 소요는 없습니다. 아. 백정연 대표가 마스터를 몇 번 찾았는데요.]
현재 SG그룹의 임시회장을 맡고 있는 그녀가 상혁을 찾았다. 상혁은 피식 웃었다. 자신의 예상보다 백정연의 눈치가 훨씬 더 빨랐기 때문이다.
“로스차일드 때문인가?”
[최근 SG그룹이 연이어 맺은 대규모 계약 건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SG그룹의 전체 시총이 약 200조 이상 늘어났습니다.]
로스차일드의 호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상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SG그룹까지 챙겼다.
물론 상혁이 챙긴 것에 비하면 그냥 콩고물 정도를 챙긴 것에 불과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임시 회장직을 맡고 있는 백정연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높아지기에는 충분했다.
“곧 한국 들어갈 예정이다. 588조에 대한 자금 운용 계획은?”
[모두 세워 두었습니다. 플랜 A, B, C를 순차적으로 진행하면 10년 이내에 동아시아의 경제를 뒤흔들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이 갖춰지리라 보고 있습니다.]
일호의 투자 실력은 발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아닌 AI에 더 가깝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상혁은 그런 일호에게 말했다.
“중국 쪽으로 집중시켜둬.”
[다음은 중국이군요. 알겠습니다 마스터.]
일호는 상혁에게 필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상혁이 명령을 하면 그에 따르면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나석을 여러 개 얻었어. 한국 돌아가는 즉시 서번트와 골렘 작업 들어갈 테니까 준비해 두고.”
[예, 마스터.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
실시간으로 일호와는 의념을 통해 거리와 관계 없이 소통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매일 한 번씩 보고를 받았는데 새로운 보고거리가 생긴 것이다.
[백성철 회장이 은밀히 접근할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
상혁은 기다려 왔던 반가운 소식에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