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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먹는 대마법사-170화 (169/249)

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170화

170. 무서운 비행기(5)

“사만다, 오랜만이에요.”

“상혁도. 이러다 얼굴 까먹겠어요.”

사만다가 싱그러움을 한껏 머금은 채 상혁에게 어리광을 피웠다. 주변에서 보는 이들이 절로 흐뭇한 웃음을 지을 정도로 두 선남선녀는 기가 막히게 어울려 보였다.

딱.

상혁은 주변에 보이지 않는 막을 세웠다. 투명한 벽은 안에서 나가는 소리는 차단하고 밖에서 들어오는 소리는 들여보낸다.

그렇게 안에서 새어 나가는 소리를 막은 상혁이 사만다에게 말했다.

“미국으로 갈 준비를 하시죠.”

“언제요?”

“이틀 뒤.”

상혁은 와인으로 입을 가볍게 적셨다. 상혁은 보란 듯 사만다와의 만남을 공개된 장소에서 이어 갔다. 삼성동에 있는 미슐랭 레스토랑으로 약속 장소를 잡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 레스토랑은 항상 만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빨리요?”

“네. 일이 잘 풀렸네요. 가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렇긴 하죠. 제 친구나, 제 지인들이 모두 다 미국에 있으니까요.”

사만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고는 하나 그녀의 고향은 엄연히 미국이다. 원치 않는 한국행이었기 때문에 사만다는 미국을 그리워했다.

“그러니까 돌아가자는 거죠.”

상혁이 빈 사만다의 잔에 와인을 채워 주었다. 그러자 사만다는 목이 타는 듯 와인을 반이나 비워 버리고는 입가를 슥 닦았다.

“글레이저 가문은요?”

그렇게 말하는 사만다의 눈에 희미한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사만다는 아직 잊지 못했다. 글레이저에 의해 자신의 사랑이 부정당한 것도 모자라 끔찍한 인체 실험의 희생자로 죽을 뻔했다는 그 공포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상혁은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사만다가 볼 수 있도록 손바닥을 폈다.

“손 줘 봐요.”

그러자 사만다가 손을 올렸다. 그 순간 상혁의 손을 통해 사만다에게로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흘러 들어갔다. 그러자 사만다의 얼굴에 서린 공포가 옅어졌다.

“후아.”

“이제 괜찮죠?”

“네.”

사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주변에서는 휘파람이 터져 나왔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손을 꼭 붙잡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글레이저 가문은 걱정 마요. 그들만 당신에게 볼일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나도 그쪽에 볼일이 있어서.”

상혁은 가볍게 대답했다. 그때 웨이터가 다가오더니 상혁과 사만다 앞에 전채 요리를 내려놓았다.

“내가 상혁에게 짐만 되는 거 아닌가요?”

사만다는 자신이 상혁에게 짐이 되는 것도 걱정했다. 글레이저라는 거대한 가문 앞에 자신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작은 개인이란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혁은 부드럽게 웃었다.

“아뇨. 당신이 꼭 필요해요. 당신이 있어야 글레이저 가문이 먼저 다가올 테니까.”

아마 글레이저 가문은 궁금해 미칠 지경일 것이다. 죽었어야 할 사만다 허드가 한국에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SG그룹의 상혁과 깊은 관계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만다가 알고 있는 글레이저 가문의 저열한 진실에 대해 상혁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공룡인 SG를 휘청거리게 만든 인체 실험 스캔들에 대해 얼마나 상혁이 알고 있는지까지도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먼저 다가오길 바라나요?”

“난 미국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까요. 그리고 원래 급한 쪽이 빈틈을 드러내곤 하거든요. 그건 글레이저 가문도 마찬가지예요, 사만다.”

“음…….”

“아마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상혁은 빙긋 웃었다. 사만다는 상혁의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의 눈에 글레이저는 너무 거대해 완전무결하게 보일 테니까.

하지만 상혁은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강대한 제국, 왕국이라고 해도 결국 사람에 의해 굴러가는 조직이다. 그리고 대개 덩치가 크면 클수록, 나이를 많이 먹었으면 먹었을수록 구멍은 손쉽게 숭숭 뚫리기 마련이다.

공교롭게도 글레이저 가문은 덩치도 컸고, 나이도 많이 먹었다.

‘맛 좋은 먹잇감이지.’

이번 미국행은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수백 년을 이어 온 견고한 카르텔을 흔들고 그 와중에 큼지막한 콩고물을 주머니에 챙길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7서클.

상혁이 가나안에서 이뤘던 8서클에서 딱 1서클 빠지는 7서클의 경지를 미국에서 완성하고 올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 되면 상혁은 복수를 위해 더 이상 눈치를 보거나 때를 보지 않을 것이다.

눈치를 봐야 하는 건 자신의 복수의 대상이 될 이들일 것이고 때는 자신이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때 상혁의 눈에 빈자리가 들어왔다.

빈 포크와 나이프, 그리고 접시까지. 상혁이 고개를 갸웃하자 상혁의 시선을 보고 눈치챈 사만다가 말했다.

“한 명 더 오기로 했어요.”

“누구요?”

“오디션 진행하면서 친해진 친구요. 상혁 씨를 하도 소개시켜 달라고 해서.”

사만다는 부끄럽다는 듯 볼을 붉혔다. 어쩌다 보니 청탁을 받고 상혁을 소개해 주는 듯한 자리가 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죠. 밥 한 끼 먹는 건데. 그런데 누군데요?”

“음, 상혁 대신 이번 오디션의 심사위원장을 해 준 배우예요. 왜 지난번에 상혁이 아는 연예인 없냐고 했잖아요.”

“아.”

상혁의 눈이 커졌다. 한국대학교에서 열린 오디션은 그 규모가 한국 방송 역사상 사상 최대 수준이었다.

주드 포터와 사만다 허드가 참가하면서 점점 판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메인 스폰서인 한국대학교의 이사장인 상혁에게도 선택권이 주어진 것인데, 그쪽 분야에 아예 문외한인 상혁은 자신 대신 자신의 노릇을 해 줄 대리인을 찾았다.

그 대리인을 오늘 이 자리에 불렀다는 것이다.

“함께 식사할 자격이 있네요.”

“그래요? 다행이다. 휴우.”

상혁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사만다의 표정이 밝아졌다.

“사실 한국 배우기는 하지만 칸느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울릉도>에도 주연으로 나온 배우예요. 제가 그 영화를 좋아하거든요. 아카데미에서도 지나가다가 몇 번 봤는데 이번에 함께 할 줄은 저도 몰랐어요.”

사만다의 목소리 톤이 한 단계 올라갔다. 꽤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난 모양이다. 상혁이 사만다의 수다를 들어 주며 전채 요리를 먹고 있는데 레스토랑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어? 저 사람은?”

“여기 오너셰프네요.”

몇 년 전 요리 분야가 방송가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원래 실력도 갖춘 이들이 스타성까지 선보이며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한 셰프 중에는 이곳의 오너 셰프도 있었다.

빼어난 실력과 스타성 때문에 여는 레스토랑마다 족족 한 달 치 예약이 꽉꽉 들어차는 레스토랑의 오너셰프가 된 것이다.

그런 그가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 직접 나왔다.

상혁은 사만다를 쳐다봤다.

“우리 올 때는 안 나왔죠?”

“네.”

“더 열심히 활동하셔야겠네요, 사만다.”

“여긴 한국이잖아요.”

사만다가 흥하고 삐진 척을 했다. 작게 웃은 상혁은 오너셰프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상대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누구더라, 정, 정…….”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TV를 보며 연예계를 동경했던 건 기억도 안 나는 50년도 더 전의 스무 살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상혁이 그 나이라고는 하나 기억은 그렇지 않다. 그때 사만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수빈! 여기야!”

“맞다. 정수빈.”

한국의 사만다 허드라 불리는 정수빈은 데뷔 초부터 차근차근 단역, 조연을 거쳐 빼어난 연기 실력을 통해 주연까지 올라간 기초가 훌륭한 배우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막대한 관객을 끌어모으며 한류에 힘을 보탠 <커피 한 잔>을 시작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황금종려상의 <울릉도>를 시작으로 그 활동 무대를 전 세계로 넓혔다.

국위선양에 가까운 활약을 보인 정수빈은 최고의 여배우가 된 사만다와 비슷한 행보를 보여 한국의 사만다 허드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정수빈이 사만다보다 열 살이 많았다.

또각또각.

삼십 대 중반의 정수빈은 농염함과 청순함을 동시에 갖춘 특이한 마스크로 감독들의 사랑을 받았다.

어떨 때는 사랑에 빠진 청순하고 정숙한 여인의 모습이다가 메이크업과 조명을 조금만 바꾸면 같은 의상으로 농염하고 교태 넘치는 독거미 같은 여인으로 변하니 작품의 스펙트럼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넓었다.

“사만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수빈.”

“광고가 좀 늦게 끝났거든. 그리고…….”

“상혁, 여긴 수빈이에요.”

정수빈이 눈을 빛내며 상혁을 쳐다봤다.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백상혁입니다. 사만다가 외로워 보였는데 덕분에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아 안심입니다.”

“정수빈이에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분위기는 나름 훈훈했다. 상혁과 사만다는 연인 연기를 제법 잘했고 정수빈은 상혁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SG그룹으로 돌아가실 때는 어떠셨어요?”

“사만다는 어떻게 만나셨구요?”

“용산 기지는 진짠가요?”

상혁은 당황하지 않고 하나씩 차례대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정수빈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잔가?’

정수빈이 질문하는 것들이 무슨 기자들이 질문할 법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상혁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자 정수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서요. 죄송해요, 당황스러우셨죠?”

“괜찮습니다. 나름 재밌었습니다.”

식사는 맛있었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레스토랑의 고객들은 적정한 선을 지켜 관심을 보이면서도 무례하게 다가오는 이도 없었다.

그리고 정수빈이 왔다는 이유로 오너셰프가 솜씨를 부려 만든 스페셜 메뉴까지.

“계산은 해 두었습니다. 바로 가시면 됩니다.”

정수빈이 배를 살짝 쓰다듬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덕분에 호강하네요. 사만다, 다음번에도 부탁해.”

정수빈이 그렇게 말하자 사만다가 멈칫하더니 정수빈에게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저, 수빈. 나 이틀 뒤에 미국 가.”

“뭐? 이틀?”

“응, 그렇게 됐어. 미안해.”

꽤 친하게 지냈다고 하니 고작 이틀 전에 출국한다고 말하는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잠시 당황한 정수빈은 빙긋 웃었다.

“미안해할 필요가 뭐 있어. 우리가 원래 그렇잖아. 스케줄이 생기면 당장 내일이라도 떠나야 되니까.”

“그래도, 수빈. 네 덕분에 오디션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어. 고마워.”

“고맙긴.”

사만다와 정수빈이 서로 가볍게 포옹했다. 사만다와 포옹을 푼 정수빈이 상혁과 사만다를 보며 빙긋 웃었다.

“아마 운명인가 봐.”

“뭐가?”

“알게 될 거야. 그리고 둘.”

정수빈이 상혁과 사만다를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씩 웃었다.

“너무 어색해.”

“어?”

“나만 아는 사실로 할게. 나 입은 무거운 편이니까. 하지만 나처럼 눈치 빠른 사람에게는 들킬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수, 수빈.”

“아, 백상혁 씨.”

상혁이 쓰게 웃었다. 정수빈이 자꾸만 유심히 자신과 사만다를 관찰한다 싶었는데 둘이 가짜로 연인 사이를 연기한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네.”

“사만다랑 애인 안 할 거면 나도 되죠?”

“예?”

“난 부자가 좋아서. 부자인데 나보다 어리고, 매력적이면 최고 아니에요? 왕자님 기다리는 공주님은 아닌지라. 어때요?”

정수빈의 말에 상혁이 멈칫했다. 갑작스러운 대시라니. 상혁이 할 말을 찾지 못한 사이 그 사이로 사만다가 끼어들었다.

“수빈! 그게 무슨 말이야!”

“사만다, 뺏기고 싶지 않으면 낚아채. 먼저 낚아채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아직 주인은 없는 거잖아.”

정수빈이 교태스럽게 웃었다. 남자라면 홀딱 반할 것 같은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사만다는 수빈이 진심이란 걸 깨닫고는 입을 앙다물었다.

“상혁은 나와 함께 미국으로 갈 거야.”

“그러니까 운명인 모양이야.”

“뭐?”

“그럼 나 간다.”

정수빈은 폭탄을 떨어뜨려 놓고는 쿨하게 떠났다. 놀랄 정도로 솔직한 정수빈의 성격에 상혁은 혀를 내둘렀다.

연예인이 TV와 실제 모습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수빈은 그 이상이다. 그녀가 연기한 배역보다 그녀의 실제 성격이 더 드라마틱했다.

“벼, 별꼴이야! 상혁, 미안해요. 수빈이 저런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사만다는 상혁에게 얼른 사과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만류했지만 이틀 뒤, 상혁과 사만다는 정수빈이 운명이라고 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머, 이게 무슨 우연이래? 내가 운명이라고 했죠?”

“수, 수빈?”

미국 뉴욕행 비행기.

사만다와 상혁이 탄 비행기 일등석에서 정수빈이 둘을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손 인사를 하고 있었다.

‘불편한 비행이 되겠군.’

지구로 돌아오고 난 뒤 처음으로 타는 비행기다. 상혁은 그 비행이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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