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127화
127. 형 대접을 받고 싶으시거든(2)
술판이 벌어졌다.
불판이 올라가고 그 위에 삼겹살이 올라갔다. 삼겹살이 노릇하게 구워지면서 나는 황홀한 냄새가 주변에 가득 퍼지고 술잔이 한 잔, 두 잔씩 불판 위를 오갔다.
거기에 잘 구워진 삼겹살을 상추쌈을 싸 입이 터질 것처럼 욱여넣기까지.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게 고깃집이라거나 어디 풍경이 호젓한 야외라면 손뼉을 치면서 완벽하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서울 한복판에 있는 SG건설 본사의 로비 한 가운데라면 손가락질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상혁은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었다.
“크으윽!”
짜릿한 소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에 상혁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삼겹살과 소주의 궁합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가 되지 않았다.
1000년 묵은 엘프주와 육질이 좋기로는 왕족이나 황족만 먹을 수 있다고 알려진 눈 덮인 엘렌 산맥의 원혼카우를 함께 곁들여 먹어도 이런 맛이 나지 않았다.
“역시. 음식의 궁합을 따지는 건 우리나라가 최고라니까.”
별로 비싸지 않고 흔한 것들로 음식과 술의 페어링을 기가 막히게 하는 건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 아니 차원을 통틀어 최고였다.
상혁은 우적거리던 쌈과 소주를 섞어 조금 틈을 만든 다음 잘 익은 김치를 쭉 찢어 입에 넣었다. 그러자 또다시 새로운 맛의 향연이 펼쳐졌다.
“죽인다!”
상혁은 손뼉을 치면서 불판 위의 고기가 어서 구워지기를 기다렸다.
사실 불이나 물을 자신의 손발처럼 다루는 상혁에게 이런 기다림은 의미가 없었다. 불판 대신 손 한 번 까닥하면 순식간에 삼겹살을 딱 먹기 좋을 정도까지 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성이 없었다.
‘불판을 보면서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는 감성이 있지.’
그 감성을 느끼기 위해서는 기다리는 수고로움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상혁은 고기가 다 구워지자 한 점을 다시 쌈을 싸서 입에 넣고는 우물거렸다.
“크으으으.”
거기에 소주 한 잔까지.
상혁은 소주의 씁쓸함에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창엽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비서.”
“예, 이사장님.”
“안 먹습니까?”
상혁은 젓가락을 가리켰다. 어서 그 젓가락을 들어먹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창엽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여기서 고기가 넘어가겠냐?’
SG건설 본사는 유동 인구가 많았다. 애초에 23층짜리 빌딩이기에 출근한 직원들 자체가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고기를 먹는다?
먹고 있으면 쳐다보는 사람들 때문에 목에 고기가 걸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신경줄인지 다들 잘들 먹고 있었다.
‘저 둘만 빼고.’
일호와 일영만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일호는 고기를 굽느라 바빴고 일영은 경호원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선호는 잘만 먹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게 처음이라 잘 안 넘어갈 겁니다.”
“그래요? 난 잘만 넘어가는데.”
“저도요.”
이선호야 워낙 신경이 굵고 두꺼웠다. 그런 성격이 아니라면 대기업을 상대로 힘없는 변호사가 싸울 수 있을 리 없다.
이창엽은 저쪽에서 가드들이 모인 채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저들도 난감할 것이다. 차라리 상혁이 난동을 부렸더라면 나설 테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고기만 구워 먹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상혁에게 가서 안 된다고 말한다?
기껏해야 월급쟁이인 가드들에게 그건 하늘이 두 쪽 나도 못 할 일이다. 상혁이 어리다고는 하지만 무려 백성철의 조카다.
로열패밀리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가드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빨리 내려와라.’
분명 이 소식은 위층에 있는 백이현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황당한 행동은 백이현이 사람을 내려보내야만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먼저 기 싸움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이 비서, 안 먹을 거면 가서 소주나 더 사 와요.”
상혁이 이창엽에게 심부름까지 시켰다. 이창엽은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이렇게 소주라도 사 오는 것이 더 나았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회전문을 돌아 밖으로 나온 이창엽은 통유리로 된 건설 본사 로비에서 유독 다른 그림체처럼 보이는 상혁을 보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으으…….”
감시를 하라기에 그냥 붙어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이런 성격일 줄이야. 상혁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목적성이나 이유가 없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창엽이 할 수 있는 건 더욱 없었다.
“소주나 사 와야지 어쩌겠어…….”
한숨을 작게 내쉰 이창엽은 이내 포기한 채 주변의 편의점을 찾기 시작했다.
* * *
네 시간.
점심시간도 지나 슬슬 회사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2시와 3시의 중간 즈음이 됐을 때 이 지루한 기 싸움은 끝이 났다.
“백상혁 도련님?”
마침내 백이현이 비서를 내려보낸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비서는 조심스럽게 상혁을 불렀고 상혁이 고개를 돌렸다.
“어이구, 드디어 오셨네. 회의가 이제 끝난 모양이죠?”
상혁과 이선호는 거의 4시간 가까이 로비에 퍼질러 앉아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 때문에 불판과 그 주변이 기름기로 흠뻑 젖어 있었다.
모르고 걷는다면 그냥 휙 미끄러질 정도로 기름기가 자욱하게 깔린 것이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고깃집 가서 먹었을 텐데.”
“그래도 색달랐습니다. 맛있었고. 근데 이사장님 정말 많이 드시네요.”
“제가 좀 많이 먹습니다.”
상혁은 혼자 삼겹살을 10인분 넘게 해치웠다. 아침에 김경자가 차린 집밥을 잔뜩 해치웠음에도 또 10인분을 혼자서 해치운 것이다.
호리호리하기 그지없는 상혁의 배에 그 많은 음식이 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또르륵.
상혁이 일어나다가 불판 옆에 세워 놓은 소주병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또르륵 소리가 나면서 줄지어 세워진 소주병이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
소주병만 10병.
그리고 그 옆에 쌓인 공깃밥을 담았든 스테인리스 밥공기가 12개.
켜켜이 쌓인 된장찌개 뚝배기 6개와 냉면을 담았던 냉면 그릇 5개까지.
이 정도 양이면 거의 한 부서가 회식을 했을 정도의 양이지만 상혁은 그 많은 양을 이선호와 단둘이 네 시간 동안 먹어치웠다.
비서가 내려오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먹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대식가인 셈.
“어이구. 우리가 이것저것 사다 놓은 게 많아서. 여기 근처에 왕대박 고깃집 맛집이네요. 거기 비서님도 아세요?”
상혁이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그 너스레가 그냥 너스레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비서는 식은땀을 안 보이는 곳에 줄줄 흘렀다.
‘왜 나한테 이런 걸 시켜서.’
비서실 막내이기 때문에 등 떠밀려 내려온 그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비서실장은 철저하게 교육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에 한번 가 보세요.”
상혁은 그렇게 말하며 길게 트림을 했다. 그러자 술과 된장, 고기가 섞인 냄새가 물씬 풍겼다. 비서는 찡그려지려는 얼굴 가죽을 간신히 붙잡고는 부들거리며 폈다.
‘짬 처리당했군.’
이창엽은 그룹 본사 비서실 출신이기 때문에 한눈에 비서를 보면서 그가 막내라는 이유로 짬 처리를 당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고는 가여워했다. 자신도 그와 같은 처지라면 비슷하게 황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그럼 도련님.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창엽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저 비서는 아까부터 상혁을 향해 계속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한국대 이사장으로 공식적인 직함이 있음에도 고의적으로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마 비서실장이 교육을 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곧 백이현 쪽에서 상혁을 도발하고 그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지켜보려 한다는 뜻이었다.
‘이제 내가 나설 땐가.’
이런 자잘한 머리싸움에는 이창엽이 자신이 있었다. 그의 전공이었기 때문이다. 본사 출신으로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어 본 이창엽이 상혁에게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그보다 먼저 치고 나온 사람이 있었다.
“백이현 도련님께 드리려고 저희 이사장님께서 직접 고기를 구워 놓으셨습니다.”
일호였다.
남자가 봐도 잘생긴 일호가 그렇게 말한 순간 비서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순간 어떻게 받아쳐야 하는지 템포를 놓친 것이다.
이창엽의 눈이 잘게 떨렸다.
‘뺏겼다.’
일호는 고의적으로 백이현을 도련님이라 불렀다. 백이현이 상혁에게 한 것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수법으로 한다면 더 불쾌한 것은 백이현 쪽이었다.
백성철의 장남으로 SG건설의 사장으로 어엿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련님이라고 불린 순간 거의 스무 살 차이가 나는 상혁과 같은 위치로 격하된다. 이제 막 백성철의 조카가 된 상혁과는 달리 백이현이 잃을 것이 더 많은 셈이다.
그걸 비서도 알아들은 듯 표정이 바뀌었다.
“어서 식기 전에 드리고 싶으니 올라가지요. 긴 회의를 하셨다니 사촌 형님께서도 식사를 거르시지 않으셨겠습니까?”
하지만 이내 비서는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다 알고 있다.’
백이현이 실제로 회의를 한 것이 아니라 고의로 그를 기다리게 했다는 것을 눈앞의 상혁이 모를 리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비서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안내하겠습니다.”
“참. 저 불판이랑 병들은 그대로 놔둬 주세요.”
상혁이 비서에게 그렇게 말했다. 비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저희가 치우…….”
“놔두세요.”
상혁이 비서의 말허리를 잘랐다. 청유형이 아니라 명령조로 말투가 바뀌었다. 계속해서 넉살 좋게 사람 좋은 것마냥 굴었던 상혁이었기에 비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상혁과 눈이 마주한 순간 비서는 깨달았다.
‘가만히 놔둬야지.’
그냥 가만히 놔두기로. 비서가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자 상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그의 뒤를 따랐다.
* * *
“술판을 벌였다고?”
“예.”
“으하하핫!”
백이현은 자신의 비서실장인 유원태에게서 보고를 받은 후 고개를 꺾고는 웃었다. 그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비단 머리만 좋은 것이 아니다. 생각한다고 해서 그걸 실천으로 옮길 추진력과 배포까지. 백성철의 조카가 된 시점에서 이미 과거의 왕족이나 다름없는 신분이 된 상혁이 쉬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음에도 상혁은 했다.
“역시. 우리 회장님이 나를 견제할 칼로 써먹을 성격은 되는 동생이었어.”
동생이라기보다는 조카에 더 가까운 나이 차이였지만 백이현은 빙글거리며 웃었다.
“한국대학교에서는? 뭘 좀 알아낸 것 같아?”
“최만금을 경질한 후 만난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만금이 삼촌이 입을 잘 다물고 있네.”
“쉬이 입을 열진 못할 겁니다.”
백이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만금을 어릴 적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닌 적도 있었다. 하지만 커가면서 최만금이 그의 삼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성철이 최만금과 막역한 사이라지만 타고난 피 자체가 달랐다. 최만금은 머슴이었다. 주인과 함께 자라올 머슴일 뿐, 절대로 신분이 달라질 수 없었다.
그래서 백이현은 삼촌이라 부르며 따랐던 최만금에게 목줄을 걸어 놓았다.
“역시 피는 진해. 그러니까 만금이 삼촌네 딸, 잘 대해 줘.”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귀여운 동생이 올 텐데.”
백이현은 턱을 긁적였다. 상혁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바로 기자들 때문일 것이다. 상혁에게 아버지의 비서실장인 김대엽이 붙여놓은 비서가 하나 있다더니 아마 자신이 한 일 정도는 쉽게 찾아냈을 것이다.
“화난 우리 동생을 무엇으로 풀어 줄까?”
백이현은 빙글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그때 유원태가 비서에게서 무언가를 듣더니 백이현에게 말했다.
“로비에 있는 걸 치우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했다고?”
“예.”
“재밌네. 우리 동생이 영역 표시를 했네. 내 회사에 말이야.”
백이현이 사납게 웃었다. 그냥 귀여운 동생 정도라고만 생각했던 상혁이 제 것에 영역을 남겼다는 것에 순간 울컥한 것이다.
백이현은 목 뒤를 한 번 주무른 뒤 유원태에게 말했다.
“술상 봐 와. 이 형님에게 대접하려고 고기까지 구워 온다는데 안 먹을 수 없지.”
“예.”
“그리고 철왕이에게 말해. 준비하라고. 세상 물정 모르는 동생에게 누가 우위에 있는지 정도는 가르쳐 줘도 되겠지.”
“예, 사장님.”
백이현의 말에 유원태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