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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먹는 대마법사-89화 (88/249)

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89화

089.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4)

상혁이 알고 싶은 것은 단 하나다.

진실.

그 때문에 상혁의 마나는 상혁의 손짓에 따라 회장실이 있는 층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 마나가 상혁의 수인에 따라 지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문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룬어.

마법사가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제2외국어인 룬어는 다른 말로는 신언(神言)이라고도 불린다.

신의 문자.

그 문자에 온전히 마나를 담아낼 수 있는 건 5서클 마법사부터다. 그 정도 마나는 갖춰야 비로소 룬어에 마나를 실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가나안에 가면 5서클에 도달한 머리가 새하얀 고령의 마법사들이 매일 같이 룬어 사전을 들고 다니며 룬어를 한 자라도 더 외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파앗-!

동시에 룬어가 밝은 빛을 뿜어내며 상혁의 마나를 미친 듯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자동차는 기름이 가득 차면 무거워지지만 마법사에게 있어 마나는 다다익선이다. 이미 단단한 마나의 실로 단단하게 꼬아 놓은 마나 고리는 5서클 룬 마법 씀은 거뜬히 견딜 정도의 마나량을 제공했다.

대부분 5서클에 막 도달한 마법사들이 룬 마법을 제대로 펼치면 하나 정도 펼치고 퍼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마나량이다.

‘다섯 번.’

상혁은 룬 마법을 최대 다섯 번까지 펼칠 수 있으니, 5서클 마법사 평균보다 마나량이 다섯 배는 더 많다는 뜻이다.

마나안에 룬어가 선명한 빛을 발하며 회장실 전체를 둘러싼 것이 느껴졌다. 상혁은 마나로 된 무거운 커튼을 열고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으로 회장실 안에 들어섰다.

뽀르르!

그때 상혁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초아가 얼굴을 드러냈다. 갑작스럽게 초아가 나타나자 상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주변의 사물이 서서히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주변의 시간이 거의 멈춘 순간 상혁은 거대한 의지가 자신을 굽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세계의 의지가 개입합니다.]

[인간의 과거를 마법으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건 천기에 어긋난다며 대마법사에게 경고합니다.]

[돌아올 업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세계의 의지가 으름장을 놓습니다.]

상혁은 피식 웃었다.

“왜 또 이제 와서 끼어드실까?”

[세계의 의지가 정도를 걸으라 강조합니다.]

[마법은 전능하지 않다며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 조언합니다.]

하지만 상혁은 차갑게 웃었다.

“개소리하지 마. 과거를 보는 게 왜 천기누설인데? 그럼 오늘 일을 핸드폰으로 녹화해서 10년 뒤쯤 보면 천기누설인가?”

[세계의 의지가 당황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어. 왜.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내 큰아버지란 양반을 고문하면 어떨 것 같은데?”

이 방법이 그나마 세련된 방법이다. 상혁에게는 사람에게 진실을 토로하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이 수십 가지쯤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비밀을 알고 있는 자의 극심한 고통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끼어들지 마. 세계고 뭐고 내 앞길에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이면 곤란해.”

하지만 상혁은 그 정도에서 세계를 쏘아붙이는 것을 멈췄다.

[세계의 의지가 축 늘어진 상태로 침묵합니다.]

세계의 의지는 결국 막대한 심력을 쓰면서 상혁을 말리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상혁도 세계의 의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업보, 혹은 카르마.

일정한 경지 이상 오르게 되면 상혁이 세계의 의지란 거대한 존재를 눈치챈 것처럼 그간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 보이고 새로운 것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중 업보는 아주 간단한 개념이다.

인간이 어떠한 행동을 할 때 그로 인한 반작용이 영혼에 쌓이게 되는 것을 업보라고 말한다.

살인하면 살인에 대한 원죄와 업보가 영혼에 쌓이게 되는 것이고, 나중에 그런 걸 많이 쌓게 되면 소위 말하는 천벌이 떨어진다.

“세계야. 내 업보는 어느 정도일 것 같은데?”

상혁은 피식 웃으며 허공을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주변의 시간이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상혁은 김대엽이 열어 주는 문으로 들어갔다. 김대엽이 따라 들어오려고 하자 백성철이 손을 들어 올렸다.

주름진 얼굴에 하얗게 센 머리. 하지만 나이와 다르게 곧게 핀 허리와 사람 하나 거뜬히 잡아먹을 것 같은 부리부리한 눈빛까지.

‘하나도 안 닮았어.’

상혁은 그의 얼굴에서 아버지를 하나도 찾아낼 수 없었다. 겉도 속도 자신의 아버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인물이었다.

회장실 주변에는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룬어가 이글거리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혁은 마법을 펼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여기서 상혁이 손가락 한 번만 튕기면 백성철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상혁이 원하는 것을 보여 줘야 할 것이다.

아버지와의 추억, 그리고 기억들.

상혁은 백성철에게서, 인간의 간교한 혀를 통해 나온 말보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백성철의 기억을 환상 마법으로 강제로 펼쳐 내기 위한 사전 작업을 이미 다 마친 상태였다.

인간의 기억을 그대로 복사해 환상 마법으로 구현해 내는 건 상당한 수준의 마법 조예를 필요로 한다.

인간의 무의식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방벽이어서 마법이라고 해서 무조건 뚫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마법사, 상혁은 가능했다.

“그래. 이름이 상혁이라고?”

그때 백성철이 상혁에게 말했다. 상혁은 그런 백성철을 물끄러미 쳐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하나도 안 닮았군.”

“나와 네 아비, 성운이가?”

백성철은 풀썩 웃었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당연하지. 어머니가 다르니까. 성운이는 늦둥이였다. 나보다 스무 살도 더 넘게 어렸지. 내 어머니가 돌아가고 나신 다음에 새어머니에게서 나온 아이니까.”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해서 거의 이야기를 하시지 않으셨다.

그건 외가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도 외조부나 외조모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상혁은 어릴 적 동네 친구들이 친가나 외가를 간다고 하면 늘 부러워했었다.

상혁에게 조부모는 이야기 속에서만 나오는 환상 속의 존재였으니까.

‘아이의 환상은 환상으로 남는 게 좋은 법이지.’

그러나 백성철을 보면 그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란 사람도 알 수 있을 듯했다. 처와 사별했다고 젊은 여자와 재혼을 한 뒤 아버지를 낳았으니까.

그 아래 자식들이나 아들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무시해 버린 채.

그런 할아버지가 좋은 할아버지였을 리 없다.

“어머니는 달랐지만 성운이는 집안의 귀염둥이였다.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영특하던지 아버지도, 새어 머니도 성운이만 보면 늘 웃음이 끊기지 않으셨지.”

백성철의 눈에 회한이 스쳐 지나갔다. 상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딴 감성적인 이야기나 듣자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연기는 그만하시죠.”

그러자 백성철의 표정이 돌변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냉철한 모습으로 돌아온 백성철이 차갑게 웃었다.

“대엽이 말대로군. 보통은 아니야.”

처음부터 백성철은 모든 것이 연기였다. 그리고 고작 백성철 정도 살아서 상혁의 눈을 속여 넘기기란 쉽지 않은 법이었다.

도플갱어도 가볍게 잡아낸 상혁이다. 상혁은 그런 백성철을 향해 조소했다.

“연기력이 별로 좋지 않으셔서.”

“그게 좋았다면 배우를 했겠지.”

“딴따라라고 생각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백성철에 대해서 조금만 찾아보면 지금껏 그가 뿌리고 다닌 염문만 해도 열 개가 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여배우 윤여화와의 스캔들이었다.

“제법 알아본 모양이구나. 큰아버지에 대한 관심이 많아.”

“믿을 만한 분이신 것 같지는 않아서.”

상혁의 말에 백성철이 크게 웃었다. 자신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또렷하게 말하는 상혁의 패기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어느 정도 길은 들여 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저 나이 먹고 자신 앞에서 저렇게 대거리를 할 정도면 깡과 배포는 보통을 넘는다.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니다.”

“가족이 없다고 생각한 채 스무 살까지 커 왔으니 의심이 좀 많습니다.”

백성철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한 번에 상혁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눈치챘다. 백성운과 김성미의 죽음. 그것에 대해서 상혁은 백성철에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상혁을 보면서 백성철은 상혁이 어리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상혁이었다면 상대에게 자신의 목을 물 수 있는 모습은 절대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젊음의 특권이었다.

물론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이지만.

“지난번 SG호텔에서 봤었지?”

그는 화제를 돌렸다. 상혁은 백성철이 무슨 말을 할까 한 번 지켜보기로 했다.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의사를 옆에 끼고 계시더군요.”

“큰아버지에게 예의를 배울 필요가 있겠구나.”

“부모 없이 자라서 그런지 제가 좀 그렇습니다.”

백성철의 눈두덩이가 한 번 더 꿈틀거렸다. 하지만 백성철은 화를 내는 대신 상혁에게 말했다.

“질이 안 좋은 자와 같이 다니더구나. 세상이 불만만 많지 세상을 바꿀 생각은 하지 못하는 위인이야. 네 사촌이 잘 알 거다.”

이선호를 말하는 것이다. 상혁은 빙긋 웃었다.

“역시. 천애 고아로 자라는지라 주변에 안 좋은 사람들이 좀 꼬입니다.”

백성철의 입가가 씰룩였다. 상혁이 자신의 말에 정말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 뭐라고 할 말도 딱히 없을 정도였다.

“혀가 꽤 매워.”

“독하게 살아야 무시당하지 않더군요.”

물론 스무 살의 고시생이던 상혁은 모르던 인생의 진리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백성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SG그룹의 핏줄이 되는 것이다.”

“그 전에 대답해 주시지요.”

상혁의 두 눈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백성철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백성철이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그의 처우가 달라질 것이다.

“무엇을 말이냐?”

“아까 전부터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으셨던 그 부분. 제 부모님의 죽음 말입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너희 부모를 죽인 것인지 그것 말이냐?”

상혁과 백성철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 누구도 눈을 먼저 피하지 않았다. 상혁은 그런 백성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말입니다.”

한 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상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백성철은 잠시 후 고개를 들어 천장을 한 번 쳐다본 후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상혁에게 대답했다.

“그래. 내가 죽였다.”

푸화아악!!

그 순간 상혁의 두 눈이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 * *

“빨리!”

“예!”

박정철만 대동한 채 백도현은 일단 엘리베이터 올라탔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엘리베이터 천장과 바닥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훅 내쉬었다.

“회장님은 이 사실을 언제 아신 거지?”

“죄송합니다.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빌어먹을.”

쿵!!

백도현의 주먹이 엘리베이터의 벽을 강타했다. 갑자기 난데없는 사촌이라니. 그것도 자신이 원인 모를 이유 때문에 경계하던 고시생 따위가 말이다.

그것도 삼촌이었던 백성운의 아들.

백성철 회장의 막냇동생인 백성운과는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어릴 때는 형처럼 믿고 따랐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결혼한 뒤 권력을 다 내던지고 낙향했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믿기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백성운에게 아들이 있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지. 회장님이 무슨 수를 쓰셨든 간에, 그놈으로 날 방해하신 거니까.”

“사장님. 진정을…….”

“알아.”

띵!

엘리베이터가 131층에 도착했다. 131층에서 내린 백도현은 회장실로 곧바로 들어가려다 제자리에 멈춰 섰다.

“도현이구나.”

“형?”

그곳에는 백도현의 형이자 백성철 회장의 장남인 백이현이 있었다.

커다란 덩치에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그리고 그냥 말해도 우렁찬 목소리까지.

그가 다가와 백이현의 등을 퍽 두드렸다.

“형한테 전화 좀 하고 그래라.”

“때리지 말라고 했지. 그나저나 형도?”

백이현이 우하하하고 웃었다. 두뇌파인 백도현과는 달리 백이현은 건설사의 사장다운 육체파였다. 그가 말했다.

“사촌 동생이 생겼다는데 와 봐야지.”

백도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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