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핏빛 군주 (2)
한편, 대륙 남서부 에니스 백작령.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정말 오랜만에 활기 넘치는 풍경이군요.’
에클레시아는 휠체어를 멈춰 세워두고 굵은 땀을 닦는다.
뱀파이어들로부터 대륙을 지키는 최전선 에니스 백작령.
현재 이곳에는 수많은 손님이 와있었다.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 예하. 오랜만이십니다.”
“저희가 없는 틈에 순혈의 뱀파이어들을 처치하시다니. 이거 아주 섭섭합니다? 하하.”
먼저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와 소수 정예 성기사단.
일전 순혈의 뱀파이어 릴리스와 노스페라를 토벌하기 위해 만나보았던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이곳이 인간들의 땅인가?”
“나무가 거의 없군. 하다못해 풀꽃조차 없는 흙벽뿐이야.”
“어허, 헌담 멈춰라. 이곳 또한 용족께서 굽어살피시는 땅이야.”
그다음으로 찾아온 손님들은 다름 아닌 엘프였다.
대륙 남서부, 숲의 수호자 엘프들.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를 따라온 이들은 하나 같이 뛰어난 궁수들이었다.
궁왕 엘레노아와 최정예 레인저는 물론, 평범한 피난민조차 인간 궁수보다 실력이 월등했으니까.
종족 전체가 막강한 전력이었다.
“제논. 네카르 경께선 이미 여길 떠나셨다니까? 이젠 여기 없어.”
“하지만 내 가슴 속에,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계신걸!”
“얘들아, 고생했고 도착 증명부터 하자. 그래야 입금받지.”
마지막으로 대규모 용병들이 도착했다.
얼마 전 대륙 서부에 있었던 천공대결전.
공중요새 라퓨타를 막기 위해 전 대륙에서 몰려왔었던 용병들.
그들이 아직 멀리 떠나지 않은 만큼 가까운 남서부에 일거리가 생겼다고 하자 구름처럼 몰려든 것이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더니. 서부에 변이 생겼던 게 오히려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요.’
성녀 에클레시아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대륙 서부의 난리로 에니스 백작령이 버려졌으니까.
대륙에서 관심주지 않고 반쯤 버려뒀던 에니스 백작령이 꽉 찰 만큼 북적북적하니 느낌이 다른 것이다.
모든 것이 프레야 여신의 안배라는 생각에 기도드릴 수밖에 없었다.
또각또각.
그때 여사제 한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독대를 청한다.
“······에클레시아 예하.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위중한 이야기입니다.”
“앗, 미케일라 경? 물론입니다.”
세인트 발키리 미케일라.
그녀는 과거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를 발견했을 정도로 뛰어난 수색원이기에 큰일이 있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무슨 일이신가요?”
“루크레치아 예하를 따라 남서부 숲을 둘러보았을 때 불길한 정보를 보았습니다. 비정상적으로 황량한 숲을요.”
미케일라는 미리 가져온 기록용 구슬을 꺼낸다.
마나를 불어넣자 기록된 동영상이 비친다.
휘이잉······.
동영상에는 바위산 정상에서 일대를 둘러다 본 모습이 담겨 있었다.
풀 한 포기 없는 땅.
육안으로 보이는 모든 곳이 적갈색 황토다.
[끄아아악!]
심지어 뒤편에서 고통에 찬 엘프의 비명이 들린다.
동영상 초점이 홱 뒤로 돈다.
고오오오!
그곳에는 얼마 남지 않은 녹색 숲과 붉은 안개가 보인다.
그곳에는 피 한 방울 없는 시체가 가득하다.
그동안 뱀파이어에게 납치돼서 사라졌던 인간 주민들도 한가득하다.
강물에 시체가 쌓여 내려가질 않는다.
미케일라는 말한다.
“뱀파이어는 격이 높을수록 짙은 피 안개를 형성한다고 하죠. 그런데 저희가 본 혈무(血霧)는 순혈의 뱀파이어와 동급, 혹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것도 서너 명이 말이죠.
미케일라는 엄숙하게 말한다. 순혈의 뱀파이어. 그들이 에니스 백작령 사람들에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인지 아니까.
“그런데, 흡혈귀들의 말에 따르면 저들의 왕이 강림할 것이라고 합니다. 뱀파이어 일족의 영웅이라지요.”
미케일라는 자신이 보고 온 것을 모두 고한다.
마신 문두스와 박빙이었던 혈마거인과 진혈왕자의 유언까지. 에니스 백작령의 책임자가 에클레시아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확실히. 마신 문두스 공께서도 그 이상의 존재가 강림할 거라고 말씀하셨지.’
꿀꺽,
에클레시아는 남몰래 침을 삼킨다. 마신 문두스가 떠나기 전에 남긴 말이 있었으니까.
‘혈마왕 블라디미르 폰 체페슈. 성서에도 기록된 거악 중 하나였죠.’
에클레시아는 성서 일부분을 떠올린다.
[······핏빛 군주가 도래한다.]
[하늘이 붉어지고 짙은 피 냄새가 대륙을 뒤덮는다.]
[붉은 기둥이 땅과 하늘까지 이어진다. 그 파괴력은 가히 대륙 전체를 저승으로 바꾸려던 ‘불사왕 데힐라칸’을 넘어섰다.]
선과 질서의 여신 프레야가 만든 다채로운 아르카나 대륙이 온통 붉은 피로 뒤덮였다는 내용.
불사왕 데힐라칸은 최초로 대륙 7대 성인이 집결했을 만한 거악이거늘.
아무리 리치로서 단일 개체가 강한 건 아니라지만, 그 이상이라니.
일부 사제들은 이는 사실이 아니라, 문학적 비유이자 과장이라고 해석할 정도다.
그러나 순혈의 뱀파이어마저 동시에 둘이나 처치한 마신 문두스조차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인 걸 보아 비유일 리 없다.
과연 그자를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어쩌면, 에니스 백작령을 버리고 후퇴하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세인트 발키리 미케일라는 진심으로 조언한다.
순혈 뱀파이어 둘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프레야 교단 전력으로 버거웠거늘.
그 이상의 존재를, 더 많은 적과 싸운다니 승산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아뇨. 에니스 백작령은 대륙 남서부를 지키는 핵심 도시. 이곳이 뚫리면 대륙 서부까지 한 길이에요.”
다만 성녀 에클레시아는 고개를 젓는다.
에니스 백작령.
이곳은 뱀파이어들이 남서부 밖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 인간 최후의 요새이므로.
에니스 백작령이 뚫리면 수천, 수만 명의 주민이 대피해야 한다. 서부에서 큰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얼마나 많은 아사자가 나올지 모르는 일.
“하시면?”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죠.”
순순히 물러날 생각 없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
그것이 그간 에니스 백작령을 지킨 원동력이었으니까.
‘또한, 네카르 경께서 남겨주신 비책도 있으니까.’
에클레시아는 전달받은 순례자의 십자가와 ‘비밀편지’를 고쳐 쥔다.
네카르가 황실의 지원을 받고 싶으면 꼭 그 사람에게 보내라고 했으므로.
이를 따르는 것이다.
***
니케아 제국 황궁.
황실 기사단 수련실.
드넓은 연무장에 한 중년 사내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목검을 휘두른다. 한번 열 번 백번 천번.
몸에 구슬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중년 사내는 목검을 휘두른다.
이를 지켜보던 시종들은 남몰래 속삭였다.
“······야, 검왕(劍王) ‘알렉스’ 경께선 참 대단하시네. 어떻게 매일 같은 시간에 검술을 연마하지?”
“몰랐어? 옆 대륙의 ‘검신(劍神) 카를’에게 패한 후, 설욕하기 위해서 십 수년간 칼을 가신다잖아.”
“또 싸울 일이 있긴 있어? 옆 대륙이랑 전쟁할 것도 아니잖아.”
“······.”
검왕 알렉스라고 불린 중년 사내는 시종들의 잡담을 무시하고 목검을 계속 휘두른다.
겉으론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지만, 속으론 심란한 마음을 삼킨다.
지금 그를 혼란하게 하는 건 전혀 다른 이유이므로.
‘로얄가드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고······?’
그는 떠올린다.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가 남몰래 보낸 편지.
그 편지에는 충격적인 내용뿐이었다.
마신 문두스가 황제를 떠난 이유를 알고 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
‘확실히 나도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이번 출병 때도 멋대로 회군 명령이 내려왔으니까.’
검왕 알렉스는 천공대결전 때를 떠올린다.
사실 그는 마신 문두스의 지원 요청을 듣고 로얄가드를 이끌고 출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궁에서 갑자기 반란의 기미를 발견했다며 급히 돌아오라는 서신이 왔다. 발신자 이름은 없지만, 황제의 옥쇄가 찍힌 서신.
그래서 돌아가 보니 황제 세실리아는 자신은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이젠 알렉스마저 제 명령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눈치.
‘미쳐버릴 노릇이군.’
알렉스 드 라피스는 검을 내려두고 한숨을 쉰다.
‘십수 년 전에 폐하께서 우리 가문을 구해주셨거늘. 그 은혜를 내가 어찌 잊는단 말인가?’
먼 옛날, 당파 싸움에 휘말려 반역자로 몰렸던 라피스 남작령.
그 당시 현군이었던 세실리아가 친히 진상조사 하여 구원해준 덕분에 알렉스를 비롯한 가문 사람 모두가 살아남았으므로.
검왕이 되고, 로얄가드의 수장까지 오른 지금에서도 충성을 바치고 있거늘.
한순간에 배은망덕한 놈이 돼버린 현실이 답답했다.
‘대륙 남서부로 지원 온다면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려주겠다고 했지.’
편지의 마지막 문구를 떠올린다.
혹시 최근 에니스 백작령이 뱀파이어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어서 거짓 편지를 보낸 걸까?
‘아니다. 오히려 반대야. 황실 첩보 기관에 따르면 현재 마신 문두스가 에니스 백작령을 구원해줬다고 하니까.’
만약 어지간한 상황이었다면 마신 문두스가 홀로 처리했겠지.
굳이 위험을 무릎 쓰고 거짓 편지를 보낼 리가 없다.
“결정 났군.”
알렉스는 목검을 내려둔다. 예복을 갖춰입고 칩거 중인 황제에게 독대를 청한다. 나이든 환관이 길을 막는다.
“알렉스 경. 현재 폐하께선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신 문두스에 관한 이야기라고 전하거라.”
“······!”
현재 비상사태라며 고집부려 들어간다. 황제를 알현하여 자신이 받은 편지를 직접 보여준다.
“······좋다. 이번에는 어떤 이유든 회군하지 마라. 황명이다.”
“명 받잡겠습니다.”
이내 즉시 허락을 구한다.
로얄가드를 이끌고 출격한다.
대륙 남서부, 황궁의 가장 큰 미스터리가 잠든 곳으로 말이다.
***
쐐애애액.
나는 용용이를 타고 차디찬 바람을 맞는다.
바람의 길까지 쓰고 초고속으로 비행한다.
‘······바람이 춥다 못해 쓰라리군.’
-몸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찬 바람이 칼바람처럼 느껴집니다.
-페널티 특성 ‘허약한 몸’이 발동합니다. 추위를 더욱 극심하게 느낍니다!
이젠 정겹기까지 한 페널티 특성 허약한 몸이 발동한다.
팔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찬 듯 몸이 무겁다. 오한이 들어 식은땀이 나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입김을 내뱉는다.
그러나 옷깃을 더욱 단단히 여밀 뿐, 결코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혈마왕 블라디미르.
그 존재는 당장의 수명이 다급하므로. 하이엘프와 드래곤을 발견한 직후 나설 것을 알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거다.
‘슬슬 마경(魔境)이 보인다.’
황야의 땅끝에 검은 토네이도가 보이는 죽음의 땅이 보인다.
마경.
말 그대로 마계화돼버린 땅이므로. 사방으로 넘실거리는 마력 때문에 세계 종말의 날처럼 변해버린 땅이다.
‘이제부터는 타이밍이다. 혈마왕 블라디미르와 마주치면 안 돼.’
나는 알고 있다.
혈마왕 블라디미르.
그자가 다른 거악들과 달리 얼마나 비열한 자인지.
제 수명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자식과 혈족까지 팔 수 있는 자인 만큼, 결전에 먼저 나서기보단 희생양부터 던져놓는 것이다.
‘······윽?’
그때, 저 멀리서 뻗어오는 코 찌르는 피 냄새. 후각을 마비시킬 듯이 독하다.
나는 용용이를 급강하시켜서 바위 뒤에 숨는다. 드래곤 아이로 주위를 둘러본다.
혈무(血霧)가 다가온다. 주위 새들이 겁에 질려 달아난다.
대륙 남서부 일대에서부터 풍겨오는 피의 안개. 이는 도시 하나둘을 집어삼키는 수준이 아니라, 대륙 남서부 전체를 뒤덮을 기세다.
-lv80 혈마왕(血魔王) 블라디미르 폰 체페슈.
시스템 창에서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혈무 속에 존재한다고 표기한다.
저벅저벅, 걸어오는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온다.
‘최대한 우회해서 돌아가야겠군.’
나는 용용이를 낮게 몰아 멀리 피해간다.
현재 내 몸 상태로는 결코 혈마왕 블라디미르를 이길 수 없으므로.
용의 뿔과 환골탈태까지 마쳐야 상대할 수는 강대한 적.
최대한 안전거리를 두고 날아간다.
고오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검은 벽돌로 지어진 첨탑.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거주하는 본거지.
밤의 고성이다.
황량한 황야에 덩그러니 지어진 첨탑 앞에 내린다.
【포스 lv2.】
쿠구궁······.
세로로 뾰족한 성문을 포스의 힘으로 짓누른다. 강제로 열어젖힌다.
‘역시 텅 비었어.’
내부는 마계화로 드넓었다. 인기척 하나 없는 어둠뿐.
햇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도록 창문이 매우 작고 그마저도 검은 커튼으로 쳐져 있는 탓이다.
나는 건물 곳곳에 있는 촛불을 의지해서 1층을 벗어난다. 계단을 타고 오른다.
퉁당당, 퉁당당~.
계단을 밟자 1층 피아노가 멋대로 쳐진다.
왈츠.
무도회에서 귀족 남녀가 짝지어서 춤추는 노래. 그 노랫가락이 무언가 불길하게 음이 낮고 음침하게 울려 퍼진다.
과연 자칭 밤의 귀족이라는 뱀파이어답게 고상한 취향이다.
‘물론 이게 함정 트리거지만.’
다만 나는 알고 있다.
밤의 고성.
이곳에는 진혈의 뱀파이어들이 다른 순혈 뱀파이어들과 다름을 증명하기 위해, 남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트릭이 숨겨져 있다는 걸.
만약 숨겨진 트리거를 파훼하지 않는다면 당장 경보가 울리고, 함정이 발동한다는 걸 말이다.
‘당연히 내가 걸릴 리는 없지만.’
나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자세로 계단을 오른다.
특정 행동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특정 행동을 하면 발동하는 장치니까.
이 성 전체가 하나의 던전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하나하나 공략하는 것도 흥미롭겠지만, 지금은 일단 최단 거리로 돌파해야 겠지.’
복도에 걸린 액자 속 여인과 눈 마주치는 걸 피하고,
멈춰진 시곗바늘을 다시 맞추며,
화분에 예쁘게 핀 꽃을 꺾는다.
그것으로 위층으로 올라갈 권한을 얻는다.
5층 꼭대기로 곧장 도착한다.
‘여기가 혈마왕 블라디미르의 개인실인가.’
나는 방문 앞에서 숨을 고른다.
이 방문은 여는 순간, 트리거와 상관없이 혈마왕과 진혈의 뱀파이어에게 신호가 가므로.
내가 밤의 고성에 침투했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는 거다.
‘결국, 타임어택이란 뜻이지.’
마음의 준비를 마친 후,
거침없이 방문을 연다. 그러자 보이는 건 물이 메마른 거대한 욕조 바닥과 수없이 깨져있는 약병들.
그리고 초대형 거울이 보인다. 용용이조차 전부 담아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둥근 거울.
언뜻 보면 단순히 옷을 갈아입기 위해 만든 거울 같다.
‘하지만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마법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이딴 거울 따위 필요 없지.’
나는 이 초대형 거울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다.
저벅저벅, 걸어서 거울 앞으로 다가간다.
거울에 내 모습을 오롯이 비춘다. 황금빛 머리카락과 깊은 푸른 눈을 가진 젊은 사내의 모습이 비친다.
츠츠츳.
그러나 곧 거울 속 황금빛 머리의 사내는 실제와 달리 사악하게 웃는다. 푸른 눈이 악마처럼 붉게 타오른다.
심지어 멋대로 말을 건다.
[······혈마왕의 혈족도 아닌 것이 내 앞에 서다니. 심히 불쾌하군.]
비웃음이 서린 중저음 사내 목소리.
거울 속 악마는 한 손을 뻗는다.
쩌저적!
그러자 거울을 뚫고 실제 세계로 손이 뻗어 나온다. 이는 원래 내 팔이 아니라 메마른 뼈에 썩은 여우 가죽이 덧붙여진 팔이었다.
그 악마의 손이 날 거울 속 세계로 끌어당기기 위해 날아온다.
【포스 lv2.】
고오오!
물론 나는 이를 예측하였기 때문에 악룡의 힘으로 붙잡는다. 무형의 힘이 악마의 손을 꼼짝 못 하게 옭아맨다.
“내 발로 직접 들어갈 테니 잠자코 기다려라.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
-lv??? ■■■ ■■■ ■■■.
나는 거울 속 대악마에게 삿대질한다.
그러자 놀란 듯 눈동자를 휘둥그레 뜨더니, 클클 미소짓는 악마 형상의 젊은 사내.
[날 알고 있다니. 악마학을 꽤나 깊이 연구한 인간인 모양이구나.]
고오오오오!
그러자 거울 속 세계가 검은 안개로 뒤덮히더니 순식간에 배경이 바뀐다.
내부는 완전한 마계였다. 검은 나무와 썩은 덩굴이 가득한 잿빛 세계. 생명체의 온기가 없는지 눈보라가 불지 않음에도 싸늘한 공기다.
더욱 안쪽으로 들어가니 죽은 생명체들의 뼈가 굴러다니고, 그 위에 썩은 낙엽이 가득 쌓여있었다.
그 정중앙에는 온갖 희귀한 여우 가죽으로 덧댄 옥좌가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는 트롤만큼 거구의 대악마가 앉아있었다.
‘저자가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이었지.’
-lv70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 (본체.)
나는 옥좌에 앉아있는 대악마와 눈을 마주친다.
거대한 뼈대를 썩은 살점과 최고급 모피로 가린 리치. 뼈로 된 팔을 길게 늘여 거울 밖까지 꺼낸 존재다.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대악마 학살을 벌일 때, 끝내 죽이지 못했던 대악마다.
가진 마력만 따지면 탐욕왕 엘드리치와 맞섰던 용광로의 대악마 아바돈보다도 격이 한층 더 높은 놈이다.
마계의 대악마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서열.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저놈과 암흑 계약을 했었지.’
나는 그 상황을 알고 있다.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은 계약자에게 특정 조건에 죽지 않을 축복을 내려줄 수 있었으므로.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살고 싶다는 욕망에 손대면 안 되는 영역까지 건드려버린 거였지.
‘하지만 거울 속 세계의 위리놈을 반드시 처치해야 한다. 마지막 용의 뿔은 저놈이 가지고 있었으니까.’
나는 혈마왕 블라디미르와 계약한 저 대악마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안다.
다음 용의 유산 ‘ㄹ. 드래곤 소울’, 그리고 환골탈태의 비약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저 대악마를 처치해야 했다.
더구나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은 불로장생의 비약을 개발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됐었을 테니까.
원작과 달리 원체 일을 앞당긴 덕분에, 아직 계약한 대악마가 셋이 아니라 하나 뿐이라는 점에 감사해야 할 터.
따라서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강경하고 당당하게 나선다.
“마계 뒷방에 숨어있다고 해서 누구도 모를 거란 착각하지 마라. 나는 네놈이 ‘영혼의 구슬’만 파괴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
영혼의 구슬이라는 말에 지금까지 순수한 호기심만 비쳤던 대악마가 험상궂게 표정을 굳힌다.
영혼의 구슬.
이는 죽음의 악마 위리놈이 생명체의 영혼을 뽑아서 즉사시키는 장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으므로.
[······네놈은 도대체 정체가 뭐냐. 그걸 어디서 주워들은 거냐.]
화르륵!
그러자 두개골의 눈구멍에서 사악한 마력이 불처럼 타오르는 위리놈.
“알 것 없어.”
【워터 소드 lv5.】
서걱.
나는 즉답한다. 워터소드를 만들어서 거울 밖으로 뻗어 나온 팔을 깨끗이 자른다.
스르륵.
이후 나는 아까 악마가 한 것처럼 거울 속으로 손을 뻗는다. 그러자 호수에 손을 담근 듯 들어가는 손.
이후 거울 속 세계로 완전히 들어간다.
마계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