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결급 특성으로 대마법사-109화 (109/140)

109. 순례자의 길 (3)

니케아 제국 황실.

여명의 궁.

어전회의실에 모인 신하들은 최근 예민해진 황제의 눈치를 살핀다.

니케아 제국 황제 세실리아 드 니케아.

이미 수년간 칩거한 그녀가 다시 정사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건 오직 한가지 이유였으니까.

“······폐하, 현재 마신 문두스의 재림으로 대륙 절반이 평탄해졌다는 소식입니다. 동부와 북부, 서부에 있던 분쟁을 뿌리 뽑고 있습니다.”

늙은 신하는 조심스럽게 보고한다.

마법 영상 구슬에 담긴 장면들을 흰 백지에 비춰서 보여준다.

“먼저 동부 사막은 물의 명가 크라우드를 중심으로 저수지와 수로를 놓고 있습니다.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를 처치하고 풍요를 되찾았다고 하옵니다.”

“······.”

첫 번째 동영상에는 목동들이 드넓은 목초지에서 느긋하게 가축을 기르는 모습이 비쳤다.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를 퇴치한 후, 사막이 초원으로 변했으니까.

옛날처럼 내리는 비에 번영을 되찾고 있다.

“허나 가장 번영하고 있는 것은 북부입니다. 설인왕 이미르를 퇴치한 후, 전체적으로 기온이 눈에 띄게 올랐습니다. 덕분에 풍요로운 땅이 크게 늘었습니다.”

두 번째로 비친 곳은 북부였다.

계속된 한파로 마차가 다닐 길조차 얼어버리던 땅이 녹았다.

농민들은 그간 사용하지 못하던 드넓은 땅을 개간하느라 구슬땀을 흘리며 뛰어다닌다.

······물론 여전히 대륙 다른 지역보다는 춥지만. 이들에게 이 정도는 한여름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만년설처럼 얼어있던 북부가 태동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륙 서부입니다. 내전이 종식된 이곳은 오랜 앙숙이던 니케 대영지와 라흐 대영지가 화합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더구나 물의 명가 크라우드와 황금상회에서 서부와 북부, 동부까지 모두 있는 대규모 수로를 짓는다고 합니다. 어쩌면 대륙 절반이 하나의 경제 공동체로 화합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황실 신하들은 기쁜 소식이라며 황제의 비위를 맞춘다.

당연하지만 농업과 목축업에서 거둬들일 수 있는 세수가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상업은 그게 아니므로. 끝없이 세수가 소모되던 내전이 종식되고 번영만이 남아있으므로 내심 들뜰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대륙의 희망이라고 불리던 마신 문두스가 정녕 돌아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다만 브리핑하던 젊은 관료가 가슴 벅찬 나머지 말실수했다.

마신 문두스.

이는 여명의 궁에서 절대 금기였던 단어였으므로. 어전 회의실 속 신하들이 일제히 젊은 관료를 바라본다.

다만 세실리아는 팔걸이에 손을 걸치고 턱을 괸다. 더욱 딱딱하게 표정이 굳는다.

“······그런데도 내 곁에는 돌아오지 않는군.”

살벌하게 읊조리는 혼잣말.

정적이 퍼진다. 뚝뚝 떨어지는 기온.

조금 전까지 희망찼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일전 마신 문두스에게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라고 힘으로 위협도 해보고, 애절하게 호소해봤지만, 씨알도 듣지 않았으므로.

북부의 한파는 녹았어도, 여명의 궁은 여전히 만년설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으니.

“더구나 북부 오르비스 공작 베아트리체도, 동부 패권자 엡실론도 마신 문두스에 대해 모른다고 하였거늘. 이제는 서부 연합군에 합류하여 마신 문두스와 대놓고 결탁하였단 말이냐.”

“······.”

황제 세실리아의 손이 부르르 떨린다. 노기가 더욱 심해진다.

불편한 공기에 모두가 어쩌지 못한다.

황제 세실리아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어전회의를 폐한다는 말도 없이 밖으로 걸어나간다.

“어, 어디 가십니까?”

“내가 나서지 않아도 마신 문두스가 세상을 평탄하게 하니 나는 필요 없지 않느냐.”

“······!”

황제는 초녹색 동공을 살벌하게 빛내며 말했다. 신하들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 모두 엎드린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제국은 태양이 필요하옵니다! 폐하께서 해주셔야 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

대성통곡을 하는 대소신료들.

그러나 세실리아는 그들을 무시하고 여명의 궁 밖으로 나간다. 자신의 침실로 돌아간다.

“······.”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묵한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이젠 로얄가드조차 내 말을 듣지 않는 건가.”

로얄가드.

니케아 황실을 지키는 최강 기사단. 12명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오직 황제의 명만을 따랐거늘.

마신 문두스를 생포해오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황실에 계속 남은 것이다.

“······실베스타. 네가 없는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구나······. 누구도 진정 내 편이 아니니······.”

의자에 주저앉자 무거운 한숨을 내뱉는다.

수년간 니케아 제국을 개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법제를 개편하고 지방까지 대리인을 파견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고, 모두 암살당했으니.

정체불명인 ‘악의 세력’이 황실을 장악했다는 걸 체감한다.

전 대륙을 지배하는 황제가 되었음에도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과 좌절감에 빠진다.

“네카르라고 했나······. 마신 문두스. 왜 그런 가명을 쓰고 내게 돌아오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내게 세상은 너밖에 없거늘.”

***

나는 베아트리체와 함께 어둠의 숲을 걷는다.

도플갱어의 뱀파이어.

어둠의 숲을 장악한 그 흡혈귀를 물리치고, 고대의 성물 ‘순례자의 십자가’를 차지하기 위하여.

대륙 남서부의 하나단 영지를 구원하기 위하여 말이다.

‘······생각보다 몸 상태가 더 심각하군.’

-경고! 용족의 파괴 본능이 46%를 넘어섰습니다!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은 충격! 용의 권능을 사용할수록 악룡에 가까워집니다!

.

.

다만 나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하나단 영지민에게 잠깐 발동한 드래곤 피어.

그것만으로도 다소 두통이 생겼으므로.

슬슬 차오른 파괴 본능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다.

“헉. 네카르 경? 괜찮아요? ······설마, 일전 마나 고갈이 덧난 건 아니죠?”

“······.”

함께 걷던 베아트리체가 놀라 날 챙긴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손사래를 치려고 했다.

쿠구!

“······!”

나도 모르게 손에서 마나가 일부 뿜어진다. 위협적으로 방출되는 마나.

베아트리체에게 닿기 전, 간신히 붙잡는다. 놀란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한다.

‘······앞으로 용의 권능은 최대한 자제해야겠군.’

새삼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자각한다.

자기도 모르게 파괴적인 힘이 뿜어질 정도니까.

······혹시, 악룡 니드호그와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도 용의 권능을 너무 자주 썼기에 악룡으로 변해가는 거였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쩌면 화이트 드래곤이 오르비스 대학살 이후 잠적한 이유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대지의 기억으로 본 오르비스 대학살은 ‘드래곤 블러드’와 ‘중력 마법’을 극한으로 발휘한 대학살장.

아무리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라도 그 정도 용의 권능을 퍼부었으면 파괴 본능이 대단히 치솟았을 테니까.

어쩌면 자기도 모르게 소중한 사람들을 파괴하고 싶지 않아 아르카나 대륙 깊은 곳으로 숨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뭐, 물론 이는 추측일 뿐,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베아트리체가 묻는다.

이제 슬슬 캄캄한 밤. 숲은 어둠이 더 빨리 찾아오므로.

“아까 말한 대로다. 우리 둘이 들어가지.”

“······!”

혹여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잡는다.

황량한 황야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검은 숲.

사람이 잘 왕래하지 않아서 발자국이 드문 숲을 거닌다.

베아트리체 또한 내심 미지의 공포가 두려웠는지 별 말없이 내 손을 꼭 붙잡는다.

“찾았다.”

그렇게 어둠의 숲을 돌아다니며 찾은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다크 엔트였다.

-그워어······.

-lv35 다크 엔트.

아직 우릴 발견하지 못했는지 고요한 다크 엔트.

이파리가 없이 앙상한 고목이다.

한 그루는 왼쪽에 있었고, 다른 한 그루는 한참 떨어진 오른쪽에 있었다.

‘다만 정작 중요한 건 다크 엔트가 아니지.’

나는 다크 엔트들에 붙어있는 ‘가시 덩굴’을 살핀다.

수없이 뻗어 있는 덩굴이었는데, 그 가시덩굴에는 정체불명의 액체가 묻어있었다.

마치 누에고치처럼 둥글고 찐득한 액체다. 그

“······정말로 사람이 있군요.”

-lv1 하나단 영지민 추로. (가사 상태.)

-lv1 하나단 영지민 제알. (가사 상태.)

베아트리체는 찐득한 액체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을 발견하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다.

사라진 하나단 영지 사람들.

최근 하나단 영지민이 불안해할 만큼, 사라진 어둠의 숲 사람들.

죽었다고 생각한 그들이 액체 베일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도플갱어 뱀파이어에게 당한 사람들이다. 뱀파이어는 피를 먹고 사니까.”

“······!”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다.

뱀파이어.

밤의 귀족이라고도 불리는 그 마족은 결국 신선한 피를 주식으로 삼는 흡혈귀니까.

어둠의 숲에 들어온 인간을 납치해서 살려둔 채 가둬둔 것이다.

'아마 저기엔 순례자의 십자가도 있겠지.'

나는 표정을 굳힌다.

뱀파이어를 처단할 고대 성물. 훗날 혈마왕 블라디미르를 처단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보물이다.

비록 그 십자가는 정화하는 작업이 필요하지만.

내 최종 목표인 그 보물을 비롯한 금은보화 또한 저 액체 안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바로 구하러 가나요?”

스르릉.

베아트리체는 나와 눈을 마주하며 허리춤의 설화검을 뽑는다.

역대 오르비스 공작의 마나가 담긴 검. 서릿발처럼 시린 한기가 전해진다.

진정한 명예를 아는 귀족답게 당장이라도 다크 엔트들을 처치하고 사람들을 구해낼 듯 무서운 살기를 비춘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베아트리체까지 어둠의 숲으로 데려온 이유.

이는 바로 다크 엔트에 붙잡혀 있는 마을 주민들 때문이었다.

저들은 서로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나무뿌리가 서로 이어져 있는 만큼 어느 한쪽이 이상을 느끼면 곧장 덩굴에 있는 생명체를 잡아먹고 힘을 강화하니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선 정교한 공격으로 동시에 처치해야 했던 것이다.

‘더구나 다크 엔트는 뱀파이어와도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지.’

촤아악.

【아쿠아 lv6.】

주위에 흩어져 있는 수분기를 은밀히 모은다.

저 다크 엔트들을 처치하는 순간, 우리가 맞이해야 하는 진짜 적을 맞이해야 하므로.

반짝.

미리 가져온 프레야 사제복을 입고 뱀파이어를 낚을 연기를 시작한다.

그놈은 권모술수로 주민들을 괴롭혔으므로.

이쪽도 작전을 개시한다.

***

어둠의 숲.

도플갱어의 뱀파이어 ‘키예슬’은 아득한 달빛을 보고 깨어난다.

그에게 태양 빛이란 살인적인 더위에 불과했으므로.

햇빛에 닿는다고 타들어 가 죽는 건 아니지만, 프레야의 신성력이 다소 섞여 있는 만큼 최대한 피하는 것이다.

“······그래, 혈마왕(血魔王) 블라디미르 폐하께서 ‘마정석’을 찾으라고 하셨지.”

키예슬은 막 저녁노을이 진 밤하늘을 보며 늘어져라 기지개를 켠다.

혀로 푸른 입술을 핥는다. 최근 하나단 영지민 수십 명을 약탈하고 모은 재물로 어렵게 구한 ‘마력 탐지기’를 살핀다.

“크흐흣,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온 거야. 탈피할 수 있는 기회가······!”

키예슬은 함박웃음을 참지 못했다.

힘과 무질서의 교단 디메토르의 제4군단장 혈마왕 블라디미르 폰 체페슈.

모든 뱀파이어의 왕이기도 한 그분깨서는 자신의 수하들에게 포상으로 자신의 혈액을 일정량 수여하였으므로.

그 피를 마시고 격이 한층 높아질 생각에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다.

“설움의 날로 그걸로 끝이다. 그동안 나보고 천하다며 배척했던 놈들······. 특히 내 이복형제 놈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키예슬은 붉은 눈을 번뜩인다. 최하급 뱀파이어로서, 아주 작은 뿔에서 마력을 발산한다.

뱀파이어는 태어날 때 가진 혈통의 고귀함으로 신분이 나뉜다.

혈마왕 블라디미르와 혈연관계가 가까울수록 강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니까.

키예슬처럼 혈연관계가 너무 멀고 잡다한 피가 많이 섞인 뱀파이어는 같은 뱀파이어라도 마력이 크게 적은 것이다.

“자~. 그럼 찾아보실까. 마정석. 부유왕 엘드리치 폐하께서 잃어버리셨다는 그 보물을 말야.”

삐비빅.

키예슬은 지급 받은 마력 탐지기를 꾹 누른다. 특정 마력을 파악해 포착하는 탐지기.

이 탐지기는 안에 박혀 있는 수정 구슬에서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삐삐삐.

“······어라?”

그런데 키예슬은 탐색 결과를 보고 부자연스럽게 목을 꺾는다.

달칵달칵, 몇 번을 다시 눌러봐도 같은 결과다.

제자리.

지금 어둠의 숲에 마정석이 있다는 검색 결과가 나왔으니.

“설마 불량인가?”

키예슬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다.

대륙 서부에서 패망한 흑마법사들에게 사들인 탐지기. 명품만 취급하는 부유왕 엘드리치가 수없이 뿌린 물건이라기에 믿고 구매했거늘.

결괏값이 너무 이상했으니까.

그러나 혹시 모르는 일이니 속는 셈 치고 눈을 감는다. 제 터전인 어둠의 숲 내부를 미약한 마력으로나마 찾아본다.

쿠과과광!

“!!”

그러나 찾아보기도 전에 들려오는 굉음.

키예슬은 깜짝 놀라 연기 나는 곳을 바라본다.

영혼이 투둑 끊기는 걸 느낀다.

다크 엔트.

제 식량을 비축해둔 권속들이 동시에 쓰러진 것이다.

‘······! 이럴 수가? 설마 다크 엔트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알아챘다고?’

인간이 인간을 구하려고 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버러지 같은 인간들은 동족을 구한답시고 제 목숨 버리는 얼간이들이 수두룩했으니까.

그런데 서로 멀리 떨어진 다크 엔트들이 서로 뿌리가 연결돼 있다는 걸 눈치챘다고?

이는 자신보다 한층 격이 높은 ‘순혈 뱀파이어’조차 쉽사리 눈치채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그들이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힘으로 쓸어버리겠지만.

‘저놈들이군.’

삐삐삐.

키예슬은 당장 연기 나는 쪽으로 향한다.

눈 감고 마력을 느낀다. 한 쌍의 남녀.

한쪽은 검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은 성수를 사용한 모양이다.

그리고 마력 탐지기가 성수를 사용한 쪽에서 발동한다.

마정석.

마계의 군주들이 찾는 진귀한 보물이 있다는 신호다.

‘그렇군. 마정석을 발견한 녀석이 프레야 교단 순례자였나.’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간다.

순례자의 길.

역겨운 프레야 사제들은 자신의 권역인 하나단 영지를 시작으로 순례라는 귀찮은 활동을 했으니까.

멍청하긴.

제 발로 죽으러 와줬다니 이쪽만 고마울 뿐이다.

‘일단 여자 쪽부터 처리해야겠군. 사제 쪽은 위험할 수 있으니.’

스르륵.

키예슬은 제 몸을 찐득한 액체로 바꿔서 흐물흐물 변신시킨다.

검은 로브로 몸을 가린 젊은 여인의 외형을 똑같이 복사한다.

도플갱어 능력.

뱀파이어는 태어날 때부터 각자 한 가지 이상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으니.

키예슬의 능력은 최하급 권능 의태.

직접적인 힘은 없어 최하급으로 분류되지만,

그래도 멍청한 인간들을 사냥하는 데에는 쓸모가 있어 변방에서나마나 연명하게 해주는 능력이다.

“참 아름답군. 인형처럼 새하얀 목덜미라니. 나중에 입술로 꼭 물면······. 아니, 내가 순혈 뱀파이어로 격이 상승하면 권속으로 삼고 싶은 소녀야.”

키예슬은 19살 소녀의 모습으로 흐흐 웃는다. 그 또한 밤의 귀족답게 미적 감각이 매우 뛰어났으므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아름다운 것이라면 일단 호감을 표한다.

하지만 지금은 노닥거릴 때가 아니다.

제 일생의 신분 상승 기회가 눈앞에 있으므로. 태어난 지 50년 만에 발생한 기회인 만큼 곧장 사제에게 다가간다.

또각또각.

“······앗, 사제님! 큰일 났어요! 저쪽에 찐득한 액체에 갇힌 신도님이 위급해요!”

키예슬은 젊은 여자인척 연기하며, 대놓고 젊은 사제에게 달려갔다.

물론 신성력을 가진 사제들은 마력에 본능적으로 민감하여 평소엔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위험을 감수할 만 하다.

마정석을 빼앗으면 돌아올 보상이 너무 컸으며,

한심한 종족인 인간들은 적대적인 기운을 느끼고도 몇 번이고 확인해보는 멍청함을 가졌으니까.

대놓고 모른척하면 일단 거리를 주는 것이다.

‘후후, 만약 의심하면 찐득한 액체에 묻은 마력이라고 둘러대면 되니까.’

고오오!

그러면서 키예슬은 남몰래 흑마법 주문을 외운다.

아무리 최하급 뱀파이어라고 해도 마족은 마족.

제 몸에 있는 마력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으면 흑마법의 최고 화력 중 하나인 ‘헬파이어’를 시전할 수 있으므로.

처음부터 전력으로 나선다.

어둠의 숲이 전부 불바다가 되더라도.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확실히 태워죽일 생각이다.

“드디어 왔냐.”

이에 사제 복장을 한 황금빛 머리카락의 젊은 사내가 씨익 웃는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환영하는 표정.

과연 하찮은 인간 종족이다. 지금 자신의 품에 어떤 흑마법이 발동하고 있는 줄 모르고.

“예······. 흑, 흑······. 너무 무서웠어요······.”

키예슬은 적당히 우는 연기를 하며 말했다. 남자란 족속들은 우는 여자 앞에 한없이 멍청해지는 자들이므로.

“미안한데 시스템 창에 다 보여.”

그런데 젊은 사내가 이상한 말을 한다.

······시스템 창?

무슨 말일까? 혹시 자신이 변장한 여자와 미리 입을 맞춰둔 암호라도 되는 건가?

“애초에 그 녀석은 우는 소리 내지도 않고.”

그때 사내가 입꼬리를 슬며시 올린다.

깊은 푸른 눈에 빨려 들어간다. 불길함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마치 맹수를 맞닥뜨린 듯 ‘어서 도망쳐!’라고 고함치는 듯 하다.

그렇게 강한 불길함을 느꼈을 때,

콰아아아!

사내의 몸에서 거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와 그를 짓눌렀다.

항거할 수 없는 압도적인 격차였다.

그 거대한 힘은 감히 인간 따위가 가질 수 없는 거대한 마나.

무시무시한 마나가 괴생명체처럼 뿜어진다.

······마치 오르비스 대학살 때 강림했다는 악룡처럼.

“고맙다. 네가 가진 고대 성물은 네 주군을 처단할 때, 잘 쓰마.”

인간은 건방지게도 평소 자신이 짓던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이를 신경 쓸 여력도 없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다. 마나의 격차만으로 의식이 소멸한다.

그의 몸이 마나에 휩쓸려 으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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