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순례자의 길 (2)
프레야 교단 서부 대성당.
‘아린’ 유모는 보고서를 수북이 들고 베아트리체의 방으로 가져간다.
서부 성전이 끝난 후, 전투함 손실과 병사들의 처우 등을 계산해야 했기 때문이다.
똑똑.
“베아트리체 저하. 전투 보고서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린 유모는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읜 베아트리체를 양어머니처럼 기른 돈독한 사이지만, 밖에서는 깍듯이 대한다.
이제 베아트리체는 딸 같은 아가씨가 아니라 무려 오르비스 공작이니까. 그녀의 권위를 세워주는 거다.
“······저하?”
다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없다.
혹시 피곤함에 낮잠이라도 주무시는 걸까?
조용히 보고서만 두고 나오려고 조용히 들어갔을 때,
끼익.
“!”
그런데 방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사인을 마친 결제서류만 가득 쌓여있을 뿐. 인기척이 없었다.
“······서, 설마! 납치라도 당하신 건가?”
아린은 얼굴이 파리해진다. 당황해서 부산을 떤다. 그 동안 이런 위협이 없었던 게 아니므로.
황제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마신 문두스가 그녀의 침대에서 쉬고 있다고 들었거늘. 그조차 보이지 않는다.
신기했던 새끼 드레이크도 보이지 않는다.
아린은 당장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기사들을 불러모으려고 할 때,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쪽지 하나를 발견한다.
확실하다.
분명 베아트리체의 필체다. 이 말은 그녀가 직접 쓰고 나갔다는 뜻인데?
다시 보니 창문 하나가 반쯤 열려있다.
‘······잠깐? 혹시?’
아린은 빈 침대를 다시 살핀다.
네카르라는 젊은 마법사 사내가 기절해있었다는 침대.
그리고 천공대결전 때, 베아트리체가 질렀던 비명을 떠올린다.
[······네카르.]
[네카르.]
[네카르!]
소란스러운 전장이었기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휘부에서 계속 베아트리체만 보고 있던 아린만은 그 애타는 울음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으니.
“어머.”
그렇게 된 거구나.
이제야 상황이 납득이 간다. 흠흠, 헛기침을 한다. 부끄러운 미소를 감춘다.
하기야 베아트리체 저하도 이제 다 큰 성인. 특히 귀족 영애분들 중에서도 성숙하신 아름다움을 뽐내는 아가씨이니.
“헉? 그 무슨? 지금 당장 비상종을 울리겠습니다. 당장 기병대를 풀어서 수색을 하지요!”
오르비스 기사단장에게 찾아가서 상황을 고한다.
지금 그들에게는 제 주군이 갑자기 사라진 상황이므로.
“아닙니다.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예?”
펄쩍 뛰는 호위 기사를 진정시킨다.
눈을 감고 상상력을 더한다. 그녀의 취미는 독서.
······남들 몰래 로맨스 소설을 읽는 중년 여인이었으므로.
“별 일 아닙니다. 잠깐 혼자서 바람을 쐬신다고 하셨으니, 신경 안 쓰셔도 괜찮을 듯 해요.”
“하, 하지만! 그래도 경호는······.”
“혼자 있고 싶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공작 저하께 진노를 살수도 있어요.”
“!”
유모라는 신분을 밝히고 기사들을 설득한다.
최근 베아트리체가 오르비스 공작에 오른 후, 쉴 틈 없이 바빴다는 걸 아니까.
‘좋은 시간 보내시게 도와드려야겠네.’
유모로서 오랜만에 한 건했다는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 또한 아버지 몰래 자유연애를 해서 배우자를 만났으므로.
젊은 날의 추억과 낭만을 떠올리며 하루쯤 휴일을 지켜주는 거였다.
***
휘이이잉.
한편, 베아트리체는 용용이를 타고 하늘을 비행한다.
떨어지지 않도록 앞좌석에 앉은 네카르를 꼭 끌어안은 채로. 찬바람을 맞는다.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나와 단둘이 가고 싶은 곳이라니.’
괜히 심장이 두근거린다. 마침 떠오르는 바도 있다.
네카르는 북부에서 서부로 떠날 때, 다시 만나면 선물을 주겠다고 했으므로.
아마 그 선물을 주기 위해 특정 장소로 데려가는 모양이겠지.
‘나는 눈치 있는 여자니까. 적당히 모른 척해주고 깜짝 선물을 기대해야지.’
도대체 얼마나 거창한 선물을 주시려고 이렇게까지 날아가시는 걸까?
자꾸 휘날리는 제 머리카락에 계속 손이 간다.
짧게 다듬어서 아직 어색한 머리카락이지만. 그래도 제법 아름답게 휘날린다.
‘용용이를 타기 위해선 뒤에서 끌어안아야 하니까. 설마 이것도 계획 일부려나?’
여자의 본능으로 직감한다.
새삼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걸 느낀다. 왜인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린다.
내려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말을 고른다.
‘······그런데 너무 멀리 가는데?’
다만 무언가 일이 이상하다는 걸 직감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한참 날아갔는데도 도무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
용용이가 날아가는 곳은 프레야 교단과 한참 떨어진 대륙 남서부.
황량한 황무지에 있는 중형 영지 방향이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결국 의구심을 참지 못하고 네카르에게 대놓고 묻는다.
자신이 상상하던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으므로.
이에 네카르는 답한다.
“순례자의 길. 그 입구에 있는 ‘하나단’ 남작령으로 가는 중이다.”
······순례자의 길?
들어본 적 있다. 니케아 제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대륙 서부와 달리, 그 아래 남서부는 황량한 초원 지대.
동부 사막과 마찬가지로 ‘마경(魔境)’이 있는 곳이라 치안이 대단히 나쁜 곳이다.
그로 인해 프레야 성직자들이 신앙 활동을 하기 위해서만 찾아가는 곳이라고 불려서 ‘순례자의 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북부와 서부가 교역하는 종착지이기도 한 곳이지.”
“그게 왜요?”
“이곳에 사람들을 습격하는 뱀파이어가 숨어있는 ‘어둠의 숲’이 있다.”
“!”
베아트리체는 뱀파이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뱀파이어.
남서부에서 출몰한다는 마족 중 하나로, 북부의 설인처럼 대단한 힘과 흉포함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있으므로.
“그 어둠의 숲을 해결하면 차기 남서부 지역을 개척하는데 발판이 될 거다. 북부 교역로까지 이어져 있으니.”
“······.”
“하지만 그 곳을 해결하려는 데, 나 혼자선 안 된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
베아트리체는 그런 곳은 다른 기사들이랑 가면 되지 않느냐고, 괜히 실망했다가 마지막 말이 귀에 꽂힌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필요하다는 말에 마음이 덜컥 움직인다.
친아버지를 죽였던 양부 베르너 공작부터,
설인왕 이미르, 그리고 탐욕왕 엘드리치의 공중요새 라퓨타까지.
언제나 그녀는 네카르에게 도움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그 빚을 작게나마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의 가치와 자부심이 드높아졌기 때문이다.
‘다른 걸 생각했던 건 저 뿐이었군요.’
······비록 자신이 생각하던 이벤트는 아니었지만.
이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일 테니.
“무슨 일이신데요?”
선선히 네카르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제 막 전 대륙과 교역로를 뻗어나가는 북부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었기에.
오르비스의 공작으로서 진지하게 받아드린다.
***
대륙 서남부 ‘하나단’ 남작령.
나는 베아트리체와 단둘이 하나단 남작령에 도착했다.
북부부터 서부까지 이어지는 니케 강과 맞닿은 항구 도시라고는 믿을 수 없게 황량한 도시.
흙먼지가 불어 닥치고, 마을 사람들이 희망을 잃었는지 생기가 없는 곳을 거닌다.
치안이 나쁜지 저녁 5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가게 문을 닫는다.
“예전 공녀 때,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도 지금처럼 변장하고 다녔는데.”
베아트리체가 검은 로브에 제 얼굴을 가리며 배시시 웃는다.
그녀의 푸른 머리카락과 인형 같은 외모는 주위 이목을 너무 끄니까.
나와 함께 인피면구로 외형을 변경하고도, 습관적으로 제 얼굴을 가리는 것이다.
“불편하겠군. 최대한 빨리 끝내겠다.”
나는 그녀가 오르비스 공작으로서 바쁘다는 걸 알기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고대 성물 ‘순례자의 십자가’.
피를 성수로 바꿔버리는 그 성물은 뱀파이어의 천적이기에,
혈마왕 블라디미르와의 결전을 대비해 미리 챙기러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곳은 ‘도플갱어’ 능력을 가진 뱀파이어가 있다는 거군요?”
베아트리체는 내가 설명해준 바를 복습한다.
도플갱어.
대상의 ‘외형’을 복사하는 능력.
당연하게도 능력마저 따라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뱀파이어와 인간을 분간할 방법이 없는 일반 병사들에게 대재앙 같은 권능이므로.
“그래, 여럿이서 들어간다면 오히려 위험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혼자서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
도플갱어의 뱀파이어.
그 자를 ‘완벽히’ 없애기 위해선 최소 두 명이 있어야 하므로.
날 믿고 움직일 수 있으면서도 뱀파이어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능력자로 베아트리체를 데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방심하지는 않는다. 흡혈귀는 하나하나가 마계의 악마에 버금가는 존재들이니.’
다만 아무리 베아트리체라도 뱀파이어는 위험할 수 있다.
뱀파이어.
밤의 귀족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본래 마계의 존재로서, 하나하나가 재앙적인 힘을 가졌으니.
악마보다 생명력은 부족하지만, 그 파괴력은 한수 위인 경우가 많다.
더구나 은신이 뛰어나서 기습과 모략에 능한 자들이니까.
악마들의 공략법을 전부 외우고 있는 나에겐 어떤 의미에선 훨씬 까다로운 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곧장 어둠의 숲으로 가려는데,
“이봐, 거기 노란 머리. 못 보던 얼굴인데. 이방인이냐?”
“?”
-lv15 하나단 영지 깡패 파르.
그때 체격이 다부진 30대 사내가 어슬렁거리면서 다가온다.
손에 피 묻은 몽둥이를 든 채, 외지인이라고 우선 위협부터 한다.
상대가 불친절한 만큼 나 또한 퉁명하게 답한다.
“무슨 일이지?”
“모르겠으면 일단 따라와라. 그럼 알게 될 테니까.”
“······.”
흉흉한 목소리로 위협하는 깡패. 마치 안 따라오면 죽여 버리겠다는 눈빛을 보이며 뒤를 돈다.
물론 체격이 뛰어나다고 한들 내겐 별로 위협적인 레벨은 아니다. 힘으로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꺄악! 이러지 마세요! 저흰 정말 ‘마녀’가 아니라니까요!”
“?”
그때, 마을 외각에서 뾰족한 비명이 들린다.
나와 베아트리체는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후, 소리 나는 곳으로 향한다. 베아트리체는 평소처럼 딱딱하게 무표정을 유지한다.
‘역시나.’
성 밖에 있는 구석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크게 두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어둠의 숲’에서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건데? 증명해봐!”
-lv13 하나단 영지민 핫산. (도끼.)
-lv12 하나단 영지민 비티. (몽둥이.)
먼저 한 쪽은 젊거나 중년 주민들.
마치 깡패 무리처럼 각자 나무 몽둥이와 칼을 든 채 의심에 가득한 눈초리로 다른 무리를 바라본다.
“그, 그걸 저희에게 따지셔봤자······.”
-lv1 하나단 과부 사라.
-lv1 하나단 노인 라움.
다른 한 쪽은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이나, 남편이 없는 과부 등 소수 주민들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파악한다.
‘마녀 사냥. 뱀파이어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벌이는 짓이군.’
나는 눈살을 찌푸린다.
마녀 사냥.
주로 도플갱어의 뱀파이어에게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벌이는 비상식적인 일이다.
원작 <별들의 전쟁2>에서도 종종 벌어졌던 일.
눈에 보이는 흉포한 늑대보다 더욱 무서운 건 안 보이는 곳에서 이간질하는 모기인 것이다.
“순례하시던 사제님들께서 떠나신 후, 마을 사람들이 계속 사라지고 있어! 범인은 너희 중 한 명이야! 왜냐하면 우린 그때 동안 어둠의 숲에 간 적이 없으니까!”
“히익.”
무리 대장으로 보이는 깡패 파르는 위협적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사람들을 위협한다.
가난하거나, 과부이거나, 거동하기 힘든 노인인 경우, 마을 중앙에 계속 있지 못하고 땔감이나 먹을 것을 찾아 어둠의 숲에 다녀올 수밖에 없거늘.
악마의 증명을 요구한다.
자신이 악마가 아니라는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뱀파이어가 아니라 선량한 시민이란 걸 증명할 방법은 없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시스템 창.
이 창에는 사람의 레벨과 정체가 그대로 드러났으므로.
저들이 아무 죄 없이 누명을 쓴 자들이란 걸 알 수 있다.
“아 물론, 외지인 노란 머리. 네놈도 증명해야 한다. 큭큭, 만약 네가 뱀파이어가 아니란 걸 증명하지 못하면 이곳에서 죽어야 할지도 몰라.”
"어이, 그 옆에 여자. 곧 과부가 될지도 모르니 마음의 준비하라고."
“······.”
파르는 꼴에 계속 협박한다.
다만 나와 베아트리체는 침묵한다. 특히 베아트리체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저들을 노려본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설화검 쪽으로 향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저들은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베아트리체 혼자서도 전멸시킬 수 있으므로.
“내가 진짜 뱀파이어라면 너희가 지금 살아있겠냐?”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대꾸를 한다.
이에 발끈하는 파르와 깡패들.
“뭐야! 이 새끼가? 나는 대륙 서부에서 영지전도 몇 번이나 겪은 전사다! 말라빠진 놈 주제에! 더 모욕한다면 죽여 버리겠어.”
“나는 그 유명한 마신 문두스와 같은 학벌인 ‘에이드라 학파’ 마법사다! 흡혈귀가 나타나면 즉시 처치할 수 있으니 그런 걱정은 마라!”
“······.”
-lv11 2써클 물의 마법사 아노스.
심지어 내 앞에서 자신이 마신 문두스와 같은 학파라고 주장하는 괴짜 마법사도 있었다.
그 말에 베아트리체가 남몰래 짓궂게 묻는다.
‘당신, 에이드라 학파 출신이었어요?’
‘그럴 리가.’
나는 마신 문두스가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라는 걸 아는 몇 안 되는 자.
인간 학파 따위에서 배웠을 리가 없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저들일 뿐이다.
‘하지만 저들 또한 일반 주민일 뿐이다. 무작정 죽일 수 없다.’
저들이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거슬린다고 힘으로 짓누를 순 없다.
그런다고 해서 이런 비극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뱀파이어와 연관된 마을을 들릴 텐데, 그때마다 이런 사람을 모두 처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역으로 제안하지.”
“!”
【드래곤 피어 lv4】
정공법을 택한다.
마을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것은 다름 아닌 뱀파이어이므로.
압도적인 살기로 모두의 입을 닫게 한다.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살기에 다들 사색이 된다.
“으, 으으······?”
"아아악······!"
스킬 드래곤 피어가 레벨4가 되자 주위 공간 전체를 짓누르는 살기로 바뀐다.
다들 땅이 움푹 패이는 살기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심지어 몇몇은 고통스러워한다.
나는 목울대까지 얼어버린 주민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눈을 한 번씩 마주친다.
마지막으로 파르를 노려보며 완벽한 해결책을 내놓는다.
“나와 트리체가 저 어둠의 숲으로 들어가서 뱀파이어의 목을 가져오겠다. 그럼 믿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