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결급 특성으로 대마법사-70화 (70/140)

70. 가짜 마신 (魔神) (3)

니케아 제국 황궁.

오랜 기간 잠적했던 마신 문두스가 북부에 재림했다는 소식에 ‘황궁 회의실’은 발칵 뒤집혔다.

10년 전, 오르비스 대학살 이후, 첫 귀환.

심지어 북부의 왕이라고 불리는 베르너 공작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형했다는 소식이었으니까.

“마신 문두스가 돌아오다니. 드디어 마탑의 우상이 돌아오는 건가?”

“마법의 신이 돌아왔다!”

“어쩌면, 또 한 번 대륙의 미래를 50년 이상 앞당겨 줄 연구 성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황궁 회의실에서 마탑 소속 궁정 마법사들은 환희에 빠졌다.

마신 문두스.

오르비스 대학살 같은 그림자도 있긴 하지만.

홀로 마법의 미래를 50년 이상 앞당겼다는 업적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마법 연구에 미친 족속들로서 일단 기쁠 수밖에 없다.

“이거 북부 교역량이 확 줄어들겠군요. 그럼 예측되는 경제적 혼란이······.”

“지금 빨리 대륙 10대 상회를 초빙해서 북부를 지원하게 해야 합니다! 마신 문두스가 북부 영지를 초토화시킨 후에는 너무 늦습니다!”

회의실 실무자들은 골머리를 앓았다.

지금은 동부의 변 직후.

이미 가용 예산과 중앙 물자를 대부분 동부 사막에 지원한 후니까.

북부가 다급해져도 당장으로서는 마땅히 지원해줄 여력이 없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러나 비상 대책 회의의 주최자인 ‘빈센트’ 후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벌벌 떨었다.

그는 알고 있다.

황궁의 ‘위대한 자’는 ‘마신 문두스’라는 5글자에 경기를 일으킬 거라는 걸.

오르비스 대학살 이후, 하늘 아래 그 어떤 것도 흥미를 보이지 않게 됐지만.

마신 문두스에 대한 집착만큼은 진심이란 걸 말이다.

“마신 문두스에 대한 실상 조사는? 북부는 뭐라고 답했느냐?”

따라서 다급하게 실무자들에게 묻는다.

이에 젊은 실무자는 난감해한다.

“저······. 그게······. 일이 꼬인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저, 이게, 아까 차기 공작으로 등극한 정통 후계자 ‘베아트리체 폰 오르비스’님과 통신한 녹화 기록물입니다만.”

실무자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녹화 구슬를 내민다.

빈센트 후작은 받은 후, 곧장 마나를 불어넣는다.

녹화 구슬에는 앳된 여인의 모습이 잡혔다.

어지간한 미모를 자랑하는 궁인들을 숱하게 본 빈센트 후작조차 헉 놀랄 만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10대 소녀.

허리까지 내려오는 푸른 머리카락과 백옥 같은 피부, 그리고 인형처럼 아름다운 무표정을 가진 귀족 아가씨였다.

베아트리체 폰 오르비스.

차기 공작으로 즉위한, 북부의 패자가 될 존재.

그녀가 고운 입술을 뗀다.

[······황궁에서 조사단을 파견하신다라. 제 친아버지께서 독살당하실 때는 아무리 요청해도 조사단을 파견하지 않으시더니······. 제가 차기 북부 공작으로 즉위하자마자 곧장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신다는군요.]

그녀의 무표정 속에 깃든 감정은 차가운 분노였다.

빈센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침을 꿀꺽 삼켰다.

‘······맞아, 전전대 오르비스 공작 베네딕트. 그자가 암살당했다는 루머가 있었지.’

빈센트 후작은 베아트리체의 조사 파일을 열어 친아버지 베네딕트의 자료를 열람한다.

이 또한 10여 년 전, 그러니까 ‘오르비스 대학살’이 있기 얼마 전 있었던 독살 사건이었으니.

그 당시, 지금은 칩거한 황제의 개혁 정책과 귀족 반대파의 격렬한 반발.

그리고 중앙 반란으로 미처 북부까지 신경 쓰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베아트리체는 계속 말한다.

[그것도 10년 이상 잠적한 마신 문두스가 나타났다는 허무맹랑한 이유로 조사단을 파견한다니. 제가 어리다 하여 북부 오르비스 정통 혈통을 모욕하시려는 것입니까? 혹 정통성을 의심하시는 건지요?]

마신 문두스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차기 공작이 된 것을 진상조사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보인다.

······실상은 황제가 마신 문두스라면 발작하기에 조사하는 것이지만.

상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

녹화 구슬 속 실무관 또한 땀을 뻘뻘 흘리며 말한다.

무려 북부의 왕 같은 대영주가 진노한 상황이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전대 공작 베르너께서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2차 피해를 막기 위함입니다. 베아트리체 공작 저하께서도 위험하실 수 있잖습니까?]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냉랭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전대 베르너 공작을 처형한 건 마신 문두스가 아니라, 동부의 구원자 ‘네카르’ 경이십니다. '우리' 네카르 경께서 흑마법사 잔당을 추적하시다가 베르너 공작과 연루되어 있다는 걸 알아내셨다는군요.]

[······!]

베아트리체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차기 북부의 패자가 동부의 영웅과 저토록 긴밀한 관계라는 건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니.

[허나 그럼에도 강제로 조사단을 파견하신다면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만약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을 경우, 저희 북부는 물론 ‘동부 또한’ 그에 걸맞은 대응책을 낼 것입니다. ······마침 엡실론 공께서도 데힐라칸이 강림했을 때, 동부를 포기하려고 하신 정황에 대해 매우 큰 반감을 품고 계시더군요.]

[!!]

그 말에 녹화 구슬 속 실무자는 물론, 빈센트 후작까지 소스라치게 놀란다.

현재 니케아 제국은 혼란하다.

황제 칩거 이후, 서부는 격렬한 내전 중이고, 남부 자유 도시들은 완전히 독립하겠다고 보이콧 선언 중이니까.

······만약 그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안정된 북부와 동부가 동시에 격하게 반발한다?

통제할 수 없다.

자칫 잘못하면 동북부가 독립해서 떨어져 나가고, 대륙이 5등분으로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최악의 사태까지 번질 수 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황궁 조사단 파견을 재검토해보겠습니다.]

달칵.

그 이후 나온 녹화 내용은 별로 시답지 않은 내용이었다.

빈센트 후작은 녹화 구슬을 끈다.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드리운다.

“이거, 북부에서도 악감정이 쌓인 모양이군요.”

“하지만 폐하께서 그냥 넘기실 리는 없잖습니까?”

“······.”

회의실 사람들은 침묵했다.

황제는 국사를 이미 10여 년간 방치한 인물.

제국의 사정이 어떻든 마신 문두스를 조사해오라고 명할 것이 자명하니.

“어쩔 수 없군.”

빈센트는 어렵게 결단했다.

“북부 공작 저하의 수여식에 축하단을 보내라.”

“예? 그럼?”

“마신 문두스에 대해서는 소문을 들은 후, 적당히 양념치는 수 밖에.”

“······!”

축하단에 조사단 일부를 데려가서, 소문을 듣는 정도는 문제가 아니니까.

칩거한 황제를 달랠 정도만 자료조사 하는 것이었다.

부디 황제가 이번에도 가만히 있기를 바라면서······.

***

나는 비몽사몽 잠에서 깬다.

정신 차려보니 낯선 천장이다.

푹신한 침대와 푸른 이불, 책장 위에 놓인 귀여운 곰 인형까지.

어쩐지 이런 상황에 익숙한 기시감이 들지만.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킨다.

“아, 일어나셨나요?”

“?”

물의 명가 크라우드 때와 마찬가지로, 내 침대 곁에 한 여인이 앉아있다.

일전엔 성녀 루크레치아가 앉아있었다면, 지금은 베아트리체가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과거 루크레치아는 태양처럼 자체 발광하는 여자. ‘대륙 7대 성인인 자신이 돌봐줬으니 감읍하라.’라는 고고한 느낌이었다면.

베아트리체는 달처럼 처연히 빛나는 여인. 깨어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눈치. 한결 편안한 분위기였다.

‘잠깐, 그럼 여기는?’

나는 상반신만 일으킨 채로 주위를 둘러본다. 푸른 커튼과 파란 장식품이 가득한 방.

이곳은 베아트리체의 방이었다.

지금 나는 그녀의 침대에서 누워있었다.

“······아직 수여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른 이를 믿을 수 없었어요.”

베아트리체는 그렇게 변명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머리맡에 물수건이 있는 걸 봐선 그녀가 그동안 간호해준 모양.

“너는, 옷차림이······.”

그제야 나는 베아트리체가 입고 있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그간 공녀 시절에 입던, 검술훈련하기 편한 여리 여리한 옷이 아니었다.

화려하게 펑퍼진 드레스.

하늘처럼 푸르고 긴 천 치마 위에 깊은 바다처럼 짙은 남색 드레스를 덧입힌 2단 드레스였다.

거기에 30개가 넘는 새하얀 보석으로 장식해두니, 샹들리에의 빛만으로도 자체발광한다.

그러한 찬란한 옷을 베아트리체 같은 절세미인이 입으니 주위 시야가 좁아지는 기분이었다.

베아트리체는 그런 시선에 방긋 웃으며 말했다.

“경께서 주무시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손가락에 낀 눈꽃 반지를 보여준다. 나는 그 반지를 알아본다.

‘오르비스 대영주의 반지······!’

북부의 지배자임을 알리는 반지.

이는 이미 베아트리체가 오르비스 대영주로 정식 즉위했음을 증명하는 반지였다.

대륙의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 되었는데도, 내겐 계속 존댓말을 쓰는 모습.

“내가 잠든 지 얼마나 지났지?”

“13일 정도요. 기다리려고 했는데, 오랫동안 잠들어 계시더라고요.”

“······.”

중앙에서 마신 문두스에 대해 조사단을 파견한다는 소식에 서둘러 수여식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기야 베아트리체로서는 내가 진짜 마신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으니까.’

아무래도 내가 진짜 마신이었을 경우를 대비해서, 조사단 자체를 거부한 모양이다.

‘이제 막 대영주가 된 처지에서 꽤 부담스러웠을 텐데.’

막 부임하자마자 황제와 각을 세운다니.

이는 보통 감량이 아닐 테니까.

나는 미안한 마음에 다른 사안을 물었다.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어떻게 됐지?”

“대충 정리됐어요. 노예와 이종족 또한 정식으로 북부 주민으로 편입했으니까요.”

“흑기사와 블랙 이글루는?”

“그 또한 대충 정리됐습니다.”

불법 상회들은 북부 기사가 추격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잠자고 있었던 사이, 굵직굵직한 일들을 알아서 다 처리한 모양이다.

‘과연 베아트리체인가? 하기야 원작에서도 북부를 부흥시킨 위대한 대영주 중 하나였으니.’

원작 <별들의 전쟁2>에서 베아트리체가 괜히 인기가 많았던 게 아니다.

메인 히로인 중에서도 특히 냉철한 판단력과 다방면으로 뛰어난 재능이었으니까.

‘뭐, 그래 봤자 나랑은 관련 없는 일이지.’

실제로 원작 <별들의 전쟁2>에서 베아트리체와 연인이 되는 루트가 있었다.

물론 베아트리체 전용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한다.

생각보다 굉장히 시간이 걸리며, 최종적으로 그녀가 가장 아끼는 장소인 ‘눈꽃의 계곡’으로 가는 퀘스트.

하지만 나는 바쁘기도 하고, 애초에 정신을 잃어서 타이밍도 놓쳤다.

따라서 지금 베아트리체가 내 눈치를 보며 나긋나긋 말하는 것은 단순한 친절. 레지스탕스를 구원해준 호감과 고마움 뿐일 테니.

착각하지 않는다.

“그럼 이제 설인 얘기만 하면 되겠군.”

나는 침대에서 벗어나 외투를 두른다.

베아트리체가 북부의 패자가 된 이상, 앞으로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 제6군단장 설인왕(雪人王) 이미르.

북부를 멸망시키려는 거악을 물리치는 것. 그들의 계획을 막는 일이다.

“엇······? 고생 많으셨는데, 벌써 일 얘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좀 더 침대에서 쉬세요.”

다만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오히려 베아트리체가 당황해서 손을 흔들며 만류했다.

하기야 그녀로선 내가 드래곤 하트가 있다는 걸 모르니까. 심각한 마나 고갈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용용이가 아직 숲에서 기다리고 있다. 괜히 더 걱정 끼칠 필요 없어.’

하지만 나는 한가하게 쉬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지금 바쁘게 움직여야 향후 설인왕 이미르와 벌일 ‘대한파’ 전쟁 때, 조금이라도 더 아군의 피를 줄일 수 있으니까.

베아트리체는 어차피 한 배를 타고 가는 사이인 만큼, 정말 괜찮다고 말해주려는 데.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왜인지 모르게 친절한 시스템 창.

‘뭐지? 원래 안 읽으면 그냥 넘어가버리는 게 시스템 창인데.’

데힐라칸을 잡고 핵심 히든 퀘스트인 ‘용의 후예, 질서의 수호자’와 ‘마신(魔神)으로 다가가는 길’조차 스킵한 시스템 창이 나타난다.

그 때문에 나는 안도감보다는 불길한 감정으로 시스템 로그를 살핀다.

-북부 최고 흑막 중 하나인 베르너 폰 오르비스 공작을 처치하셨습니다!

-4써클 4티어에 도달합니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써클 경험치가 상승했다는 것.

내가 데힐라칸을 처치하고 막 4써클 1티어의 벽을 허물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티어라고 한다. 기분 좋게 읽고 넘긴다.

하지만 다음 줄에 보이는 시스템 로그는 결코 웃을 수 없었다.

-파괴 본능이 7%를 넘겼습니다!

-강력 경고! 파괴 본능이 100%에 도달하는 순간, 악룡이 돼버립니다!

파괴 본능.

용족의 권능을 사용할수록 쌓이는 게이지다.

과거 드래곤 피어만 사용했을 때가 0.3% 정도였거늘.

하르모르 산에 가서 아이스 웜들을 해치우고, 마신으로 군림하니 곧장 7%까지 오른 모습이다.

‘7%라면 아직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이대로 계속 게이지가 쌓이는 건 위험하다.’

나는 진 엔딩을 막기 위해 끝없이 싸워야 할 운명.

앞으로 더 강한 적을 만날 테니, 용의 힘 또한 더욱 끌어낼 테니까.

더구나 중력 마법 다음 권능을 익힐 경우, 얼마나 파괴 본능이 쌓일지 모르니 매사 조심하는 게 옳았다.

어쩌면 용족이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도 자의가 아니라,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건 이게 아니었다.

-파괴 본능이 처음으로 7%를 넘겼습니다!

-히든 퀘스트 ‘마신(魔神)으로 다가가는 길 (2)’에 도달합니다.

-‘대지의 기억’이 발동합니다. 정체불명의 기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앞서 이 길을 간 ‘다른 용족의 기억’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다른 용족의 기억.

이는 아르카나 대륙의 가장 거룩한 존재 중 하나일 터이니.

아무래도 이것을 보라고 시스템 안내창이 나타난 모양이다.

‘대지의 기억 확인.’

따라서 나는 곧장 용족의 기억을 살핀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타이밍이니.

“······윽?”

그러자 머릿속에 막대한 부하가 온다. 머릿속을 수저로 휘휘 젓는 듯한 고통.

“엇? 네카르 경. 무슨 일이십니까?”

베아트리체가 놀라서 무표정이 완전히 깨진 채 달려온다.

그러나 나는 대답할 겨를 없이 양팔로 머리를 붙잡았다. 비명을 지른다.

“네카르 경? 안 돼요. 네카······!”

-대지의 기억이 발동합니다.

-주의하십시오! 다른 위대한 존재의 사념에 잡아먹힐 수 있습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어떻게든 붙잡은 이성이 잠깐 끊긴다.

이후 내 머릿속에 난생처음 보는 장면이 그려졌다.

***

-휘이이잉.

보이는 건 울창한 숲이었다.

폭설이 내리는 걸 봐선 북부는 맞는 모양인데, 난생처음 보는 배경. 왠지 기시감이 드는 장소다.

그러한 숲속에는 수많은 검은 로브들이 가득했다.

흑기사도 완전무장한 채 흰 눈을 맞으며 설산을 포위하고 있다.

그 사이에 중년 베르너 공작도 보인다.

‘여, 긴······?’

나는 사념체로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는다. 대충 어딘지 눈치챈다.

이곳은 과거 오르비스.

과거의 기억 속이다.

-그오오오.

그들 포위에 갇힌 건 화이트 드래곤이었다.

온갖 종류의 흑마법과 강철실로 묶여 있는 모습.

【날, 속였구나······. 인간.】

분노 어린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화이트 드래곤의 언령.

백금처럼 매끄럽게 새하얀 비늘을 가진 위대한 존재가 분을 삭이며 읊조린다.

푸른 눈을 번뜩인다.

‘저건······?’

나는 화이트 드래곤의 분노어린 눈총을 따라 설산 중앙을 살핀다.

중앙 제단에 버려져 있는 건 죽어있는 어린 용. 헤츨링의 사체다.

드래곤 하트는 빼냈는지 가슴이 반으로 갈라져 있는 모습.

[그동안 우릴 속인 건 네년이다. ‘마신(魔神) 문두스’.]

[이곳은 인간의 땅. 네 비극은 너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란 걸 깨달아라!]

【······.】

그러한 화이트 드래곤을 비웃는 흑마법사들.

이미 잡아둔 고기라는 듯 여유까지 선보인다.

무슨 사연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기이함을 느꼈다.

‘마신 문두스는 악룡 니드호그가 아니었던 건가······?’

악룡 니드호그.

원작에서 종결급 레이드 컨텐츠로 나왔었던 악룡.

눈에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죽여버렸기에, 당연히 그 놈이 중력 마법으로 오르비스 대학살을 벌인 악룡이라고 추측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악룡 니드호그는 분명 블랙 드래곤이었으니.

저 화이트 드래곤은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만 죽어라. 용족. 너희는 우리 힘과 무질서의 교단 디메토르에게 너무 큰 걸림돌일 지어니!]

[너의 피와 뼈를 죽이고 '본 드래곤'으로 다시 재창조해주마!]

흑기사와 흑마법사들이 일제 공격한다. 천지가 뒤흔들리는 충격.

-쿠과과광-!!

[키야아아악-!!!]

지고한 존재라는 화이트 드래곤조차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른다.

얼마나 강력한 폭격인지 성체 드래곤이 비늘이 벗겨지고 피를 흘리며 난동을 부린다.

고고고고!

그러나 상황은 곧 반전된다.

피 철갑이 된 화이트 드래곤에게서 붉은 기운이 미친 듯이 뿜어졌으니.

꽈득, 콰드득! 뚜둑!

무시무시한 힘으로 강철실을 끊어버린다. 흑마법 마법진을 쪼개 버린다. 아까보다 몇 배는 강해진 힘과 마나.

나는 저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드래곤 블러드······. 내가 다음번에 얻을 용의 유산이다!’

드래곤 블러드.

평화를 사랑하는 용족이 피를 흘리는 순간, 파괴 본능이 깨어나는 현상.

그와 동시에 기존보다 마나가 몇 배는 강해지는 상태를 말한다. 이른바 폭주 상태.

[구오오오오-!!]

-쿠구구궁-!!

해방된 화이트 드래곤은 중력 마법을 시전한다.

오르비스 산을 짓누르는 막대한 중력.

먼저 설산의 나무와 바위가 모조리 내려앉는다.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에 땅이 무너진다.

[크으읏?]

[크아악!]

흑기사와 흑마법사들도 마찬가지다.

제 자리에 서있던 모든 흑기사가 무릎 꿇는다. 암흑의 힘으로 보호해주는 흑갑주가 금가고 박살난다.

흑마법사들은 저항도 못 하고 흙바닥에 묻은 핏덩이가 되어 죽었다.

그제야 공포가 깃드는 눈동자들.

‘이것이, 오르비스 대학살 사건인가?’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감한다.

그러나 영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어이······. 기어이······!!】

화이트 드래곤은 어린 용의 시체를 감싸 안는다.

이후 악의 졸개들과 푸른 눈을 마주친다.

새하얀 날개를 활짝 펼친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쿠오오오-!!!

슬픔과 분노, 배신감, 절망감이 가득한 울부짖음.

그 울부짖음에 천지는 물론, 밤하늘의 별까지 호응한다.

화이트 드래곤이 또 한 번 중력 마법을 시전한다.

푸른 마나가 어두운 밤을 향해 뿜어진다.

저 멀리 떨어진 달을 향해서.

-쿠구구구구······!!

중력 마법으로 달을 끌어당긴다.

그믐달이 순식간에 보름달이 되고, 이르러 당장이라도 지구에 떨어질 듯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마치 추락하는 듯한 모습.

‘미친.’

나도 모르게 욕을 내뱉는다.

화이트 드래곤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이려는 지 눈치챘다.

-촤아아아아아악-!!!

달이 지구 표면에 가까워짐에 따라 강해지는 인력.

오르비스 대도시 앞 얼지 않는 강이 하늘로 솟구친다. 가까운 바닷물 또한 모조리 일어난다.

그리고 그 거대한 물은 공중에 떠 있는 화이트 드래곤 주위에 모여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든다. 거대한 소용돌이는 유빙 같은 거대 얼음으로 변하여 송곳처럼 날을 벼린다.

해일 스톰.

물의 궁극의 대마법 중 하나.

아쿠아 스톰의 상위 마법으로, 성벽 하나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일대 지형 전체를 소멸시키는 ‘마스터급’ 마법이다.

그 마법이 일거에 내려 꽂힌다.

-콰아아아아앙-!!!!

고막이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하는 소리. 모든 것이 모조리 파괴된다.

드높았던 오르비스 산이 속절없이 무너진다. 이윽고 산 정상만큼 땅속이 움푹하게 파인다. 산봉오리가 새로 2개 생긴다.

오르비스 대도시를 배산임수로서 북풍을 막아주지 못하게 됐다.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

화이트 드래곤은 마치 새끼를 잃은 어미처럼, 어느새 그곳을 벗어난 이들을 향해 읊조렸다.

【나는, 결코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푸른 눈에 검붉은 빛이 뿜어진다. 크아아아, 메아리치는 포효. 2차 폭주를 넘어서 3차 폭주에 돌입한다.

콰앙, 콰아앙, 무시무시한 굉음이 끝없이 일어난다.

나는 새삼 ‘오르비스 대학살’이라는 사건이 얼마나 거대한 일이었는지 체감한다.

영상은 그것으로 끝났다.

***

“······.”

다시 돌아온 현실의 감각.

차가운 물수건이 내 이마를 적시는 촉감에 깨어난다.

눈을 떠보니 베아트리체와 몇몇 사제가 내 곁을 지키고 있다.

“헉. 네카르 경. 정신이 드시나요?”

뭔가 데자뷰 같은 상황.

아까와 달라진 점이라면 베아트리체가 훨씬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안 돼요. 일어나지 말아요.”

"이제 괜찮다."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안정이 필요해요."

“······.”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매섭게 저지당한다.

베아트리체의 정색.

초점이 흔들리지 않는 단호함은 마치 원작에서 동료를 잃고 대학살을 벌이던 배드 엔딩 때 모습이 연상됐기에 나도 모르게 멈춰버렸다.

도중에 기절해버렸으니 일어날 명분도 없다.

따라서 아까 보았던 오르비스 대학살을 복기한다.

‘베아트리체가 레지스탕스 암구호를 왜 보름달로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

단순히 암기했었던 레지스탕스 암구호.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가 보름달을 끌고와서 쓸어버리는 장면을 보니 감회가 다르다.

왜 베아트리체가 자신을 보름달로 상징하고 싶었고, 어둠을 베르너 공작으로 비유했는지 깨닫는다.

‘마신 문두스······. 단순한 광인이 아니라, 질서의 수호자로서 악의 교단과 맞선 자였다. 이거지.’

마신 문두스.

그 자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나는 확실했다.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에 대단히 강한 반감을 품었다는 점.

그것도 ‘해일 스톰’을 시전할 수 있는 압도적인 초강자가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마신 문두스조차 홀로는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를 완전히 박멸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만약 화이트 드래곤이 모든 일을 해결했다면,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을 테니.

하기야 마신 문두스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혼자선 한계가 있다.

나 같은 고인물이 아니고서야 악의 교단 세력이 어디에 숨었는지 다 알 수가 없으니까.

더구나 7명의 거악(巨惡)은 화이트 드래곤와 버금가는 마계의 군주였다.

‘그리고 그 거악들이 현재 내가 적이기도 하지.’

설인왕(雪人王) 이미르.

북부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거악. 그 존재와 당장 전쟁을 벌여야 하니.

새삼 아르카나 대륙이 넓다는 걸 느낀다.

내가 마스터급 특성을 가지고 그동안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였다고 하여 방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별들의 전쟁.

이는 말 그대로 데힐라칸급 거물이 밤하늘의 별처럼 숱하게 많다는 뜻이었으니.

막말로 화이트 드래곤조차 해결하지 못한 적들과 싸워야 하는데, 이제 겨우 4써클일 뿐이니까.

‘더욱 빠르게 성장해야겠군.’

다음 용의 유산은 드래곤 블러드.

방금 영상에서 화이트 드래곤이 해일 스톰을 시전할 수 있었던 궁극의 권능 중 하나.

이를 얻어야 거악들과 단둘이 힘으로 맞붙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물론 이를 얻으려면 한참 걸리겠지만.

‘그 전에, 설인왕은 어떻게 상대했었지?’

고인물의 기억을 살려 파훼법을 복기한다.

원작 스토리의 정석적인 루트라면 대륙 7대 성인이 집결한다.

이후 ‘대성자’라고 불리는 가장 연배 높은 성인이 제 몸을 불태워 이미르를 봉인한다.

많은 유저에게 감동과 숭고함을 선사했던 장면.

‘하지만 그렇게 진행하면, 향후 대성자의 도움을 얻을 수 없었다.’

이는 진 엔딩 때도 치명적이다.

따라서 나는 나만의 루트로 이미르를 처치했다.

‘성물 기간테스의 힘. 그 성물이 완전히 타락하기 전에 탈취해야 한다.’

기간테스의 힘.

그 절대 반지는 고대 대륙을 지배했다는 ‘기간테스’족 거인의 신체를 불러오는 일이다.

내 기억상 프레야 교단이 설립되기 전, 있었던 고대 성자가 기간테스 일족들을 모조리 반지 안에 봉인했다고 한다.

만약 그 반지가 완전히 마기에 잠식돼서, 이미르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면.

그 안에 잠들어있는 수많은 기간테스의 시체가 좀비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전 대륙이 멸망하겠지.'

따라서 내가 앞으로 할 일은 명확하다.

‘베아트리체가 북부 군단으로 설인들을 막는 사이, 절대 반지를 훔친다. 역시 그 방법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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