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결급 특성으로 대마법사-57화 (57/140)

57. 레지스탕스 (1)

3시간 기다리자, 정말로 은빛 늑대 용병단이 집결했다.

축제를 즐기고 온 녀석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라 흔쾌히 반긴다.

그런데 그 중에 눈에 확 띄는 자는 따로 있었다.

"엇?"

데힐라칸을 처치하는 내 모습이 그려진 액자를 꼭 끌어안고 있는 제논.

그리고 그런 동생을 데려오는 제나.

이 녀석들과 눈이 마주친다.

“당신은······?”

제나와 제논은 내 얼굴을 알아보고 숨이 멎는다.

믿기지 않아 두 눈을 끔뻑끔뻑 뜨지만 확실하다.

“네카르 형!”

제논이 얼굴을 확 밝히며 먼저 달려간다. 최근 가장 유명한 날 못 알아보는 자는 없으니.

나는 머리를 쓰다듬는다.

“당신이, 왜 여기에······? 설마 호위받으러 왔다고요? 우리 호위 따위 필요 없잖아요!”

다만 제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아 묻는다.

이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가 마법사 혼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다고 해서. 자다가 산적이라도 만나면 어쩌겠나?”

“······!”

먼 옛날, 제나가 나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참견.

지금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대륙 동부 전체를 멸망시키려 했던 리치 데힐라칸.

훗날 그 괴물을 혼자 처치하는 나한테 밤길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하다니.

펑.

제나 머릿속에서 쪽팔림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낯이 뜨거워 보인다. 눈을 마주치는 걸 피한다.

“흠흠, 이제 슬슬 출발 시각입니다. 다들 마차에 오르시죠.”

은빛 늑대 용병단장 맥스는 웃음을 참으며 동료들을 집결시켰다.

은빛 늑대 용병단 또한 내 얼굴을 알아보고 반긴다.

황금상회 마차 무리가 출발했다.

***

덜컹, 덜컹.

황금상회 마차는 무려 10대나 됐다.

대충 상황을 들어보니 동부에 지원 온 무기들을 북부로 판다고 한다.

북부는 아직 ‘설인(雪人)’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으니까.

‘서로 윈윈하는 교역이군.’

나는 맥스에게 상황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는 동부의 변이 일찍 끝나자 병장기는 많았지만, 파괴된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 나무가 많이 필요했다.

‘나로서도 대한파를 막기 위해선 동부와의 교류가 꼭 필요하다.’

나는 앞으로의 일을 알고 있기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대한파.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의 제6군단장 설인왕(雪人王) 이미르가 성물 ‘기간테스의 힘’을 깨워내고, 북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대참사다.

동부의 변처럼 북부 전체가 멸망하는 사건.

이후 대륙 전체의 기온이 낮아지는 빙하기가 열린다.

이를 막기 위해선 동부를 비롯하여 다른 지원군들도 필요했고, 이를 초빙하기 위해선 경제적 유대 관계도 필요했다.

“그나저나 네카르 경께서 이렇게 유명해지시다니. 하기야 저는 이럴 줄 알았습니다!”

맥스를 비롯한 은빛 늑대 용병단은 날 극히 반겼다.

하기야 내 덕분에 목숨을 몇 번이나 건졌으니까.

그러나 가장 반긴 사람은 역시 제논이었다.

“형, 이번 기회에 마법서에 사인 좀 해주세요. 사람들이 제가 형한테 받았다니까 안 믿어요.”

“그래.”

“아, 맞아! 저 마법서에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그래.”

눈을 똘망똘망 뜨면서 내가 전에 선물해준 바람의 마법서적을 펼친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는지 빼곡히 접혀있는 책.

북부까지 가는 데 한참이나 걸리는 만큼 꼼짝없이 붙잡혔다.

‘사실 나는 마법을 스킬로 익히고 있는 건데······.’

그래도 바람 마법의 특성을 알고 있기에 설명을 못 해주는 부분은 없었다.

내 말을 절대 진리처럼 귀담아들으며 받아 적는 제논.

휘이잉.

“······!”

그렇게 북부로 달린 지 이틀이 지났을 때, 제논의 손에서 짙은 바람이 모였다.

처음 성공한 마법 ‘윈드’.

대단히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나는 솔직히 놀랐다.

‘······성장 속도가 미쳤군.’

-lv4 1써클 마법사 제논.

분명 바람의 마법서를 선물한 지 몇 개월 안 됐는데 벌써 1써클의 벽을 허물다니. 가히 네하린급 재능이다.

제논이 멍하니 날 올려다본다.

“와······. 역시 형한테 배우니까 바로 마법을 체득했어요.”

“······.”

아니다.

제논은 이미 내가 없는 사이에 마법서의 지식을 대부분 쌓아둔 상태였다.

단지 마법 재능이 발화될 때 마침 내가 곁에서 조언해줬을 뿐.

“뭐? 우리 제논이 반년도 안 돼서 마법을 체득했다고?”

“와, 진짜 마탑 마법사는 다르구나!”

“그럼 동부의 영웅이신데 격이 다르지. 제논, 지금 빨리 많이 배워!”

“······.”

문제는 은빛 늑대 용병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혼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끙끙대던 제논이 날 만나자마자 개화한 것으로 보일 뿐.

“형, 다음 페이지도 가르쳐주세요. 이대로 대성하면, 나중에 형을 엄호해줄게요!”

“······.”

덕분에 제논은 더욱 눈을 반짝이며 내게 가르침을 갈구했다.

옆에 있던 제나 또한 염치가 없기에 말은 못 했지만 도와달라는 눈치.

‘대한파가 시작될 때, 은빛 늑대 용병단도 필요할 지 모르니까.’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들의 재능은 매우 탐나는 것이므로.

“달아둘 빚이 늘었군.”

내 말에 옆에서 키득거리는 용병들.

“제나는 도대체 빚을 얼마나 지는 겁니까?”

“이야, 이번에 거금 들어온 것도 동생 마법서적 사준다고 다 썼는데. 이러다 파산하는 거 아니냐? 아니지, 이미 파산했나?”

“······이!”

제나 목소리가 점차 올라간다. 다만 힐끗 내 눈치를 보는 모양.

이를 본 은빛 늑대 용병단은 더욱 장난기가 오른다.

다 같은 고향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동고동락한 용병들.

건수가 잡히면 장난을 멈출 자들이 아니다.

“야, 옛날에 누가 그러던데? ‘빚 꼭 갚을게요. 이자까지 쳐서.’”

“아, 진짜! 하지 말라고!”

“으, 진쯔. 흐지 믈르그.”

몇몇 녀석이 성대모사까지 한다.

제나 빼고 모두가 크게 웃었다.

그러자 함께 마차 앞 좌석에 탄 황금상회 상인들이 버럭 화를 냈다.

“이봐! 용병들. 거 남들도 있는데 좀 조용히 하지?”

“······아, 의뢰인님, 미안합니다.”

“에잉, 하여간 용병놈들은 하나 같이 시끄럽단 말이야.”

퉁퉁한 상인들이 신경질을 부린다. 아무래도 낮잠을 자고 있다가 깬 모양.

상대가 이번 호위의 물주인 만큼 용병들이 헛기침한다.

거기까지는 이해했지만 문제는 다음이었다.

마차가 적막해지자 그들이 잡담하는 소리가 들린다.

“저놈들, 그냥 시시껄렁해 보이는데 진짜 뛰어난 용병단 맞아? 사기당한 거 아냐?”

“그러니까 말야. 더구나 자칭 마법사라는 이상한 행인이랑 노닥거리다니. 저런 ‘마술사’들은 변변찮은 마법 하나 못 쓰는 놈들이 허다 한데.”

“무슨 마법을 반 년만에 체득해? 하여간 용병놈들은 허풍이 심하다니까.”

“······.”

뭐, 흔한 일이다.

대개 용병을 고용해도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기에 상인들은 밥만 축낸다고 생각하니까.

“뭐, 이 새끼들아?”

“아니, 됐다.”

발끈하는 제나를 만류한다.

굳이 고용인과 싸워서 좋을 거 없으니까.

더구나 나는 피식 웃었다.

용병 길드원을 만난 후, 정체를 밝히면 너무 소란스러워지는 것 같아서 검은 로브를 푹 눌러 입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대충 닮았을 뿐, 설마 나라고는 생각 못하고 있겠지.

정체를 밝히게 되면 절대 저런 말을 못 할 거다.

더구나.

-lv14 리자드맨.

-lv13 리자드맨.

.

.

북쪽으로 가다보니 그곳에 있었던 몬스터들이 슬슬 나타났으니까.

-크르릉.

-고오오오······!

“!”

숲길로 들어가니 길목을 자른 통나무로 틀어막고 매복하고 있는 영악한 몬스터 무리가 보인다.

리자드 맨.

일전 동북부 숲에서도 만났던 놈들이다.

히히힝!

쿠당탕!

커브 길 직후, 등장한 장애물에 말들은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통나무 벽에 들이박는다.

“으, 으으······!”

“모, 몬스터다! 진짜 몬스터야!”

“요, 용병들! 뭐 하고 있어······. 빨리!”

공포에 질리는 상인들.

실제로 몬스터를 본 건 처음인지 다들 공포에 질려있다.

-케륵케륵.

그 모습에 더욱 기세를 타는 리자드맨들.

그러나 이번엔 상대를 잘못 만났다.

“아예, 예. 갑니다. 하여간 상인놈들은 급해져야 용병의 소중함을 안다니까.”

제나는 무기를 들고 나선다.

사실 맥스 수준의 용병단은 이제 동부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성.

원시적인 무기로만 무장한 리자드맨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제나는 내게 묻는다.

“같이 싸우실 거에요?”

“아니, 마법사가 전장에 앞에 나서는 건 많이 위험한 거 같아서.”

“······.”

나는 과거 제나가 내게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 한다.

무안한지 얼굴이 새빨개진 제나.

“······알았어요. 쉬고 있어요. 제논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예상과 달리 멋쩍게 말하고 뛰어나간다.

“알면 됐다.”

나는 흠칫 놀랐지만, 덤덤히 말했다.

다만 나는 정말 쉴 생각이었다. 이번엔 같은 행인이 아니라, 비싼 돈 내고 호위를 의뢰한 입장이니까.

굳이 나설 필요 없겠지.

푸확! 크에엑!

실제로 은빛 늑대 용병단은 잘 싸웠다.

두꺼운 가죽 갑옷에 대형 방패를 들고 있기에 쉽게 다치지 않았으며, 레벨이 매우 높은 맥스와 제나를 필두로 진형을 휩쓸었으니까.

각자 망치와 모루가 돼서 몬스터 군단을 박살낸다.

손발이 착착 맞는 용병단이었다.

“자, 상인분들. 다시 출발하시죠.”

“······그, 그럽시다.”

순식간에 몬스터 무리를 쓸어버리니, 자연스럽게 나오는 존칭.

그렇게 분위기가 풀려서 다시 북부로 가던 길이었다.

“······이건.”

그런데 또다시 몬스터 무리가 나왔다.

-lv22 정예 오크.

-lv23 정예 오크.

무려 레벨 20대 오크들.

언덕 위에 5마리나 숨어있었다.

“저희가 처치할까요?”

넌지시 물어보는 맥스.

하기야 5마리 정도면 은빛 늑대 용병단도 처리할 수 있을 거다.

“아니, 너무 지체될 것 같으니 내가 나서지.”

다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레벨 20대면 마나를 터득한 전사 수준.

오크는 엄청난 힘으로 방패를 으스러뜨릴 수도 있으니까. 굳이 유혈 사태를 감수할 필요가 없다.

【아쿠아 레인 lv1.】

촤아악, 쐐애액-!!

나는 물의 명가 크라우드에서 익힌 중급 마법을 시전한다.

아쿠아 레인.

끌어모은 물을 수십 개의 화살로 쪼개서 일대를 쓸어버리는 비기.

-취이익!

-꾸에엑······!

일격에 언덕 위에 있는 오크들을 휩쓴다.

“······.”

상인들은 멍하니 날 바라본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쪽 길에 몬스터가 계속 나오는 것 같으니, 다른 길로 가죠.”

“예? 아. 예예!”

마부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 마차는 다른 길로 돌아서 간다.

“······모두 정지.”

다만 다른 길로 돌아서 갔는데도 또다시 몬스터를 만났다.

-크워오오오-!!

-lv32. 미노타우로스.

그것도 미노타우로스.

깊은 숲에서도, 조용한 동굴 속에서 서식하는 필드 보스다.

평소엔 온순하지만, 한번 흥분하면 주위 모든 것을 들이받고 보는 괴물.

그 괴물이 다른 길을 막고 있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군.’

이에 나는 확신한다.

오크까지는 재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미노타우로스는 전혀 아니다.

상인들이 다니는 인적 많은 길에 돌아다닐 놈이 아니니까.

인위적인 조종.

누군가 몬스터들을 강제로 움직여서 일대를 막고 있는 거다.

‘하지만 누가, 왜? 이런 곳에 길을 막을 이유가 없을 텐데.’

나는 고민에 빠진다.

동부 흑마법사들은 이미 동부의 변 때 대부분 숙청됐으니.

몇몇 살아남은 놈이 있어도, 이런 도로변을 틀어막을 만큼 간 큰 짓은 하지 않을 텐데?

“네카르 경.”

“여기서 기다려라. 상황을 알아보고 올 테니.”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몬다.

시스템 창을 확인하며 주위를 살펴본다.

-lv42 고위 ‘흑기사’ 데인.

.

.

-lv13 ‘레지스탕스’ 스톡웰.

그러자 저 멀리서 이질적인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먼저 흑기사.

이는 북부에서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와 결탁한 기사들을 뜻한다.

북부는 기사도를 숭상하는 만큼, 흑마법사가 아니라 흑기사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레지스탕스라면······. 북부의 공녀 베아트리체가 운영하는 게릴라 부대잖아?’

레지스탕스.

주로 빈민과 이종족들을 주축으로 하는 비밀결사.

제6군단장 설인왕(雪人王) 이미르와 결탁한 ‘베르너’ 공작의 폭정을 반대하는 민병대 조직이다.

비록 아직은 디메토르 교단에 대해서는 모르고, 단지 폭정에만 반대하는 중이지만······.

‘마침 베아트리체를 만나야 했는데 잘 됐군.’

아무래도 흑기사들이 레지스탕스를 소탕하고 있는 모양인데,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갔다.

***

레지스탕스 스톡웰은 자신들이 함정에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린 동족을 구하기 위해 노예 마차를 습격하자마자, 주위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왔으니.

“형아!”

“······어서 도망쳐! 이대로 계곡 길을 따라가!”

화르륵!

스톡웰은 가면을 고쳐 쓰며, 어린 엘프들을 탈출시켰다.

불의 하급 정령 셀레멘더를 소환해서 불을 내뿜으며 몬스터로부터 엄호한다.

“부질없는 짓이다. 귀쟁이.”

“······!”

그러나 저 멀리서 쇳소리가 다가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갑주로 감춘 기사.

셀레멘더의 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들어온다.

스톡웰이 숨을 헉 들이마신다. 사악한 검기가 횡으로 날아왔다.

쿠과과광!

“커헉······!”

불의 정령 셀레멘더가 막아주었지만, 피해를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스톡웰은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셀레멘더는 강제 역소환됐다.

“버러지 같은 것들. 감히 운송 중인 상품을 건드리다니. 죽어 마땅하다.”

철컹, 철컹.

흑기사가 걸어서 다가온다.

스톡웰은 바닥에 쓰러진 채 분을 토해낸다.

“네놈들이······! 우리 숲으로, 들어와서 애들을 노예로 납치했지 않으냐······!”

그러나 흑기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저능한 종족의 쓰임새는 그 뿐이다.”

흑기사는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의 교리를 읊는다.

새까만 기운이 넘실거리는 장검을 어린 엘프들에게 겨눈다.

‘안······. 돼······. 아직 동지들이, 도착 못 했는데······!’

스톡웰은 이를 악문다.

이대로 자신이 쓰러지면 기껏 풀려난 어린 엘프들이 전부 학살당하고 말 테니까.

레지스탕스는 홀로 움직이지 않는다.

조금만 시간을 더 끌면, 탈출로를 지키고 있던 동지들이 무언가 이상하단 걸 느끼고 도와주러 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린 엘프들이라도 살릴 수 있겠지.

어차피 자신은 죽은 목숨,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즉시 행동에 나선다.

“흐아압!”

온 힘을 다해 죽어가는 몸을 날린다.

마지막까지 품에 숨기고 있던 단검을 흑기사의 등에 내리꽂는다.

쨍강.

물론 단검이 흑기사 갑옷을 뚫지 못하고 깨져나갔다. 정령술마저 뚫지 못한 갑옷이니.

“버러지 같은 것. 내 망토에 더러운 피를 묻히는구나.”

흑기사는 제 망토에 엘프의 피가 묻었다는데 진노하여 군화로 쾅쾅 짓밟는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스톡웰의 목적은 흑기사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흑기사의 발을 끌어안고 매달린다.

‘커헉······! 내가, 분풀이라도, 된다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스톡웰은 악착 같이 흑기사에게 매달린다. 이미 팔다리가 으스러졌지만 혼신의 힘으로 매달린다.

어린 동족을 살리기 위하여. 동지들이 와주길 고대하며.

“이 찰거머리 같은 녀석.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아하, 설마 네 동료를 기다리는 거냐?”

발길질을 멈추고 비웃기 시작하는 흑기사.

스톡웰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계속 매달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쿨컥······!”

“······끄으윽.”

“!”

땅굴 속에서 또 다른 흑기사들에게 질질 끌려오는 드워프와 엘프.

피 흘리며 끌려오는 제 동료들을 보고 손에 힘이 풀썩 풀려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또 다른 흑기사가 말한다.

“‘데인’님. 이 저능한 ‘비인간’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재갈 물리고 끌고 가라. 이놈들은 별로 다치지 않았으니, 아직 상품성이 있겠지.”

“알겠습니다.”

또 다른 흑기사는 비어있는 마차에 피 흘리는 드워프와 엘프를 던져넣는다.

터엉.

마치 쓰레기를 집어 던지는 듯한 모습.

스톡웰 또한 들은 적 있다.

흑기사들에게 검은돈을 보내는 암시장 ‘블랙 이글루’.

그곳은 인간이 아닌 종족을 상품처럼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추구한다.

만약 반항하는 이종족이 있으면 고문 후, 장기를 쪼개 판매한다고.

그 이익 중 일부를 북부의 패권자 ‘베르너’ 공작에게 바치기에 제재되지도 않는다고.

‘인간, 들은······. 무엇이 이리 욕심이 많은 걸까······?’

풀썩,

힘없이 꿇어앉고 생각한다.

‘우리, 엘프와 드워프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숲과 땅속을 조화롭게 나눠 가지는데······. 인간들은, 그 모든 걸 다 가지고도······. 우리 영역을 넘보다니······.’

약육강식.

옛 선인들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마치 맹수가 초식 동물을 잡아먹을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인간 또한 약자를 괴롭히는데 서슴 없으니까.

‘아무리,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빈민 일부가 연합했다고 해도······. 머지않아 멸족되겠지······.’

인간의 번식 속도는 압도적이다.

삶이 짧은 만큼 빠르게 머릿수를 늘리니까.

이미 엘프와 드워프는 점차 터전을 잃어가는 중이다.

일부는 인간 종교인 프레야 교단으로 넘어가서 개화 성공했다지만······. 그건 극히 일부분일 뿐이겠지.

목이 아래로 꺾인다. 눈꺼풀이 감긴다.

“이제야 절망한 모양이군.”

“제가 처분하겠습니다.”

데인이란 흑기사는 발로 퍽 차서 스톡웰을 떨어뜨린다.

또 다른 흑기사는 그런 스톡웰을 내려다본다.

칠흑의 장검을 들어 올린다. 심하게 다친 엘프는 상품 가치가 없으니까.

아마 저 검이 떨어지면 내 삶이 끝나는 거겠지.

스톡웰은 희미하게 유언을 남긴다.

부디 우리 피가 엘프의 숲 양분이 되어 후대로 이어지길······.

쏴아아아.

삶의 마지막이 되니까, 오감이라도 확장된 걸까?

옆에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들린다.

하기야 우리 엘프는 귀가 넓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파아아앙-!! 쿠과과광-!!!

천지가 뒤흔들리는 굉음이 들렸다.

스톡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어 눈을 확 뜬다.

“······네놈은!”

“!”

정신 차린 직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을 베려던 흑기사가 저 멀리 떨어진 바위에 처박혀 있었으니까.

그것도 날아가는 경로에 있던 나무들을 죄다 박살 내면서.

홍수가 난 듯 물이 일대를 드리운 걸 봐선, 물의 마법으로 날려버린 모양인데.

불의 정령 셀레멘더조차 흠집도 못 내던 검은 갑옷이 산산이 조각나있다.

“······아룡 기사, 교단의 적이구나.”

흑기사 데인이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극도로 경계하는 맹수처럼 으르렁거린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몸이 부르르 떨리며 먼저 달려들 생각을 하지 못한다.

스톡웰은 흑기사 데인의 시선을 따라 물의 기적을 일으킨 곳을 바라본다.

그곳에 있는 건 한 명의 인간이었다.

노란 낙엽처럼 밝은 황금색 머리카락에 계곡처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젊은 사내.

그가 터벅, 터벅,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그래.”

흑기사의 말에 긍정하는 노란 머리 인간.

"너희 교단을 없앨 마법사다."

콰아앙!

그토록 공포스러웠던 흑기사들을 일격에 날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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