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용의 유산 (1)
모래바람이 몰아치며 시야를 희뿌옇게 만들었다.
장녀 네하린은 지나가는 마적단에게서 빼앗은 낙타를 타고 사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금빛 구슬을 찾기 위해서.
사해의 시험에서 정당하게 우승하고, 차기 가주로 인정받기 위해서 말이다.
“······찾았다.”
그렇게 1주일째 모래밭을 뒹굴었을 때, 간신히 발견했다.
금빛 구슬.
은빛 구슬이 가리키는 보물을 말이다.
지친 안색이었으나 예쁜 보조개가 꽃핀다.
허나 기쁨도 잠시.
네하린은 입안에 모래알이 굴러다니듯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그녀 또한 알고 있으니까.
‘데이아는 출발지에서 대기하고 있겠지.’
데이아는 금빛 구슬을 직접 찾을 생각 없음을.
물의 명가 크라우드보다 물 냄새를 잘 맡아서 가져오는 건 불가능하니까.
‘아마 내가 돌아오면 죽이고 빼앗으려 들겠지.’
결국, 사해의 시험은 금빛 구슬을 찾아서 출발지로 돌아오는 것.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막에서 어떻게 슬기롭게 위기를 헤쳐가느냐를 판별하는 시험이다.
‘홀로 뚫는 건 위험하다. 굳이 그런 위험한 수를 둘 필요는 없겠지.’
네하린은 이를 알기에 대처 방안을 구상했다.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는 다른 형제들과 합류해서 합공하는 거겠지.’
네하린은 눈을 감고 일전 전투를 떠올린다.
마법 연무장에서 맞서 싸운 데이아.
데이아는 살의가 흉흉한 마법사였다.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해 훈련한 전투 병기.
분하게도 천재라 정평 난 그녀보다도 한 단계 이상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네하드람을 지키느라 피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다시 붙는다고 해도 단독으로 이길 자신은 없었다.
‘셋이서 협공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합의하기도 어렵고, 다들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단점이 있어.’
다들 금빛 구슬을 따라 찾아올 수 있지만, 남은 식량도 부족한 만큼 하염없이 기다릴 수는 없다.
더구나 데이아도 같은 이유로 찾아올 수 있으니.
‘역시 방법은 단독 돌파뿐인가.’
결국, 네하린은 두 번째 선택지로 마음이 쏠렸다.
단독 돌파.
데이아는 혼자서 드넓은 사해를 감시하고 있을 테니, 빈틈을 찾아 돌파한다는 뜻이다.
‘사막은 지형지물이 없어서 엄폐가 힘들지만, 그만큼 모래 먼지가 날리니까.’
만약 더미 낙타를 구해서 자신과 동시에 질주시킨다면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들 터.
비록 확률이지만······. 이를 통해 돌파하기로 했다.
‘마적단. 그 녀석들부터 찾아야겠어.’
네하린은 사해 동쪽 끝에 있는 마적단을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니콜라스에게 두 번째 수업을 들으면서 배운 경험을 활용한다.
사막에 살아가는 이에게 정보를 얻고, 적의 함정을 역으로 이용한다.
마적단을 굴복시키거나 잘 설득한다면 데이아의 행동반경을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낙타 머리를 동쪽으로 돌릴 때였다.
고오오.
“역시 혼자 있군.”
“!”
흠칫,
귀에 익은 목소리에 네하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급히 뒤를 돌아본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아래, 흙먼지를 일으키고 달려온 한 까무잡잡한 피부에 흑발의 사내가 있다.
데이아.
숙부 카넬의 양자. 크라우드 가문 차기 가주직을 차지하기 위해 나타난 다크 엘프다.
네하린은 앙칼진 눈매로 데이아를 노려본다.
“네가 왜 여기에?”
“쯧쯧, 한심하긴. 내가 출발지에 남았다고 하여 하염없이 기다릴 줄 알았나?”
데이아는 역시 이래서 온실 속 화초들은 안된다며 혀를 찼다.
“성안에서만 자랐으니 사고방식이 안일할 수밖에.”
“······.”
“구슬 찾기 놀이는 끝났다. 아가씨.”
촤아악!
검은 물이 사막에서 뿜어진다.
마치 유전 지대에 석유가 터지는 것처럼.
“그동안, 나는 너희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찾아다녔다.”
“!”
“운이 좋게도 너희 형제 셋은 전부 따로 떨어져 있더군.”
그제야 네하린은 데이아의 속셈을 눈치챘다.
“······그렇군. 넌 우릴 각개격파하러 온 거로구나.”
“그래, 아무리 온실 속 화초들이더라도 뭉치면 귀찮아지니까.”
데이아는 모래 속에 박힌 앙상한 뼛조각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네하린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는다.
검은 물을 몰아치며 중얼거렸다.
“너부터 죽어라. 장녀. 오늘로 물의 명가 크라우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
쿠우웅······.
쏴아아!
땅이 뒤흔들린다.
뜨거운 햇볕 아래 검은 물과 차가운 물이 맞부딪힌다.
겁쟁이 낙타가 공포에 질려 운다. 안 그래도 건조한 사막이 바싹 말라붙는다.
호크 아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엡실론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꽈앙!
엡실론은 화상 구슬 속 전투를 심각하게 바라본다.
데이아와 네하린의 혈투.
네하린은 확실히 분전했으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실전 경험도 차이가 나지만, 무엇보다 써클이 1단계나 차이 났으니까.
4써클과 3써클.
같은 중급 마법사로 분류되지만, 그 효율이 크게 차이 난다.
4써클은 현자 카나단, 동부 최고 마법사 엡실론보다 겨우 1단계 낮은 수준이다.
아무리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라지만, 그 아래 등급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더구나 저희 데이아는 오늘을 위해 물의 명가 크라우드를 철저히 분석해서 말입니다.”
“······.”
숙부 카넬이 빙그레 웃었다.
마치 지난 10여 년간 은둔했던 삶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지난 사해의 시험에서 엡실론에게 풀리지 않은 앙금이 남아있다는 듯 말이다.
-큿.
화면 속 네하린이 속이 진탕 뒤집혔는지 자세가 크게 흔들린다.
더는 항전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쿠아 부스터로 땅을 박차고 날아 숨겨놨던 낙타 등 위로 올라탄다.
데이아를 피해 달아나려는 것이다.
-불가능하다.
-!
그러나 그것은 데이아의 한 마디에 가로막혔다.
쏴아아아.
네하린을 가두듯 반구 형태로 감싸는 검은 물.
파아앙!
-끼익!
“······이런.”
호크아이 마법이 걸려있던 2마리의 독수리가 무리하게 다가가자, 검은 물이 폭발한다.
그 충격에 독수리가 땅에 처박힌다.
시야가 암전되며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통신 구슬.
독수리가 행동불능이 된 모양이다.
다른 곳에 있는 독수리가 오기까진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린다.
한동안 데이아와 네하린 사정을 알 수 없을 터.
하지만 향후 어떻게 결투가 끝날지는 명확하다.
카넬은 능글맞게 웃으며 엡실론을 돌린다.
“왜 그러시죠? 형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만.”
“······.”
“아, 혹시 긴급 폭죽을 터트리면 구하러 가실 생각이셨습니까? 하기야 지난 마법 연무장 때, 단 한 발자국으로 데이아 앞까지 날아가는 모습은 대단하긴 했습니다만.”
이에 엡실론은 눈동자만 카넬에게 내리꽂으며 말했다.
“······그만 입을 놀리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거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고, 가주는 나다.”
촤악.
엡실론의 살기가 마차 속을 지배한다.
그와 동시에 차가운 분노가 각 잔의 음료들과 공명한다.
마치 분수대처럼 공중에 두둥실 체공한다.
이어서 카나단을 비롯한 가신들이 주군을 따라 체내의 마나를 달구기 시작한다.
“예. 그만두시라니 그만두지요.”
카넬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물러섰다.
어차피 승자는 자신이이라는 듯.
이 정도 살기는 익숙하다는 듯 말이다.
무거운 침묵이 마차 속을 맴돈다.
가주 엡실론의 결단을 모두 기다리고 있을 때,
“······!”
엡실론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또 다른 호크 아이로 비치는 누군가.
말 한 필을 몰아 네하린 쪽으로 달려가는 사내가 보였다.
***
한편, 데이아는 독수리들이 사라진 직후, 본격적으로 흑마법을 사용한다.
더는 거리낄 게 없으니까.
“나와라. 샌드 웜. 사해의 지배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게 해줘라.”
-쿠르르르.
모래 속에서 거대한 진동이 울린다.
그리고 모래가 치솟으며 그 사이에서 적갈색의 거대한 존재가 몸을 일으킨다.
거대한 고목 나무 같은 몸통.
그러나 그 끝에는 수백 개의 칼날 같은 이빨이 달려 있다.
야생 사막의 포식자.
흑마법으로 세뇌한 샌드웜.
무려 6마리다.
쿠구구궁.
-그워어!
-그우움!
“!”
그중 3마리가 정면에서 솟구쳐 나온다.
황소도 한입에 집어 삼킬법한 거대한 샌드웜들이 입을 쩍 벌리고 네하린을 포위한다.
네하린은 깜짝 놀랐으나 이내 곧장 대응한다.
“워터볼, 스파크!”
촤악, 파치직.
네하린은 허공에 워터볼을 만들고 그곳에 전격계 기초 마법 스파크를 부여한다.
혹여 자신에게 감전되지 않도록 아쿠아 스핀으로 워터볼 내부를 회전시키면서.
과거 네카르가 아쿠아와 스파크를 융합시킨 것을 보고 착안한 마법.
번쩍, 촤아앙.
-꾸엑! 크워어!
전격을 머금은 워터볼이 쩍 벌린 샌드웜 입속으로 처박힌다.
순도 높은 물과 함께 번뜩이는 고압전류.
샌드웜 한 마리가 쿵 쓰러진다.
이후 네하린은 자신을 가두는 검은 반구형 검은 물을 부수고 달아나려고 했다.
“불가능하다고 했을 텐데.”
“!”
촤아악, 쿠구구궁.
그러나 데이아라고 놀고 있는 게 아니었다.
검은 물을 채찍처럼 휘둘러 네하린 머리를 친다.
급히 워터 실드를 펼쳐서 막아내지만, 어느새 다가온 샌드웜들.
네하린이 더 달아날 수 없도록 샌드웜이 완전히 주위를 포위한다.
데이아가 저벅저벅 걸어서 다가온다.
“계집애가 제법이군. 설마 내가 이렇게 시간 끌릴 줄이야.”
“······헉. 헉.”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없나.”
유언 정도는 들어주겠다는 데이아.
네하린은 잠시 숨 고르더니 무겁게 가라앉는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본다.
일대 공간을 가둬버린 검은 물.
그 속에서 상처 하나 없이 군림하는 데이아.
그는 네하린을 압도하는 물 마법은 물론이고, 소환수로서 샌드웜까지 부리고 있었다.
현재 네하린으로선 이 절망적인 상황을 역전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녀는 보조개를 띄며 말했다.
“······생각보다 별거 없구나.”
“?”
네하린의 독백에 데이아는 인상을 찡그린다.
현재 상황 파악이 안 되냐는 듯.
공포심에 사고가 정지했냐고 표정으로 묻는다.
“뭐가 말이지?”
“데이아.”
네하린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네카르 급은 아니구나.”
데이아의 표정이 구겨진다.
그러나 곧 비웃음으로 변한다.
“어떤 급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이가 없군. 곧 네 동생들도 나한테 죽을 텐데 말이야.”
네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피식 웃어보였다.
“······너에겐 압도적인 공포가 없거든.”
“?”
담담하게 말하는 네하린.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데이아를 위해 친절히 부가설명해준다.
“네카르는 확실히 괴물이야. 어떻게 파훼법을 연구해도 내가 이길 수 있다는 상상이 들질 않는단다.”
“······.”
“그런데 너에겐 그런 압도적인 벽이 안 느껴지는구나.”
그저 운 없이 몇 년 일찍 만났을 뿐.
네하린의 말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양팔을 벌린다.
마치 이제 죽이라는 듯.
그러한 태도에 데이아는 눈매가 싸늘히 죽는다.
“세상 물정 모르는 년이었군.”
촤악.
손에 워터볼을 모으며 읊조린다.
“나는 4써클이고, 네카르는 너보다도 낮은, 고작 2써클이다. 기연으로 마나 량만 괴물 같이 늘었다고 날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으냐?”
귀족치고 제법 실전 경험이 있긴 했지만,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자신을 상대론 햇병아리나 다름없으니.
“글쎄.”
네하린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렇게 자신 있으신 분께서 왜 등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네카르 하나 못 알아채시는 건지?”
“······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데이아.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뒤를 돌아본다.
“!”
그리고 발견했다.
드높은 사구 위에 서 있는 노란 머리카락 사내. 그의 등 뒤로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고, 그의 그림자가 사구를 따라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데이아는 그 거대한 그림자 안에 서 있었다.
“······잠깐. 다크 필드 밖에선 내부가 안 보일 텐데. 헉?”
네카르와 눈이 마주친다.
바닷속처럼 끝없이 깊은 눈동자.
그 푸른 동공 안에 데이아가 비치지 않았다.
데이아가 아니라 그 너머 훨씬 멀리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이게 그 애송이의 시선이라고?’
일전과 완전히 달라진 기세.
두근,
심장 박동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데이아는 처음으로 불길한 상상을 떠올렸다.
“······흥, 네놈. 날 만난 이후, 깨달음이라도 얻은 모양이구나! 그러나 이미 늦었다!”
쐐애액!
데이아는 악으로 기합 지르며 워터볼을 네하린에게 쏟아냈다.
다크 필드는 안과 밖을 분리하는 마법.
저 밖에서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이지도 않으니, 막을 수도 없을 터.
지잉. 콰앙!
“!”
“!”
그런데 워터볼이 네하린 바로 앞에서 막힌다.
네하린조차 놀라 눈을 크게 뜬다.
-우우움! 그워어어!
샌드 골렘.
어느새 모래로 된 거대한 골렘이 네하린 앞에 나타나 몸으로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데이아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럴 수가······? 영창을 외우는 걸 보지도 못 했는데?’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일수록, 낮은 써클 주문을 빠르게 외운다.
그러나 데이아는 네카르가 입술을 달그락거리는 시늉조차 보지 못했다.
‘······말도 안 돼! 내가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어!’
데이아는 믿기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를 죽이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마법사를 상대할 때 기본 중이 기본은 마법의 시전을 파악하는 것이다.
‘설마······.’
지난 마법 연무장 대전에서 손속 사정을 둔 거라면?
사해의 시험 때를 위해 자신의 실력을 숨긴 거라면?
네카르는 여전히 가만히 서서 하염없이 깊은 눈이 데이아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쿵, 쾅, 쿵, 쾅.
묘한 진동이 느껴진다.
네카르의 가슴팍에서 흘러나오는 아주 작은 소리이거늘, 데이아는 왠지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쿵, 쾅, 쿵, 쾅.
마치 대군단의 전쟁북 소리가 다가오는 듯한 위압감이다.
그에 비하여 자신의 심장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고함을 지르고 있음에도.
두근두근두근.
미약하기 그지없었으니······ 마치 모래 폭풍 속에 휩쓸린, 작은 미물의 발버둥과 같았다.
그는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를 움직여서 네카르를 마주 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네하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때, 이제 내 말의 뜻을 알겠니?”
그 끝을 들여다볼 수 없는 푸른 눈.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시선.
어두운 동굴 속에서 드래곤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