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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69화 (69/70)

[69]

‘읏, 어떻게든 내가 말려야!’

그 순간 시안나의 머릿속에 삐이, 이명이 울렸다. 눈앞의 광경과 비슷한 광경이 뇌리에 스쳤다.

서늘함이 감도는 어두운 정원, 중앙에 쓰러진 디트리히, 그리고 디트리히를 안은 채 구슬 같은 눈물을 떨구는 에르마야.

정체불명의 기억이 머릿속에 폭포수처럼 흘러들어왔다.

그녀가 휘청거렸다.

정신 차려!

이를 악물었지만 다리에 힘마저 풀리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등에 차가운 바닥이 아닌 푹신하면서도 듬직한 감각이 전해졌다. 여우 가면에 주황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헤이스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헤이스…….”

다급하게 디트리히가 달려왔다. 그가 고양이 가면을 벗겨 내고 이마를 짚었다.

“아까 정원에서 다치시기라도 한 겁니까?”

시안나가 힘없이 도리질 쳤다. 디트리히 덕분에 시안나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지금도 안심이 되었다. 몸에서 빠져나가는 힘을 느끼며 그녀는 기꺼이 수면에 몸을 맡겼다.

“누님……!”

디트리히는 시안나의 손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를 갈았다.

설마 자객을 처치하는 광경을 보고 뒤늦은 쇼크가 온 건가?

귀족 영애가 관망하기엔 살벌한 광경이긴 했다.

디트리히는 심장이 쥐어뜯기는 기분을 느끼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말 돌리지 말고 해명을 해 보시지, 공작. 지위로 성녀를 겁박하고 그녀를 독점한 건가?”

카릴이 디트리히의 어깨를 짚었다.

그를 돌아본 디트리히의 금안이 싸늘하게 식어 있자 카릴의 이마에도 빠직 핏줄이 튀어 올랐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기류에 주변인들은 저도 모르게 침음을 삼켰다.

적대적인 시선이 거두어진 건 조용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모든 건 오해입니다, 왕이시여.”

사람들을 가르고 에르마야가 앞장섰다.

아까 신의 기적을 엿보았기 때문일까. 수단 같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순교자나 신의 대리인 같은 숭고함이 비쳤다.

그녀가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저는 제가 성녀라는 사실을 공작님과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좌중이 술렁거렸다. 디트리히가 억지로 그녀를 끌고 가 결혼했다는 카릴의 주장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눈썹을 내리깔며 처연하게 이야기하는 통에 그녀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그럼에도 저는 성녀로 사는 삶을 원치 않았습니다. 몇백 년간 사람들이 성녀를 애타게 찾았다는 걸 알았지만…… 네. 공작님께 한눈에 반했어요. 그렇기에 제 발로 공작님과 결혼을 올렸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카릴은 뺨을 경련시키거나 하진 않았지만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만약 디트리히가 성녀인 것을 알고 납치하였다면 그의 죄를 물을 여지가 있었다. 반대로 그녀를 벌하는 날엔 왕국민과 신전을 적으로 돌리게 될 일이었다.

그녀는 신의 대리인이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거짓말에 디트리히 또한 의아한 얼굴로 변했다. 그녀가 자신을 감싸 줄 이유 따위 하등 없었다.

에르마야는 좌중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신께서 제가 공작가에 머물길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웅성웅성. 모든 게 신탁 때문이었다니. 신의 뜻이라면 더 이상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에르마야는 쐐기를 박듯 카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순백의 드레스가 대리석 바닥을 덮자 사람들이 동요를 일으켰다.

“성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숨긴 벌, 달게 받겠습니다.”

샹들리에 아래로 순백의 드레스가 빛을 받아 반사되었다.

사람들에겐 성녀의 자리를 내려놓고 사랑을 택한 모습은 그저 거룩하고 고결했다.

카릴의 사파이어색 눈동자가 고개를 조아리는 에르마야를 살폈다.

이윽고 하얀 장갑이 에르마야의 손을 부드럽게 당기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어찌 생명의 은인에게 진 빚을 모른 척 넘어갈 수 있을까.”

웃음 지으며 속내를 숨기는 모습이 일품이었다.

실상은 신탁이 성녀를 디트리히에게 이끌었다는 사실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마치 그녀가 그의 여자라고 신이 공언하는 것 같았다. 또 정치적으로도 아슈토르가에 힘이 실리는 게 기분 나빴다.

카릴은 가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즐거운 건국제에 성녀까지 내려오다니, 이보다 더 기쁠 수 없군. 독살에 관한 건 더욱 면밀하게 수사할 터니 다른 사람들은 다시 축제를 만끽해 주게.”

웅성웅성. 어수선한 것도 잠시, 사람들은 말끔히 나은 카릴과 갑자기 나타난 성녀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몇백 년 만에 성녀가 나타났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연회장의 화제는 독살에 대한 위험한 분위기가 빠르게 지워졌다.

마침 비올라, 첼로의 선율이 사람들 사이로 스몄다. 경직되어 있던 사람들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장내가 즐거운 분위기로 가득 찬 걸 확인한 카릴이 바짝 긴장해 있는 에르마야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부디 그대를 대접할 수 있게 허락해 줄 수 있겠나?”

“……물, 물론입니다.”

에르마야의 긴 속눈썹이 긴장으로 덜덜 떨렸다.

카릴은 에르마야를 중앙 계단으로 다정히 에스코트했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두 사람이 떠나기가 무섭게, 디트리히가 헤이스의 품 안에서 혼절한 시안나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녀는 시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디트리히 님. 제가 시안나 님을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그가 거의 빼앗듯이 헤이스의 품에서 시안나를 끌어당겼다.

“아니, 내가 하지.”

기절한 시안나의 어깨가 자꾸만 디트리히의 제복에서 미끄러졌다.

이렇게 여리고 부서질 것 같은 몸이라니.

그는 그녀를 놓치지 않게 힘을 꽉 주어야 했다.

일어서서 헤이스를 지나 몇 걸음 걷던 디트리히가 홀연히 멈추고 등을 돌렸다.

“헤이스, 네가 시안나 누님을 탈출시켜 이곳으로 데려온 건 잊지 않겠다.”

“…….”

뚜벅뚜벅. 차가운 대리석 바닥과 신발 굽이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러운 회장 안에 섞여들었다.

헤이스는 시안나를 제 것처럼 빼앗은 디트리히의 등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등이 시퍼런 핏줄이 두둑 올라왔다.

***

디트리히는 그녀의 방 침실에 시안나를 눕혔다.

파리한 안색을 보니 해일처럼 커다란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혹시 2층 임시 숙소에 그녀를 가둔 것이 잘못된 걸까. 어쩌자고 그녀를 창문도 없는 감옥 같은 방에 감금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며칠 전 그녀를 가둔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었다.

곤히 잠든 시안나를 침대에 눕힌 후 그가 입술을 물어뜯으며 침대 주변을 서성였다. 잠시 뒤 공작가의 의원이 급히 들어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의원부터 부른 탓에 그녀는 코르셋조차 벗지 못한 상태였다. 의원이 가슴에 꽉 묶인 리본이라도 풀려 손을 뻗었다.

“잠시.”

디트리히가 의원의 팔목을 시뻘건 자국이 날 정도로 붙잡았다. 불길한 예감을 감지한 의원이 손을 거두자 디트리히가 꼼꼼하게 묶인 리본을 풀었다.

그래 봤자 겨우 쇄골 아래가 겨우 보일 정도였다.

끙. 이러면 진찰을 할 수가 없는데.

의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기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그, 더 풀어야 하는데…….”

“뭐라고 한 거지?”

어찌나 서늘한 눈빛인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싹둑 잘려 나가는 착각이 일었다.

“아닙니다…….”

의원이 입을 꾹 다물고 진찰을 시작했다. 한참 동안 손목에 맥도 짚고 청진기로 심장 소리도 체크했다.

그가 침착한 데 반해 안절부절못하는 쪽은 디트리히였다.

“큰 병인가? 혹시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의원은 이 남자가 저주에 풀린 이후로 초조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내심 놀랐다.

한번은 공작 부인인 에르마야를 볼 때 눈빛이 얼마나 사납던지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이 여자에게는 달랐다.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이야말로 이 남자의 아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별일 아니니 진정하십시오. 오히려 편안히 숙면을 취하는 상태입니다.”

디트리히가 으르렁거리며 성을 냈다.

“그럴 리 없다! 아무 예고도 없이 왕성에서 쓰러졌단 말이다!”

“숨이 아주 고르지 않습니까.”

그 순간, 두 사람 사이를 편안한 호흡음이 메웠다. 그의 말대로 시안나는 안색도 좋았고 그저 수마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의원은 청진기를 빼곤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저 잠든 것뿐이시니 평안히 기다려 주십시오.”

“하아, 알겠다…….”

남자는 선대 공작부터 돌보아 온 의원을 마치 엉터리 의사 보듯이 쳐다보곤 손을 내저었다. 의원은 남자가 언제 변덕스러워질까 몰라 얼른 가방을 챙겼다.

그가 손잡이를 돌려 방을 나가려고 할 때였다.

“아, 지금부터 환복을 할 거니 그 누구도 방에 들어오지 말라 이르도록.”

여자의 옷을 스스로 벗기겠다는 남자의 말에 의사는 놀란 속내를 숨기려 노력해야 했다.

혹여 깊은 사이인 건가?

비스듬히 본 남자의 옆얼굴은 그녀의 옆에서 밤이라도 샐 기세였다. 의사는 오늘 일을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어 두기로 했다.

탁.

의원이 나가자 디트리히는 곧바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시안나의 뺨에 제 볼을 비비었다.

따뜻한 온기가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누님……. 저를 때리시고 욕하셔도 좋습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힘없는 팔을 억지로 거머쥐었다. 그가 가느다란 검지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니 부디 일어나주십시오. 누님께 함부로 대한 벌을 이런 식으로 주지 말란 말입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 디트리히에겐 너무 잔혹한 형벌이었다.

***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장이 높게 나 있는 방이었다.

크리스털 백조가 입에서 물을 졸졸 떨어뜨리는 미니 분수대를 보며 에르마야는 어깨를 움츠렸다.

번쩍거리는 방은 자신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공작인 디트리히의 방이 금욕적인 분위기가 감돈다면 왕의 방은 가만히만 있어도 금 냄새가 솔솔 풍겼다.

“너무 딱딱하게 굳은 것 아닌가? 편히 앉지그래? 누가 보면 그대를 잡아먹는 줄 알겠어.”

맞은편에 앉은 에르마야를 안심시키며 카릴이 향긋한 캐모마일 차를 음미했다.

식도가 따뜻하게 적셔지며 달콤하고 향긋한 내음이 폐부에 들어찼다. 항상 먹는 차가 특별하게 여겨지는 건 눈앞에 굳어 있는 여성 때문일 것이다.

에르마야는 왕의 의중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그의 눈빛이 꼭 첫사랑을 재회한 남자처럼 아련했지만 그건 방심을 유도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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