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앞머리를 뒤로 넘긴 올백 머리를 한 카릴과 하얀색에 금색 자수가 놓인 제복이 꽤나 잘 어울렸다.
그는 서글서글해 보이지만 묘하게 탐색적인 눈빛으로 디트리히를 훑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이미 인사를 마쳤는데, 자네만 없어서 꽤나 걱정했지 뭔가. 공작을 위해 만찬도 준비했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시안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암살자를 보내 놓고 상처는 없는지, 약점은 없는 것인지 낱낱이 뜯어보는 시선이라니.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딴청을 피우는 꼴이 보기 싫었다.
게다가 핑거 푸드가 올려져 있는 테이블엔 온통 ‘관자 디저트’만 존재했다. 분명 디트리히가 해산물을 못 먹는다는 걸 알고 일부러 내놓았음이 틀림이었다.
디트리히가 능숙하게 맞받아쳤다.
“잠시 정원을 산책했습니다. 장미를 만지며 정원을 거닐었는데 피가 날 정도로 장미 가시가 따갑더군요. 정원사를 잘라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정원사의 일 처리가 영 엉망인가 보군. 충고 고마워.”
“달빛 아래에서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덕분입니다.”
카릴의 눈썹이 움찔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은 시안나만이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냉기를 눈치챘다.
마침 카릴 옆으로 와인 잔을 든 시종인이 지나갔다. 그가 와인을 하나를 빼서 디트리히에게 건넸다.
그 순간 시안나는 포착했다. 너무나도 티 나게 카릴이 입이 닿는 부분에 가루를 바르는 모습을.
카릴이 입매를 비틀며 권했다.
“자, 내가 주는 잔을 들도록. 설마 이것조차 거부하지 않겠지?”
디트리히는 선뜻 잔을 잡지 않았다. 그 역시 시안나처럼 하얀 가루를 바르는 걸 목격한 탓이었다.
디트리히가 눈에 경계심을 바짝 세우자 카릴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참, 얼른 받지 않고 뭐 하는 거지. 어쩔 수 없군. 이건 내가 마시고 새로운 와인을 주도록 하지.”
시안나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수상한 약을 바른 잔을 자기가 먹는다고?’
의아함도 잠시, 납득이 갔다.
카릴은 왕자였다. 어렸을 적부터 독에 대한 내성을 길렀을 테니 웬만한 독은 그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디트리히로서도 계속 거절하는 건 결례였기에 잔을 받아 들었다.
챙. 두 남자가 든 유리 글라스가 맞부딪치자 핏빛 와인이 출렁거렸다.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꼭 검이 쨍강, 맞닥뜨리는 소리와 비슷했다.
두 사람은 서로 묘한 눈빛으로 직시하고 와인을 입에 대었다.
꿀꺽. 왠지 모를 긴장감에 시안나는 그들을 조마조마하게 관망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너무 공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군.”
잔을 전부 비운 카릴이 근처 미니 테이블에 잔을 놓은 후 눈가를 꾹 눌렀다. 눈이 불편한지 자꾸 찡그렸다.
시안나는 떨떠름해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두 사람의 거래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공작과 날 선택하게 될 날이 올 때, 반드시 날 택해.’
시안나는 카릴의 철면피에 질려 버렸다. 카릴의 시선이 그녀의 의중을 가늠하듯 꽃이 핀 드레스 위를 뱀처럼 기어 다녔다. 오스스 돋는 소름에 팔뚝을 문질렀다.
“백작이 발루아로 가문 차남과 약혼했다는 소식도 들었어. 그는 어디에 있는 거지?”
“아……. 그게…….”
헤이스와의 약혼이 카릴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줄이야.
디트리히에게 질투를 유발시키기 위해 한 약혼이 점점 더 스케일이 커지고 있었다.
헤이스가 부모님인 후작에게까지 이야기했으니 이미 사교계에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왠지 모르게 카릴의 입꼬리가 마뜩잖게 올라갔다.
“공작이 공작 부인을 챙기지 않고 다른 여자와 함께 다니는 이유가 궁금하군.”
건국제 때 디트리히의 옆을 지켜야 하는 건 결혼한 에르마야일 것이다. 디트리히는 속을 긁는 것처럼 덤덤하게 대답했다.
“잠시 놓쳤습니다.”
순간 으득 어금니를 꽉 깨무는 소리가 났다. 그가 고개를 치켜들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하, 공작은 참 부러워. 누구는 갖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을 그리 손쉽게 놓으니 말이야.”
카릴의 푸른 눈동자가 알 수 없는 빛을 담은 채 일렁였다. 증오가 서린 눈빛이었다.
그때, 카릴의 어깨가 심각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호흡 곤란이 온 것처럼 심장 부근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의 주변이 술렁거렸다.
“카릴 님?”
카릴이 테이블을 짚었지만 중심을 잃고 함께 엎어졌다.
짤그랑! 테이블 위에 올렸던 와인 잔이 산산이 조각나 이리저리 튀었다.
바닥에 쓰러진 그가 신음을 흘렸다.
“큭, 흑!”
홀을 감싸던 중후하고 고풍스러운 현악기 소리마저 멎었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카릴의 근처에서부터 파도처럼 사람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카릴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자 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다, 당장 의원을 부르도록!”
얼어붙은 시안나 옆으로 나이 지긋해 보이는 의원이 거대한 인파를 뚫고 나타났다.
그가 사경을 헤매는 카릴의 맥을 짚는데 병사들이 소리쳤다.
“왕께서 쓰러지셨다! 모두 회장 출구를 빠짐없이 막아!”
금세 홀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경악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제지하는 병사들로 혼비백산이었다.
시안나는 아연실색했다.
‘카릴이 디트리히와 건배를 한 뒤 쓰러졌잖아. 디트리히가 범인이라고 몰아세우려 스스로 독을 마신 거야?’
제 몸마저 던지는 복수의 불꽃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골이 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파멸로 몰아넣고 싶어 하다니.
카릴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증오에 현기증이 일었다.
카릴을 살펴보던 궁중 의원이 새하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이건……. 플라네름이라는 맹독의 마비 증상입니다. 해독제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에 지장이 생길 겁니다!”
좌중이 술렁였다.
감히 신성한 건국제 날 왕께 독을 건네다니, 반역이었다.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을 때. 한 영애가 디트리히를 척 가리켰다.
“저…… 봤어요. 아슈토르 공작님과 마지막으로 잔을 들었어요!”
경악하는 좌중의 시선이 디트리히에게 모였다. 디트리히는 수많은 눈알이 자신을 보는 상황에서도 차분히 반박했다.
“와인 잔은 왕께서 스스로 드신 겁니다.”
시안나가 한발 앞으로 나오며 결백하다는 데 힘을 실었다.
“생각해 보세요. 정말로 왕을 살해할 의지가 있었다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일을 치렀겠습니까. 게다가 이곳은 왕의 터전입니다. 이런 곳에서 군사도 대동하지 않은 채 홀몸으로 일을 실행할 리가요.”
지금 카릴이 이상한 하얀 가루를 묻혔다고 주장한다면 오히려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그러니 구구절절한 정황은 빼고 최대한 사실을 고했다.
그녀의 의문이 타당한 모양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사람들이 수긍하며 저마다 수군거렸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신성한 왕궁에서 독을…….”
의원이 비장한 얼굴로 신음을 흘릴 때였다.
“잠, 잠시만요!”
연약한 외침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인파 속에서 새어 나왔다. 에르마야가 군중의 틈바구니에서 낑낑대며 빠져나왔다.
“제가 감히 살펴봐도 될까요?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시안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에르마야라면 성력으로 카릴을 구해 낼 수 있을 거야!’
병사가 그녀를 제지하려 했으나 디트리히가 막아섰다. 제2의 권력자인 디트리히의 지시는 절대적이었다.
에르마야는 식은땀을 흘리는 카릴에게 다가간 후 무릎을 꿇었다.
곧 그녀의 손이 카릴의 가슴팍을 짚었다. 손아귀에서 불을 켠 것처럼 하얀빛이 샘솟았다.
곧 눈이 시릴 정도로 환한 빛이 사람들의 눈을 덮쳤다.
팟!
잠시 뒤 하얀빛이 사그라들었다.
눈을 가린 사람들이 팔을 내리고 술렁거렸다.
하얀색 빛이 나오는 성스러운 마법은 성녀가 사용하는 성력이 유일했다.
“혹시 저 여성이…… 성녀?”
사람들이 저마다 감탄을 터뜨렸다.
몇백 년 동안 나타나지 않던 성녀가 지금 모습을 드러냈다!
회장은 금세 흥분감에 젖어 들었다.
극적인 연출처럼 기절했던 카릴도 깨어났다. 상체를 반쯤 일으킨 그에게서 병색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희미한 동공이 붉은 머리의 여성을 눈에 담았다.
“에르마야……?”
친근하게 이름으로 불린 에르마야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나머지 카릴이 그녀의 뺨을 부드러이 쓰다듬는 것도 말리지 못했다.
“너구나…….”
항상 넌 내가 고통스러울 때 달려와 주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리운 것을 되새기듯 에르마야의 볼을 연신 더듬었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 아래로 그가 편안히 미소했다.
에르마야는 당황스러움을 숨기며 그의 상체를 침착하게 일으켰다.
“정신이 드십니까? 조금 전 독을 드시고 쓰러지셨습니다.”
“아…….”
카릴이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면을 입은 신사, 숙녀들. 높은 아치형 천장에 붙어 보석처럼 반짝이는 샹들리에.
머릿속이 빠르게 정리되고 그는 스스로가 파 놓은 함정을 떠올렸다.
성력으로 인해 식도가 타들어 가는 고통은 완전히 사그라든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을 깨닫고 병사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카릴이 맞은편 서 있는 디트리히를 똑바로 직시했다.
“공작은 놀라지 않는 걸 보니, 공작 부인이 성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모양이군.”
시안나의 머릿속에 번개 같은 깨달음이 푹 박혔다.
‘설마 카릴은 에르마야가 성녀인 것을 디트리히가 숨겼다고 만천하에 알릴 생각인 거야?’
사실 독은 디트리히를 범인으로 몰아가기에 허점이 많았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카릴을 암살할 리도 없었고 디트리히의 소지품에서 독살 증거가 나올 리도 만무했다.
카릴은 그 점을 노리는 듯하면서도 성녀인 에르마야를 공작이 일부러 숨겼다는 사실을 찌른 것이다.
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가면 아래의 날카로운 눈빛이 디트리히에게로 모였다. 당연했다.
없던 다리도 자라나게 하는 기적의 힘을 가진 성녀였다. 아픈 곳을 치료해 주는 은혜로운 힘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디트리히가 성력을 혼자서 독차지하려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