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50화 (50/70)

[50]

카릴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두 개를 척 펴서 올렸다.

“아무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라지만 찜찜한 구석이 많아. 탐문을 해 보았지만 스스로 생을 마감할 기색은 전혀 없었다는군. 그러니 진실을 파헤치는 데 도움을 줘야겠어.”

시안나는 황당해졌다.

그녀에게는 수사권도 없었고 그냥 운 나쁘게 사건 현장에 걸린 일반인일 뿐이었다.

“그런 건 치안 유지대나 개인적인 사병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없다면 되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영애가 다시 감옥에 갇힐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아슈토르가의 명예를 생각한다면 말이지.”

“무슨…….”

“긱스 공작이 그랬던 것처럼 디트리히 공작도 사람을 제물로 하는 흑마법사일 수도 있지 않은가. 유력한 용의자인 셈이지.”

카릴이 남 일이라는 듯 개운한 미소를 지었다.

어이가 없었다. 시안나는 긱스의 증언을 떠올렸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여왕에게 이용당했던 사실을 폭로해 봤자 카릴 왕은 분명 내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겠지. 그도 시체를 모으고 있으니까.’

즉, 카릴은 흑마법사였다. 자신도 흑마법을 사용하는 주제에 뭣하면 디트리히를 감옥으로 처넣겠다는 말이었다.

치사해. 그녀는 반쯤 체념한 채 그를 응시했다.

“제가 정확히 무엇을 하면 되죠?”

역으로 발상하면 그녀를 죽이려 한 꿍꿍이를 알아낼 절호의 기회였다.

유치장의 조명이 조금 쓸쓸해 보이는 얼굴을 어둠 속에서 비추었다. 한순간, 브라움을 향한 애도를 엿본 것도 같았다.

“현명한 선택이야. 사실 난 죽은 남자와 안면이 있는 사이라 개인적으로 진상을 파헤치려 해. 공녀도 함께하면 좋겠군.”

“아. 이제 저는 드뷘모르가 저택으로 따로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니 더는 공녀가 아니에요.”

언젠가 드뷘모르가를 다시 세운다고 카릴에게 말하려고 했다. 그게 유치장에서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지만.

조금 놀란 듯 제 턱을 쓸던 카릴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어째서지? 긱스 공작의 일이 유감스럽게 되었으니 그대가 아슈토르가를 이어 가는 것 아닌가?”

“어차피 후계자는 디트리히였으니 전 이만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디트리히에게 저주를 걸었던 왕국에 저주가 풀렸다느니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카릴은 관자놀이 시큰거리는지 눈가를 꾹 눌렀다.

“그렇군. 그럼 앞으로 백작이라고 부르지. 수사도 잘 부탁해.”

카릴이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시안나는 긴장이 역력한 채로 팔을 흔들었다.

“내가 공녀에게 해를 가하려면 진작 유치장에 잡아넣지 않았겠어? 그러니 속는 셈치고 믿어 보는 게 어때?”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카릴이 특유의 유들유들한 웃음을 선보였다.

시안나는 하얀색 긴 속눈썹이 휘면서 자아내는 성스러움에 넘어가지 않으려 애썼다.

“아참, 다른 하나의 조건은 말이지…….”

아뿔싸. 카릴이 요구하는 건 두 가지라고 했던가.

새파란 눈동자가 의미심장한 빛을 내자 시안나는 저도 모르게 침음을 삼켰다.

그의 부탁 너머로 어마한 흉계가 도사릴지도 모른다.

다행히 시안나나 디트리히에게 해를 가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에르마야 양과 친해지고 싶은데, 그대가 도와줄 수 있을까?”

아. 카릴은 소설 원작에서 에르마야를 좋아했었지.

안심하는 것도 잠시, 긱스의 말이 뇌리에 스쳤다.

분명 여왕이 에르마야를 노리고 있었는데 긱스가 그녀를 먼저 빼돌려서 사이가 틀어졌다고 했던가.

혹시 카릴은 에르마야를 원하는 속셈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

“거부하는 건가?”

왠지 위협적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시안나는 몸을 움츠렸다.

시안나는 얼른 도리질 쳤다. 동요했다간 그녀가 긱스에게서 모든 사실을 들었단 것을 꿰뚫리고 말 것이다.

“분, 분부대로.”

시안나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때 삐끗, 발목이 접질렸다.

“읏!”

“괜찮은 건가?”

그녀의 배에 단단한 남자의 팔뚝이 닿았다.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였다. 시안나는 목까지 새빨개진 게 느꼈다.

“그, 그럼 전 이만!”

카릴은 꽁무니 빠져라 줄행랑치는 시안나의 뒷모습을 장난기 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휴, 죽다 살아났네…….”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그녀의 앞에 지나가고 있었다.

치안대 문을 나선 시안나는 노점과 행인들이 한데 어울려져 있는 대로변으로 나왔다.

유치장의 답답한 공기와 비교가 안 되는 상쾌한 공기가 폐부에 들어찼다. 그녀는 감옥을 탈출한 죄수처럼 껑충껑충 뛰었다.

시안나는 기지개를 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둥둥 떠 있던 조각구름은 사라지고 어느새 잿빛 하늘로 변해 있었다.

뺨이 떨릴 정도로 온도가 쌀쌀했다.

시안나는 웅크리듯 캐시미어 코트를 여미며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카릴과 이 사건을 수사한다면 그의 본심에 다가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뭐, 득일지 실일지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이왕 수도까지 온 거, 아예 브라움의 집 주변으로 탐문이나 해 볼까. 혹시 카릴에게 넘기면 곤란한 정보가 있을 수도 있으니.”

카릴은 브라움을 죽인 강력한 범인 후보 중 하나였다.

자신의 그림자 수족을 죽일 까닭이 없다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증거 인멸을 하려 한 건지도 모른다.

한편 또 다른 용의자는…….

시안나가 생각에 잠기어 있는데, 멀리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님!”

마차가 굴러가는 소음 가운데서도 귀에 꽂히는 힘이 서린 목소리였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담벼락을 따라 디트리히가 보폭을 크게 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이 온 그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였다.

그녀를 애타게 찾았는지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로 화난 것 같으면서도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단숨에 시안나의 팔목을 낚아채고 골목으로 끌고 갔다.

“역시 누님이셨군요. 허리까지 오는 곱슬머리에 연둣빛 머리카락은 흔치 않아서 단번에 알아봤습니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받들고 엄지로 더듬었다.

소중한 것을 대하는 손짓에 겸연쩍어진 건 시안나였다.

“오늘 집사장에게 행선지도 이르지 않았다고 해서 걱정했습니다. 아니면 헤이스와 데이트라도 나선 건가 추측했죠.”

마침 헤이스도 저택에서 자리를 비운 듯했다.

“응? 데이트라니?”

그녀가 묻자 어물거리는 디트리히의 볼이 살짝 불그스름했다.

“못 보던 크림색 드레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으신 게 오늘따라 아름다우셔서……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옷차림 때문이었구나.

시안나는 제 드레스 자락을 추어올리며 대강 둘러댔다.

“그게……. 옷에 어울리는 향수를 사려고 들렸어. 하하.”

브라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암살자에 대한 내용을 공유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카릴을 만난 것까지 줄줄이 실토해야 한다.

카릴이 비밀에 부쳐라 당부하기도 했지만 디트리히에게 걱정을 끼칠 게 뻔했다.

그러자 디트리히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그가 지그시 시안나를 바라보더니 예고도 없이 곱슬 머리카락 사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간지러운 숨결에 그녀의 귀가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디, 디트리히? 갑자기 왜 그래?”

“결국 향수는 하나도 사지 않으셨나 봅니다. 이렇게 피 냄새를 잔뜩 묻힌 걸 보면 말입니다.”

성대를 긁는 듯한 고요한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속일 수 없는 건가?

결국, 시안나는 오늘 있었던 자초지종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그녀가 떠들수록 디트리히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잃어버린 반지를 찾아 준 남자에게 사례하려 집에 들렀는데 그가 죽어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수상한 점이 있어 타살로 수사 방향이 잡혔고요.”

“응. 게다가 처음 발견한 내가 범인으로 몰려 있고.”

카릴에 대한 것은 쏙 빼놓고 그녀가 설명을 마쳤다.

시안나가 허리에 손을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려 고개를 내리자 디트리히가 그녀의 뺨에 손을 올리고 그를 올려다보게 했다.

“누님….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순간 금안이 선명하게 빛났다.

“저도 누님과 일의 진상을 파헤치고 싶습니다.”

좁은 골목에서 진 그림자가 그의 까만 눈썹 아래 진지한 얼굴 위로 덧씌워졌다. 왠지 모르게 그녀는 디트리히가 긴장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안나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곤란했다. 카릴과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로 한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디트리히가 이 사건의 두 번째 강력한 용의자이기 때문이다.

‘로맨스판타지에 많이 나오잖아? 여주를 죽이려는 암살자를 남주가 뒤에서 처리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나 홀짝이는 거.’

물론 그녀는 여주가 아니었지만, 그녀가 위협에 빠지면 상대를 찾아가 복수할 만한 그런 관계라고는 여겼다.

하나 이것도 가설일뿐, 디트리히가 범인이라고 땅땅 확정 내린 건 아니었다.

‘카릴이 날 죽이려고 한다면 적극적인 대비책이 필요해.’

일순 ‘헤이스’가 머릿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디트리히랑 에르마야를 적극 결혼시키게 만든 원수한테 무슨.’

시안나가 망설이며 입술을 사리물다 이내 결심이 섰는지 그의 손을 힘껏 잡았다.

“그럼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만약 괴한이라도 덮치면 보호해 주는 걸로.”

“물론입니다. 누님.”

겨울처럼 꽁꽁 언 얼굴에 봄이 찾아온 듯 풀어졌다. 대체 무엇이 그를 불안하고 또 안심시키게 만드는 걸까.

시안나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디트리히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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