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49화 (49/70)

[49]

고기 스튜라도 만드는 건가? 순간 구두 바닥에 레고 블록 같은 게 밟혔다.

시안나는 간발의 차이로 벽을 짚었다.

“하아,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잖아!”

시선이 자연스레 아래로 향했다. 바닥에 요리 도구들이 난잡하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순간 묘한 소름이 등허리를 달렸다. 분명 요리를 하는 도중인데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끓는 소리 속에 요리 도구를 다루는 소음이 발생했던가?

끼익. 끼익.

“혹시 내가 올 줄 알고 함정을 파 놓은 건……!”

그녀가 등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시야 위에서 무언가 검은 물체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올렸다.

시안나의 동공이 튀어 나갈 듯이 커다래졌다.

“꺄아아악!”

***

“수사관님! 들어 보세요! 저는 범인이 아니라니까요!”

쾅쾅!

시안나는 쇠창살을 요란하게 흔들었지만 그래 봤자 아픈 건 서늘한 쇠의 감촉에 새하얗게 질린 손이었다.

마른 쇠 냄새가 지척에서 나자 억울함이 배로 가중되었다.

이곳은 치안 경비대의 지하 유치장이었다. 그녀가 어두운 감옥에서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왜 최초로 시체를 발견했다는 이유로 이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거냐고요!”

그랬다. 그녀는 브라움의 집에서 브라움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목격자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브라움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후보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녀의 외침에 쇠창살 너머 의자에 앉아 책을 보던 경관이 피식 웃었다. 그가 책을 덮고 빈정거렸다.

“당신이 제일 수상합니다. 죽은 브라움 씨 말입니다, 겉으로는 스스로 목숨을 마감한 것같이 보이지만 죽을 자가 요리를 하고 있을 리 없죠. 타살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정중하면서도 선을 긋는 힘이 있었다.

시안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상황의 모순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도 한 탓이었다.

낙담한 나머지 어깨가 축 늘어지자 병사가 단숨에 쐐기를 박았다.

“어떻게 공녀인 당신이 평민의 집에 혼자서 있던 겁니까? 전부 사실대로 실토해 주십시오.”

말문이 막힌 시안나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브라움을 찾아온 이유는 그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암살자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소설 때문이고. 하지만 지금 암살이니 소설이니 뭐니, 전부 이 병사에게 떠벌릴 수는 없었다.

‘여길 어떻게 나가야 하지?’

암살 지시는 카릴이 내린 게 확실했고, 여기는 제국의 수도였다. 카릴의 본거지 소굴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말이 없자 스스로가 이겼다고 여긴 것인지 남자가 히죽 웃곤 덮어 두었던 책을 들었다.

한동안 좌절한 나머지 땅을 파고 있는데,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자박자박 발걸음이 울렸다.

병사가 문에 나타난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놀라서 책을 휙 집어 던지고 허리를 일자로 폈다.

“어서 오십시오! 카릴 님!”

시안나의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갔다.

훤칠한 남자가 낮은 문에 허리를 굽히고 들어오자 우중충한 감옥이 햇빛을 받은 것처럼 환해졌다.

깨끗하고 찬란한 하얀 머리카락,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와 유리알 같은 푸른 눈동자, 높은 콧대와 엷으면서도 꾹 다물려 굳건해 보이는 입술.

남자는 소설 속 서브 남주이자 브뤼셀 왕국의 최고 지배자, 카릴 시베너였다.

소년 시절 요정 같던 귀여움은 사라지고 통치자의 위엄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시안나의 심장 사이로 겨울바람이 스쳤다.

카릴은 긱스의 시체를 거두어 디트리히의 저주를 풀지 못하게 만들려 하기도 했고, 브라움에게 그녀를 죽이라고 지시한 남자였다.

‘어째서 날 죽이려고 한 거야? 카릴?’

황궁에서 주최하는 연회나 무도회에 꼬박꼬박 참석한 시안나였다.

어릴 적 아슈토르 가문에 방문했을 적에도 그녀에게 호감을 표하기도 했고, 데뷔당트 때 첫 춤의 상대였다.

좀처럼 카릴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두려움을 숨긴 채 고이 고개를 접었다.

“왕국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유치장과 어울리지 않는 고운 목소리에 카릴의 걸음걸이가 감옥에 갇힌 시안나 앞에 멈추었다. 그는 특유의 천사같이 신성한 외모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누구야? 아슈토르가의 시안나 영애 아닌가. 설마 가을 나들이를 감옥에서 보내는 건 아닐 테지?”

대신 대답한 건 병사였다.

“영애께서는 지금 한창 조사하고 있는 사건의 목격자이자 범인으로 모셨습니다.”

“범인이라고? 위에서 치안 경비 대장이 말한 그 평민 살인 사건을 뜻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흠.”

카릴은 잠시 무언가 골몰하는 듯 턱을 매만졌다.

그럴 만했다. 그녀를 죽이라고 명했던 암살자의 죽음을 시안나가 목격했다. 매우 의미심장한 사안이었다.

그가 시안나에게 대뜸 물었다.

“그대가 정말 그 평민을 죽인 건가?”

“설마요! 저는 단순히 우연으로 현장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녀가 억울함을 토로하자 카릴은 다시 한번 턱에 손을 짚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결론을 내린 카릴이 병사에게 턱짓했다.

“풀어 줘.”

“그렇지만!”

놀란 병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와 카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가 곤욕스러운 얼굴로 제 의견을 피력했다.

“그녀는 유일한 목격자이자 가장 의심되는 사람입니다. 수상한 이를 함부로 풀어 줄 수 없습니다.”

“내 명이라 할지라도?”

카릴이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천사라고 감탄할 만한 미소에 냉기가 흘러나오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무서운 일이 닥치리라.

“지, 지금 당장 조치하겠습니다.”

병사는 쩔쩔매며 허리춤에 맨 열쇠를 허겁지겁 꺼냈다.

끼익. 감옥의 문이 열렸다.

시안나는 병사에게 ‘메롱’을 날리고 문을 빠져나왔다.

거뭇한 쇠가 묻은 손가락을 본 카릴이 혀를 차며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고 살폈다.

“쯧, 숙녀의 손을 이리 상하게 하면 되겠나?”

그는 조심스럽게 포개진 손을 끌어당겨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촘촘한 속눈썹을 내리깔고 입술을 맞추는 비스듬한 얼굴이 유려했다.

시안나는 순간 당혹스러워졌다.

카릴은 여러모로 그녀를 죽이려는 사람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냐. 조금 친절하게 대해 줬다고 해서 헬렐레할 건 아니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디트리히와 에르마야의 결혼식 때였나. 그때도 그녀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걸까.

복잡해지는 머리는 어쩔 수 없었다.

일단 궁금증은 한쪽으로 밀어 놓은 뒤, 시안나는 드레스를 잡아 올려 예를 갖추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워하지 마. 그럼 시안나 영애를 다시 감옥에 집어넣는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니까.”

무슨 소리지?

시안나가 한 대 얻어맞은 얼굴로 고개를 들자 카릴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째서 영애가 브라움의 집을 방문했던 거지? 솔직하게 말하면 풀어 주지.”

“하하. 그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자신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것을.

카릴도 자신이 의심스럽겠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그녀는 카릴이 손을 얹어 놓은 어깨를 내빼며 양 뺨을 감싸며 연기를 시작했다.

“실은, 저번 주 라일라 영애의 티 파티에서 수도에 유명한 향수 장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설명만 들어도 향기가 나는 기분에 저는 당장 수도로 달려 나갔답니다.”

카릴은 무슨 소린가 싶어 눈썹을 들썩였지만, 이윽고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날 너무 인파가 많은 나머지 그만 제 반지를 잃어버렸지 뭐예요. 이 하늘빛으로 빛나는 영롱한 오팔 반지 좀 보세요. 보시다시피 무척 소중한 물건이에요.”

“그래서?”

“엉엉 울며 발만 동동거리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제게 반지를 찾아 주었답니다.”

“그 남자가 브라움이다?”

“맞아요. 정말 고마운 나머지 저는 남자의 주소를 받았어요. 당연히 사례를 하려고 들렸는데 이런 일이.”

시안나가 과장되게 훌쩍이며 이슬이 맺혀 있지도 않은 눈썹을 벅벅 닦아 댔다.

그녀의 열연에도 카릴은 영 못마땅한지 팔짱을 낀 채였다.

‘그야, 미심쩍겠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브라움의 암살 타깃인 그녀가 브라움을 찾아갔다니 우연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카릴은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그녀를 가늠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곤 손을 뻗는다 싶더니 휙,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무리수였나?

심장이 발바닥 아래까지 곤두박질치는데 그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며 브라움이 찾아 주었다는 반지를 매만졌다.

“그렇군. 그대가 브라움과 그런 인연이 있을 줄이야. 불필요하게 무례를 끼친 건 대신 사과하지.”

휴, 다행히 넘어간 건가? 일단 지켜보자는 결론을 내린 거라 하더라도 나쁘지 않았다.

“수사에 당연한 일환이었을 뿐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시간이 늦어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대로 등을 돌리려는데 카릴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지금 설마, 내가 순순히 유치장을 나오게 해 주었다고 생각한 건가?”

그게 무슨 소리야?

시안나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따로 부탁할 일이 있으신 거예요?”

“그래. 그대에게 요청할 건이 두 가지 있어.”

마법으로 인한 불만이 밝혀 주는 이곳은 지독히도 어두웠다. 묘하게 위협적인 분위기에 시안나가 움츠러들었다.

낭패였다. 그는 디트리히의 저주를 풀지 못하도록 긱스를 처형시키려 했으며 브라움을 이용해 자신을 죽이려던 남자다. 또 소설 속에서 시안나에게 디트리히를 죽일 독극물을 건네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무슨 담쟁이넝쿨처럼 엮이는 건 위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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