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12화 (12/70)

[12]

시안나는 디트리히와 눈을 맞추려 허리를 수그리고 설핏 웃었다. 뭐든 말하라는 듯이.

디트리히가 양 볼을 붉혔다.

“헤, 헤이스가, 기사가 이기면…… 좋, 아하는 사람이…… 뽀뽀해 준다고.”

“응?”

“뽀뽀……. 누님, 이마에다가, 하고…… 싶어요.”

특유의 사슴 같은 눈망울이 유난히 똘망똘망해졌다.

시안나는 제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지금 디트리히가 뭘 말한 거지? 설마 뽀뽀? 마우스 투 마우스?

무려 최애캐의 어린 시절 뽀뽀라니! 이거 카릴에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수줍게 묻는 모습이 귀여웠다. 디트리히는 초조하게 눈치를 보았다.

“아, 안 되는…… 거예요?”

“당연히 되지! 눈 감을게. 멋진 기사님. 제게 뽀뽀를 해 주시겠어요?”

겨우 우승 상품이 이마에다 뽀뽀라니. 어쩜 디트리히는 생각하는 것도 사랑스럽지?

시안나는 제 이마에 잔머리를 귀 뒤로 쓸어내린 뒤 눈꺼풀을 감았다. 디트리히의 얼굴이 서서히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시안나의 어깨에 손이 얹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꾹 눌러졌다. 이윽고 담백하게 떨어져 나갔다.

꺅! 최애캐에게 뽀뽀 받았어. 어떻게 해!

아무리 최애캐의 어린 시절이라도, 결국은 소설대로 디트리히가 여주 에르마야를 좋아한다고 해도 좋은 건 좋은 거였다.

나중에 디트리히가 에르마야와 이어지면 네 첫 뽀뽀는 나였단다, 라고 놀려 줘야지. 그러면 디트리히는 어릴 적 일이니 잊으라며 수줍음을 타겠지.

시안나는 소설이 당연히 원작대로 진행될 거라고 여겼다.

“디트리히…….”

시안나가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디트리히의 볼이 한층 더 발그스름해진 것 같았다. 시안나의 입술이 피식 소리를 냈다.

“그렇게 좋아?”

“네에…….”

그런데 흐뭇하게 디트리히를 감상하던 것도 잠시, 옆에서 무시무시한 시선이 느껴졌다.

언제부터였을까.

디트리히를 껴안고 있던 긱스가 그녀를 무섭도록 딱딱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도무지 어린아이에게 보내리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차가웠다.

어쩐지 심장에 얼음이 철렁 떨어진 것처럼 으스스했다.

***

하늘색 페인트로 덧칠해진 것 같은 잡티 하나 없는 청명한 하늘 아래, 시안나의 머리칼에 환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울창한 숲속, 그녀가 땅에 발을 디딜 때마다 밑창 아래에서 바삭바삭 나뭇잎 밟는 소리가 번졌다.

그녀는 시원한 나무 냄새를 맡으며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처음에는 디트리히와 함께 하얀 꽃을 찾는 중이었다. 왜 그런 걸 찾느냐고?

두 사람의 첫 만남. 디트리히가 에르마야에게 하얀 꽃을 주며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는 일화 때문이었다.

그렇다. 바로 그 장면이 올바로 이루어지기 위한 예행연습을 하려는 것이다.

처음에는 정원을 살폈지만 보라색, 노란색 수만 가지 꽃들 속에서도 그녀가 찾는 하얀 꽃은 없었다.

그리하여 지금. 기어코 공작가 후문의 산기슭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다.

바람에 몸을 비비는 기다란 녹색 나무들을 얼마나 지나쳤을까.

물을 때리는 폭포수 소리가 진해졌다. 너무 깊숙이 들어온 모양이다.

“디트리히. 혹시 많이 힘드니?”

어린 디트리히를 너무 오래 걷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에 그녀가 손을 꼭 잡고 있는 디트리히를 내려다보았다.

기특하게도 디트리히는 힘든 내색 없이 고개를 좌우로 붕붕 내저었다.

“흐……. 누님이랑 있으면…… 온종일…… 걷고 싶어요.”

“벌써 30분째 헤매고 있는걸. 다리 아프다고 투정 부려도 괜찮아. 업어 줄까?”

“정말…… 이에요. 누님과 함께라면 집에서…… 왕국, 수도까지도 거뜬해요.”

디트리히가 발간 볼을 부풀리고 올려다보았다. 왜 못 믿냐는 듯 불만스러운 눈초리였지만 열 살 좀 넘은 어린애가 그러면 귀엽기밖에 더하겠는가.

게다가 대답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슈토르가는 왕국과 경계선이 맞닿아 있었지만 마차로 무려 세 시간이나 걸리잖아.”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작위가 평균 두세 개인 데 반해 아슈토르가는 다섯 개가 넘어갔으니 땅의 넓이가 짐작이 갈 것이다.

행군이나 마찬가진데 자신만만하게 괜찮다고 어깨를 펴는 모습에 볼을 콱 깨물어 주고 싶었다.

어쩐지 카릴을 쓰러뜨렸을 때 디트리히가 생각나서 조금 듬직한걸?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

그때, 디트리히의 등 뒤로 하얀 유령같이 휘날리는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저게 뭐지?

시안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찔할 정도로 높고 가파른 절벽, 그 끄트머리에 리시안서스가 바람에 몸을 문대고 있었다.

찾았다! 하얀 꽃!

타다닥. 시안나는 환한 웃음을 짓곤 꽃을 향해 날래게 달렸다. 꽃이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피어있던 탓에 디트리히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시안나는 리시안서스 하나를 꺾고 디트리히에게 돌아와 꽃을 건넸다. 디트리히는 댕그래진 눈으로 제 손에 쥐어진 리시안서스를 구경했다.

“후으?”

“디트리히. 이런 예쁜 꽃을 보면 좋아하는 사람 귀에 꽂아 주는 거야. 예쁜 꽃은 가장 소중한 사람한테. 알겠니?”

이해 가냐는 듯 시안나가 통통한 꽃잎을 톡톡 두드렸다.

여전히 디트리히는 의뭉스러운지 댕그란 눈으로 한참 동안 꽃을 응시했다.

“소중한 사람…….”

금색 눈동자가 방황하는 것도 없이 시안나에게 꽂혔다.

어느새 시간은 붉은 노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새빨간 하늘 아래에 바람에 흩날리는 녹음을 닮은 풀빛 머리카락이 붉은 뺨 위를 살랑거렸다.

디트리히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붉은 노을 아래에 흩날리는 청록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디트리히의 손가락이 시안나를 척 가리켰다.

“흐……. 좋아……. 소중해.”

어리둥절해진 시안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디트리히에게 가장 소중한 게 나라고?”

“응…….”

“긱스 공작님도 계시고, 항상 디트리히를 지켜 주는 헤이스도 있잖아.”

도리도리.

뺨에 말간 홍조가 피어오른 디트리히는 무언가 결심에 섰는지 시안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환한 금안이 빨려 들어갈 만큼 가까이 온 순간, 볼에 말캉한 감촉이 느껴졌다.

볼 뽀뽀였다.

쏴아아.

바람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잠시 뒤 눈동자에 아기 해님처럼 헤실헤실 미소 짓는 디트리히가 맺혔다.

다른 누구보다 내가 좋아? 10년 후에 날 지켜 줄 수 있어?

시안나도 덩달아 마음이 들떴다.

“디트리히는 내가 얼마만큼 좋아?”

“아버지보다…… 헤이스보다…… 훨씬 좋아, 요!”

시안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어느새 그녀가 소설 속 세계에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갑자기 로판에 빙의했을 땐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그럼에도 그녀가 아슈토르 공작저에 빠르게 녹아들 수 있었던 건 디트리히 덕이었다.

시안나도 친밀해진 디트리히에게 이따금 물어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제 시안나가 디트리히의 식사를 도와주는 것, 천둥이 치는 날 밤 함께 잠드는 것, 매일 정원에 놀러 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간 디트리히와 함께 한 추억이 실체 있는 꽃으로 나타난 것만 같았다.

시안나는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해졌다.

방긋 웃던 디트리히는 시안나의 귀에 리시안서스를 꽂아 주었다. 그녀가 소중한 사람에게 주라고 했던 말처럼.

바람에 굽이치는 연둣빛 곱슬머리에 흰 꽃은 퍽 잘 어울렸다.

“시…… 아…… 나. 소중해……. 아껴 주고…… 싶어.”

“디트리히…….”

시안나는 잠시 망설였다.

만약 그녀가 여주 에르마야였다면 근심 없이 꽃을 받았을 터다.

하지만 혹여 원작을 거스르다 디트리히의 저주가 영영 풀리지 않을까 두려웠다.

꽃을 빼내려던 것도 잠시, 초롱초롱한 금안을 보는 순간 멈칫거렸다.

왠지 디트리히를 바라보는 자신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디트리히와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은 너무 큰 욕심일까?

시안나는 귀에 꽂힌 꽃을 뽑는 대신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고마워. 이 꽃, 내 보물로 간직할게.”

“헤헤…….”

보조개가 팬 디트리히의 얼굴 위로 발간 노을이 번졌다.

두 사람 사이로 온풍이 지나갈 때였다.

“시안나 아가씨! 도련님!”

두 사람을 애타게 부르는 헤이스의 목소리가 하늘에 퍼졌다.

***

시안나와 헤이스는 후문 입구에서 맞닥뜨렸다. 헤이스는 그녀를 만나자마자 찾느라 뛰어다닌 울분을 토해 내듯 꾸지람을 늘어놓았다.

“시안나 님. 공작저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마십시오. 이번 일은 처음이니 특별히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그럼 한 발 말고 손가락 하나가 먼저 나가면 어떻게 돼? 아니면 머리카락이라도.”

“제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시면 직접 시도해 보시겠습니까?”

“하하, 진짜 한다는 건 아니고.”

헤이스가 정색을 하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는 바람에 시안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장난을 거두었다.

요 한 달간 디트리히와 잘 지내는 모습을 본 탓일까. 고슴도치처럼 뾰족하던 헤이스의 경계가 살짝 허물어져 있었다.

아직 긱스라는 큰 산이 남아 있지만 이대로라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정말이지 헤이스가 숲속에서 두 사람을 먼저 발견하길 다행이었다.

디트리히를 신줏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하는 긱스에게 발각되었다면 시안나의 짐은 중앙 분수대 앞에 모조리 버려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때만 해도 시안나는 몰랐다.

그녀가 오늘 한 행동이 디트리히를 다치게 만들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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