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저주에 걸려 정신 연령이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디트리히와 검술 훈련을 차근히 받아 온 왕자. 두 사람 중 압도적으로 유리한 건 당연히 왕자였다.
‘왕자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면 어떡하지? 가령 성인이 되고 나서 디트리히의 독살을 지시한다거나…….’
시안나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디트리히가 더욱 미치고 환장하는 상황을 부추겼다.
“좋…… 아.”
“디트리히! 뭐가 좋다는 거야!”
믿었던 디트리히마저 수긍하자 시안나는 까무러쳤다.
그렇게 경악하는 그녀를 뒤로한 채 두 소년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그럼 먼저……!”
말이 끝나자마자 방어 자세를 취한 디트리히에게 카릴이 잽싸게 연습용 검을 휘둘렀다.
탁!
따가운 소리와 더불어 두 사람의 검이 꽝 부딪쳤다.
맞붙은 두 개의 검이 힘의 충돌에 의해 덜덜 떨렸다. 디트리히가 간발의 차로 막아선 모양새였다.
아쉽게도 카릴의 힘이 우세한 건지 검은 점차 디트리히 쪽으로 내려왔다.
“윽……!”
이윽고 힘에 못 이겨 디트리히가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카릴이 민첩하게 공격했다.
휙!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힘찼다.
“으윽, 아!”
디트리히에게서 공격을 막기에만 급급한 힘겨움이 느껴졌다.
탁! 탁!
카릴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검을 휘두르며 디트리히를 압박했다.
“디트리히! 칼일랑 버리고 도망쳐!”
그녀의 외침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디트리히는 계속 전진하는 카릴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 내며 후퇴했지만 두 눈빛은 생생히 살아 있었다.
디트리히의 팔이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자 시안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나를 불쾌하게 만든 대가는 두둑이 쳐 주지!”
카릴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싶어 끝내려고 했다. 식당에서 정다워 보이던 두 사람을 떠올리며 그가 검을 높게 쳐들었다.
“디트리히! 위험해!”
쾅! 최후의 일격이었다는 듯 굉음이 정원을 가득 메웠다.
시안나는 식겁한 표정으로 양 뺨을 감싸 안았다.
“끈질기군…….”
디트리히의 목에 검이 들어가리라 여겼지만 이를 악 깨문 디트리히가 간발의 차로 막아섰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슬슬 막는 것도 힘에 부친 건지 이마에 땀방울이 주룩 흘러내렸다.
‘이대로는 디트리히가 지고 말 거야.’
시안나가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디트리히는 검을 든 손에 힘을 주며 눈을 감고 평소 가르쳐 주던 헤이스의 가르침을 생각해 냈다.
‘분명히 상대는 디트리히 님을 얕보고 앞으로 치고 들어오기만 할 거예요.’
헤이스가 조금 우울한 어조로 토로했었다.
그는 제 앞에선 어린 소년을 응시했다.
성인 얼굴 하나만큼 차이 나는 키. 뽀송뽀송한 몸과 귀여운 외모. 소년은 새끼 곰보다도 체구가 왜소했다.
약해 보였다. 아마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감상일 테지.
하지만 방심을 불러일으키기도 쉬웠다.
헤이스는 디트리히에게 알맞은 검술을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디트리히의 흐트러진 자세를 교정해 주며 그가 설명했다.
‘디트리히 님은 공격하지 마시고 방어만 하시면서 발을 뒤로 빼십시오.’
‘으…… 응?’
‘그러면 상대가 분명 얕잡아 볼 겁니다. 그러다가 최후의 일격을 가할 때…….’
그렇게 디트리히는 종일 뒤로 내빼는 연습만 했다.
헤이스의 가르침을 떠올린 디트리히가 감았던 눈을 부릅떴다. 또렷한 눈동자에 카릴은 잠시 흠칫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런 백치 같은 공자의 기세에 눌렸다는 사실에 짜증이 솟구쳤다.
상대가 피하기만 하는 대결도 싫증이 났다.
“지루하군. 슬슬 끝맺음을 내겠어!”
흥분한 카릴의 동작이 커졌다.
디트리히의 눈이 팟, 하고 크게 뜨였다.
헤이스가 말했던 상대가 방심하던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디트리히는 큰 걸음으로 다가오는 카릴을 흘려보내듯 옆으로 피했다.
계속해서 뒤로 가던 디트리히가 갑자기 비켜서자 공격 대상을 잃어버린 팔이 순간 당황했다. 디트리히를 때리기 위한 동작이었기 때문에 발 앞으로 힘이 쏠린 상태였다.
힘이 잔뜩 들어간 카릴은 디트리히가 있었던 쪽으로 무게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윽?”
털썩. 카릴의 은색 머리카락과 잔디가 부딪쳤다.
으윽……. 그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믿기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뒤로 피하는 것밖에 없어 보이던 소년이 기다렸다는 듯 공격을 흘리다니.
설마 처음부터 내가 방심하는 순간을 기다린 건가?
“제길, 아직 승부는 결정 나지 않았!”
악다구니를 쓰며 카릴이 일어서려는데, 목덜미에 딱딱한 막대기가 닿았다.
기다란 목검이 제 목에 들어와 있었다.
“……!”
놀란 카릴이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는 태양 아래로 디트리히의 어깨가 크게 헐떡거렸다.
힘들어 보이는 와중에 소년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씩 올라갔다.
“내가…… 이겼, 어.”
***
“긱스 공작 덕에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냈군.”
어느새 산 중턱에 걸려 있던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여왕은 공작과 오찬을 즐긴 후 왕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 앞에 섰고 시안나와 디트리히, 공작이 배웅하고 있었다.
다섯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해 질 녘 노을 아래처럼 길게 늘어졌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공작은 하루 종일 여왕을 대접하느라 지쳤을 텐데도 담백하게 대답했다.
살포시 웃음을 머금은 왕비는 저보다 한참 작은 디트리히를 흥미롭게 응시했다.
“그나저나……. 아까 왕자가 공자와 검술 대결을 했다고 들었는데.”
“네. 디트리히 공자의 실력이 대단하더군요.”
담담한 어조로 대답한 왕자가 디트리히를 흘겨보았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낯 아래로 숨길 수 없는 격분이 흘렀다.
“왕자를 이기다니. 훗날 근위 대장직을 맡으면 어떻겠는가?”
“아직 먼 미래의 일입니다.”
공작은 농으로 가볍게 흘려 넘기길 원하는 듯했지만 왕비의 눈동자엔 진심이 어려 있었다.
고요해진 분위기 사이로 까악까악, 음산한 까마귀 울음이 수를 놓았다.
“……그래. 그럼 다음에 또 즐거운 시간을 가지도록 하지.”
왕비가 마차에 오를 채비를 했다.
곁에 있던 왕자의 눈동자가 시안나와 부딪쳤다.
소년의 눈동자는 언제 사나웠냐는 듯 부드러웠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시안나가 얼어붙기에 충분했다.
특히 디트리히와의 검술 대결에서 카릴이 패배한 후, 저조한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바짝 긴장한 시안나에게 카릴이 다가왔다.
“오늘 즐거웠어. 시안나 영애. 특히 내게 잊지 못할 추억도 선물해 줘서 고마워.”
왠지 싸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많이 부족했을 텐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시안나가 목이 달랑달랑한 기분을 느끼는데 왕자가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주시했다. 이윽고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손등에 입술을 내렸다.
화들짝 놀란 시안나에게 카릴이 저녁노을 사이로 아름다운 웃음을 흘렸다.
“네가 마음에 들어. 그러니 편하게 대해 줘.”
보통 영애들이었다면 볼을 붉히며 밤잠을 설쳤겠지만 시안나는 도리어 몸에 한기가 스몄다.
미래에 독살 명령을 내리는 왕자와 멀어져야 하는데!
한 발짝 가까워진 느낌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럼.”
눈을 사르르 접어 눈인사를 한 카릴이 마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마차의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시간은 끝이 났다.
***
마차 안은 새빨간 노을 색으로 물들어 텁텁한 느낌이 가득했다.
숨쉬기 힘들어 보이는 공기 속, 턱을 괴고 붉은 하늘을 응시하던 왕비가 난데없이 말문을 열었다.
“공자가 왕자를 이겼다고 하셨나요? 그 저주에 걸린 아이가요?”
“그렇습니다.”
침체된 목소리에 왕비가 붉은 입술을 하얗게 질릴 정도로 깨물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쪽에서도 조치가 필요하다는 뜻이군요.”
카릴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로 주름진 여왕의 얼굴이 어찌나 사나운지 붉은 노을도 부들부들 떠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손으로 제 입술을 쓸어내렸다. 손가락에 새빨간 피가 묻어났다.
***
마차가 점이 되다 아예 사라지자 마차에 시선을 뗀 공작이 디트리히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경이롭다는 표정이었다.
“시안나. 디트리히가 왕자님을 이겼다는 게 사실이냐?”
“헤헤, 시안나 누님, 덕분에.”
으응? 나? 난 그냥 그만두라고 했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하지만 디트리히는 묘하게 확신 가득한 얼굴로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긱스의 세차게 흔들리는 시선이 시안나에게 닿더니 곧 디트리히에게로 옮겨졌다. 곧 감격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무언가를 배우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네 아비인 나조차 말이다……. 그런데 네게 재능이 있을 줄이야.”
평소 쓰던 공작이란 이름의 가면이 떨어져 나가고, 그의 얼굴은 아버지 그 자체로 변했다.
공작이 반쯤 무릎을 꿇고 작은 소년의 등을 껴안았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한데 그게 은총일지 독일지…….”
그대로 안긴 디트리히는 멀뚱히 서 있다 시안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눈을 빛냈다. 아버지의 포옹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누, 누님. 나, 소원!”
“아.”
시안나는 한참 있다가 대결에 우승 상품이 걸린 사실을 떠올렸다.
“이긴 사람에게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었지.”
제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된 사항이었지만 디트리히가 승리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왕자가 우승했다면 독살 지시를 내릴까 꺼림칙했겠지만, 디트리히가 뒤탈이 있을 리 없었다.
어린 디트리히가 찜찜한 소원을 입에 담을 리도.
“그래. 디트리히는 무슨 소원을 빌고 싶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