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7화 (7/70)

[7]

시안나가 황급히 대답했다.

“그게 아니야. 디트리히와 함께 디저트를 먹는데 오징어 파인애플을 먹더니 기침을 토하더라고. 나도 그때 디트리히에게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구나 깨달은 거야. 그리고 심각한 줄 알았는데 더 이상 기침을 하질 않아서 그냥 넘어갔고.”

헤이스가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항상 디트리히 님을 마땅찮게 여긴다는 걸 모를 줄 아셨습니까. 이때가 기회다 싶어 실수인 척 궁지에 빠뜨린 거겠죠.”

표정에서 ‘도련님을 아프게 만든 범인은 너’라는 글자가 읽혔다.

‘참나. 내가 왜 이런 억울한 누명을 써야 하는 거지?’

할 수만 있다면 속마음을 꺼내서 헤이스 앞에 몽땅 펼치고 싶었다.

언성이 오가서일까, 비몽사몽 하던 디트리히가 눈을 떴다. 시안나가 침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반색했다.

“디트리히. 좀 괜찮아? 정신이 들어?”

디트리히는 대답 대신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헤이스를 올려다보았다.

“헤…… 이스.”

“네. 디트리히 님.”

“……지마.”

“네?”

“누님을 괴, 괴롭히지 마.”

유약해 보이는 황금색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면서 헤이스의 옆구리를 밀기까지 했다. 물러가라는 의사 표현이었다.

시안나를 몰아붙이던 헤이스는 도리어 저가 사라져야 할 판이 되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우쭐했던 기색은 어디 가고 그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저는 도련님을 위해 사실 관계를 파악하려고…….”

“하, 지 말라고.”

예의 앞에 붙이는 ‘후으’나 ‘흐으’ 같은 말이 없는 거로 보아 명령을 내리는 데 진심인 듯했다.

시안나를 보호하듯 디트리히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어린 소년 같던 순진무구함 대신 차기 가주의 일면이 엿보였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비스듬히 보이는 디트리히의 진지한 얼굴에 시안나가 입을 헤, 벌렸다.

디트리히는 저주에 걸린 와중에도 후계자 교육을 착실히 받는 중이었다. 아랫사람들을 어떻게 부려야 하는지 귀가 닳도록 들은 디트리히였다.

헤이스 또한 디트리히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헤이스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럼 간호는 지금 당장 유모에게 일러두도록…….”

“싫어. 누님 말고, 다른 사람…… 안 돼.”

헤이스의 눈동자가 놀라움에 크게 뜨였다.

도련님이 토끼 인형이 아닌 사람에게 애착을 보이다니. 그가 디트리히를 호위한 이래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긱스는 딱딱한 성격 때문에 디트리히가 어려워했고 전속 시녀 세 명은 이름도 틀리게 말하는 통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시안나에게는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 사람처럼 군다.

‘도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거지.’

그가 시안나를 신기한 눈으로 흘긋 응시하자, 그녀가 얄밉게 혀를 내밀었다.

‘헤이스. 이 자식, 나한테 별 구박을 다 하더니 쌤통이다.’

고립무원이 된 헤이스가 칫, 혀를 차자 시안나는 사이다를 한잔 들이켠 것처럼 심장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헤이스는 시안나가 앞서 한 말을 변명이라고 여겼다.

바쁜 공작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디트리히 근처를 맴도는 그는 소녀의 질투를 쉽게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소녀는 디트리히를 꺾고 공작가를 차지하려는 못된 뱀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선 단호하게 나오는 디트리히 때문에 물러서기로 했다.

그는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과 대비되게 매우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도련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알레르기 약입니다.”

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그대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긴장이 풀린 시안나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디트리히를 돌보는 것뿐인데 논쟁이 필요하다니.”

어렸을 적부터 날 질색하는 미래의 약혼자라니. 과연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녹록지 않은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여전히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디트리히가 그녀의 배에 얼굴을 파묻은 자세로 낑낑거리며 올려다보았다.

“시…… 안나 누, 님. 미안. 헤이스 대, 대신…… 사과할게.”

“아니야. 디트리히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걸.”

그래도 미안한 건지 댕그란 금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이 그렁그렁거렸다.

“흐…….”

순수함이 가득한 눈망울을 보니 속상한 마음이 눈처럼 녹아내렸다.

‘눈치 보는 새끼강아지 같아….’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잠재우며 그녀가 컵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 헤이스에게서 받은 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럼 디트리히는 알레르기 약 먹고 잘까?”

그러자 흐렸던 눈이 다른 의미로 시무룩해졌다.

“후으…… 약…… 맛없어. 먹기, 싫어.”

“안 돼. 약 먹어야 다시 건강해지지. 아프면 나랑 같이 놀 수 없는걸?”

귀여운 투정에 시안나가 과장스럽게 눈꼬리를 축 내렸다.

환한 금안이 겁을 먹은 것도 잠시,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시안나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싫, 어. 누님…… 이 좋아.”

“그래. 그럼 빨리 약 먹고 코, 해야 해.”

“흐……. 이거 먹으면…… 누님을 볼 때…… 심장이 간지러운 것도…… 나아?”

시안나가 사뭇 심각해졌다.

심장에 영향을 주는 알레르기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혹시 벌레가 심장을 갉아 먹는 병이라도 있는 걸까? 판타지 세계니까 가능할지도.

나중에 시녀에게 상담하자고 생각하며 시안나가 새끼를 척 들이밀었다.

“당연하지. 내가 꼭 낫게 해 줄게. 자, 약속!”

새끼손가락을 본 디트리히가 조심스레 새끼를 걸었다. 디트리히가 커다란 눈을 빛내며 끄덕였다.

“흐……. 누, 님. 좋아해. 그러니까……. 먹을래요.”

결국 디트리히는 온순한 양처럼 입에 들어오는 알약을 얌전히 삼켰다.

잠시 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침실을 메웠다.

***

다음 날.

침구를 갈기 위해 디트리히의 방에 들어선 시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침대 옆 의자에서 선잠을 잔 듯, 시안나의 옷차림이 어제 그대로였다.

“어머. 시안나 님. 설마 디트리히 님을 밤새 간호하신 거예요?”

“아……. 왔어? 으응.”

부스스한 연둣빛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은 시안나가 후아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눈 밑이 거뭇하게 내려와 있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간호하라고 시켰을 리 없는데 스스로 밤을 새우다니.

밤새 환자를 돌보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시녀는 눈앞에 소녀가 저에게 시녀 일을 가르쳐 준 시종장처럼 거대해 보였다.

시안나가 왜 왔냐고 물어서야 시녀는 제 할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침구를 갈아 드리려고 합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으, 으…….”

이불에 손을 뻗던 시녀는 디트리히가 이불을 쥔 후 앓는 소리를 내자 퍼뜩 떨어졌다.

방금 막 잠에서 깬 건지 디트리히가 눈을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이불보다 다른 걸 원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무언가 불편한 게 있는 걸까.

시녀가 고민하는 와중, 시안나가 전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우유 좀 가져다줄 수 있을까?”

“우유요?”

“응. 아까 디트리히가 우유 달라고 했잖아.”

“네?”

시녀는 잘못 들었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우유라니. 방금 도련님께선 으으, 라는 신음만 내지 않았나.

그런데도 시안나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으으’가 우유를 뜻하는 건가요?”

“정확히는 ‘으으’가 아니라, 뒤에 ‘으’가 ‘유’랑 비슷한 발음이었어.”

그랬…… 나? 하지만 기억을 곱씹어 봐도 으으, 였을 뿐이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하품한 디트리히가 또다시 정체불명의 말을 내뱉었다.

“아어.”

‘아어’라니. 저건 또 무슨 말일까?

도저히 어떤 단어도 연상할 수 없었다. 설마 시안나 님이 이것도 유추하시겠어?

그녀의 예상과 달리 시안나는 냉큼 명을 내렸다.

“샤워하고 싶다고? 얼른 목욕물을 준비해 줘.”

“……네?”

‘아어’가 샤워라고?

맞다는 듯 디트리히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물개박수를 쳤다.

‘귀라도 파야 하나? 아무리 들어도 아어, 였는데. 대체 간밤에 두 분께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시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두 사람은 하루 만에 둘만의 세계를 구축한 듯했다.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시녀는 혼자만 이상한 세계에 떨어진 듯한 기분을 느끼며 목욕 준비를 했다.

***

날이 밝았음에도 꿈에서 깨지 않았으니 시안나로 빙의한 게 확실했다.

이제 그녀는 온전히 디트리히에게만 정신을 쏟을 수 있었다.

다행히 디트리히의 열은 오전에 씻은 듯이 나았다. 그럼에도 혹시나 한 마음에 시안나는 계속해서 디트리히의 곁을 지켰다.

그렇게 다음 날.

디트리히의 피부에 돋아났던 붉은 자국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시안나는 한시름 놓았다.

더 이상의 돌봄은 무의미했기에 방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의외의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 누님. 계속…… 같이 있고 싶어요. 제발 제 방에서…… 같이 자요.”

시안나의 허리를 감싸 안은 디트리히가 끈끈이처럼 달라붙었다. 그녀가 어깨를 밀어도 소용이 없었다.

시안나는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는 디트리히의 수프를 먹여 주고 있었고 이젠 수프 그릇을 치우며 제 방에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디트리히가 눈치챈 걸까. 디트리히는 일부러 수프도 느릿하게 먹고 계속 아프다며 칭얼거렸다.

그녀가 엉겨 붙는 디트리히를 밀어내며 다그쳤다.

“억지로 떼쓰면 못 써. 이제 다 나았으니까 평소처럼 혼자 자고 혼자 일어나야지.”

“후으……. 그, 그래도 누님이랑 함께 있고 싶, 싶어요. 지난밤처럼…… 같이 자 주세요.”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무게감에 시안나는 이마를 짚었다.

최애캐 덕질 겸 죽음을 피하기 위해 디트리히가 제게 호감을 느끼게 만들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결과가 너무 지나친 것 같았다.

이렇게 그녀랑 떨어지면 죽는 사람처럼 구는 건 뭐란 말인가.

어떡하지? 함께 자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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