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6화 (6/70)

[6]

***

“디트리히? 방에 있니?”

끼익. 문고리를 잡아당긴 시안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시녀들은 그녀가 디트리히의 방 위치를 묻자 의아해했지만 다행히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래서 시안나는 오는 길을 헤매지 않고 디트리히랑 뭘 하고 놀지 결정할 수 있었다. 오늘은 결혼식 놀이다!

이왕 빙의한 거 사심이란 사심은 가득 채울 심산이었다.

“10년 뒤에 죽을 수도 있는데, 이 정도 욕심부리는 건 괜찮잖아?”

그런데 방 안은 대답 없이 적막했다.

“설마 자는 거니?”

오후에 토끼 인형을 빼앗겨 마구 울음을 터뜨렸으니 진이 다 빠져버린 걸지도 모른다.

혹시 디트리히를 깨울까 싶어, 시안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윽고 침대 이불에 푹 파묻힌 잡티 없는 뽀송뽀송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고이 감긴 긴 속눈썹은 길었고 입술과 볼은 앵두처럼 발그레했다.

“어쩜 자는 모습도 천사 같지? 디트리히는 실수로 하늘에서 떨어진 게 분명해.”

시안나는 턱 아래, 손으로 꽃잎 받침을 하곤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별안간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윽, 흐으……. 으으.”

“디트리히?”

얼굴을 찡그린 디트리히가 바르작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깜짝 놀란 시안나가 까만 머리칼 아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왜 이렇게 불구덩이처럼 뜨겁지? 해산물을 못 먹게 했으니 알레르기는 아닐 텐데.”

디트리히에게 지병이 있었나 고민했지만 집히는 바가 없었다.

시안나는 결국 차임을 울렸다.

“여기! 얼른 수건이랑 물이 든 대야를 가져와 줘!”

시녀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다급한 요청에 부리나케 수건과 물이 든 대야를 대령했다.

그사이, 디트리히의 이마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시안나가 물을 짜 낸 수건으로 땀이 흐르는 턱선을 죽 닦아 냈다.

“으엣취!”

이제는 기침까지 했다. 코는 발갛게 부어올라 숨쉬기도 힘들어 보였다.

“흐으……. 읏…….”

숨이 더욱 거칠어지자, 시안나가 잠옷의 윗단추를 끌어내렸다. 붉은 두드러기가 하얀 가슴팍 위를 수놓았다.

명백한 알레르기 반응이었다.

그녀는 디트리히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감상했다. 그래서 해산물을 먹지 않았다는 데 확실할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혹시 저녁 이전에 해산물을 섭취한 건가?

디트리히의 전속 시녀가 전전긍긍하며 대기하는 중이었다. 시안나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오늘 디트리히가 먹은 음식 중에 해산물이 들어간 음식이 있을까?”

“네. 점심이 좀 지났을 적, 후식으로 오징어와 파인애플을 곁들인 간단한 디저트를 내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알레르기의 원인은 오징어인 게 분명했다.

“디트리히는 해산물에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주방장에게 당부해 줘. 그리고 지금 디트리히는 알레르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같아. 알레르기 약 좀 가져다줘.”

“그럴 수가……. 네, 알겠습니다.”

안색이 파랗게 질린 시녀가 쏜살같이 방을 나섰다.

시안나의 걱정 섞인 눈길이 숨을 가쁘게 쉬는 디트리히에게 닿았다.

갑갑함을 줄여 주려 단추마저 풀었지만, 얼굴엔 극심한 고통으로 뒤덮였다.

“으……. 으.”

혹시 방 안 공기가 묵직한 건가 싶어 시안나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방 안에 스며들며 디트리히의 뺨을 간지럽혔다.

“시, 아…….”

죽어 가는 듯한 희미한 목소리에 그녀가 재빨리 침대에 다가갔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 위 사슴처럼 긴 속눈썹이 들리고 금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경을 헤매는 사람처럼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많이 아프지? 조금만 참아. 곧 약을 준비해 올 테니까.”

시안나가 손등으로 뺨을 감싸자 디트리히가 볼을 붙여 왔다.

몸이 불구덩이처럼 뜨거운 데 반해 시안나의 손길은 시원했다.

“하아……. 누, 님. 시안나…… 누님……. 기분 좋아요.”

“많이 덥니?”

디트리히의 등을 받쳐 반쯤 일으켜 세운 시안나가 물컵을 건넸다. 입술에 컵을 갖다 대기가 무섭게 꿀꺽. 꿀꺽. 어미젖을 먹는 소처럼 물을 삼켰다.

입술을 축인 디트리히가 중얼거렸다.

“배…… 그아.”

“베그아?”

많이 아픈지 디트리히의 발음이 뜻도 유추 못 할 만큼 뭉개졌다.

시안나는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베그아가 뭐지? 이 세계에만 있는 특이한 인사말인가?

그때, 두 사람 사이로 요란한 소리가 가로놓였다.

꼬르륵.

디트리히의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시안나는 알겠다는 듯 손뼉을 쫙 소리 나게 쳤다.

“배고파?”

끄덕끄덕.

컵을 받아 탁상 대에 올려놓은 후, 시안나는 시녀에게 간단한 수프를 가져올 것을 명했다. 곧 감자 수프가 풍기는 고소한 냄새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자. 아, 해. 디트리히.”

후, 후, 분 뒤 디트리히에게 숟가락을 들이밀자, 디트리히의 입이 아기 새처럼 열렸다.

“아.”

디트리히는 배가 많이 고팠는지 수프를 쪽, 소리 나게 빨아먹었다.

먹을 만큼 기운을 차린 걸 보니 심장이 뿌듯해졌다.

“이제 깨어났으니 시녀를 불러올게. 전속 시녀가 나보단 백배는 능숙할 테니까.”

디트리히가 깨어나자 한숨 놓인 시안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수프를 꿀떡 삼킨 디트리히가 시안나의 손을 붙잡자 무산되고 말았다.

“흐……. 누님……. 가, 가지 마요.”

“응?”

디트리히가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몽롱한 낯으로 그녀를 졸랐다. 평소보다 어리광이 심한 느낌이었다.

시안나가 멈칫하는 걸 느낀 디트리히가 작은 입을 우물거렸다.

“후으……. 누님이 곁, 곁에 있으면……. 밥도 어렵지 않고…… 아파도…… 금세 시원해져요.”

디트리히의 볼이 유난히 붉었다. 열 때문일까, 다른 까닭이 있는 걸까.

“우, 자꾸…… 심장이 누가 뽀뽀하는 거, 처럼 간지러워.”

디트리히의 까만 머리칼이 시안나의 어깨에 툭 기대었다.

“곁에 있어 주세요……. 제발…….”

그녀를 붙잡으려는 간절한 매달림이 시안나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꼭 아픈 새끼 짐승이 어미를 부르는 목소리처럼 구슬펐다.

‘소설은 디트리히가 성인이 된 이후로 시작되지.’

비록 남주의 어린 시절은 소설 속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빙의 후 디트리히를 지켜본 결과, 그의 쓸쓸한 유년 시절이 확 절감되었다.

디트리히는 저택 내에서 말 붙일 곳 없는 외톨이였다. 시종들은 디트리히에게 깍듯했지만 말을 더듬거나 속도가 느려지면 지루해했다.

식사 중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종이 알아들었다며 말을 끊거나 사무적으로 대하는 걸 목격한 참이었다.

‘공작에겐 납작 엎드리는 반면 디트리히는 저주에 걸려 있으니 얕보는 거겠지.’

공작 부인은 돌아가시고, 시안나와 또래 소년들이 괴롭히기까지.

말이 통하는 이 없는 곳에서 디트리히는 얼마나 온정을 원했던 걸까. 토끼 인형에게 애착을 보이는 건 외로움이 폭발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시안나에게 빙의해서 다행이야.’

처음에는 여주 에르마야로 빙의하지 않은 현실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여주가 되었다면 성력으로 저주를 풀어 주고 그의 구원자로서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는 시안나에게 빙의했음에 감사했다. 디트리히의 어린 영혼을 치료하는 건 성인이 된 이후에 만나는 에르마야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안나의 얼굴에 아련한 기운이 서렸다.

“디트리히가 원하면 계속 있을…….”

시안나가 부드러운 검은색 머리칼을 쓸어 넘길 때였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벌컥.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문이 젖혔다. 손에 병을 쥐고 있는 헤이스였다.

시안나는 헤이스가 디트리히를 돌보아 준 걸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방금 전 복도에서 무슨 속셈이냐며 화를 냈던 그였다.

그녀를 다시 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침대에 다가온 헤이스는 다짜고짜 화를 냈다.

“도련님께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뭐?”

사나운 외침에 시안나는 스스로가 무슨 짓을 저지른 줄로만 느껴졌다. 한데 어떠한 것도 짚이는 게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와중 헤이스가 빈정거렸다.

“어째 잠잠하시다 했습니다. 뒤에서 이런 계략을 꾸미고 계셨군요.”

“계략이라니?”

“도련님이 해산물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셨죠? 그런데 오전에 디트리히 님과 디저트를 함께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일부러 오징어가 든 음식을 먹게 놔둔 저의가 궁금하군요.”

시녀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온 건지, 소년은 디트리히가 아픈 원인을 상세히 꿰뚫고 있었다.

생각지 못한 반박에 시안나는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시안나와 디트리히가 오전에 함께 디저트를 먹었다니.

그녀는 알레르기가 날 걸 알고도 방치한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

‘디트리히가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다고 호언장담했으면서 불과 몇 시간 전에 몰랐었다는 상황이잖아. 대체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그건 빙의하기 전의 일이라고 반박할 수도 없고!

마땅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시안나의 망설임을 알아챈 건지, 소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죽거렸다.

“역시, 시안나 님은 알레르기 반응이 나올 걸 아시고도 방치하신 거군요. 지금까지의 일을 공작님께 보고하겠습니다.”

이쯤 되면 헤이스는 시안나에게 그냥 억하심정이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왜 증거도 없으면서 자꾸 시비를 거는 걸까?

그래도 긱스 공작에게 시안나의 만행이 들어가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자칫하면 저택에 쫓겨나 영영 디트리히를 못 볼 수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