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9화
아체리아는 멀뚱히 서 있는 소냐를 내버려 둔 채 램프 하나만 들고서 어둑한 재료 창고 안으로 척척 걸어 들어갔다.
“소냐, 이것 좀 받아 주겠니?”
“아, 네!”
그녀가 가지고 나온 것은 차가운 우유와 꿀단지, 그리고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자루 하나와 잼 병, 저녁에 먹고 남은 스콘이 든 바구니였다. 소냐는 무심코 자루를 열어 보았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마님, 이 안에 든 건 뭔가요?”
자루 안에 든 것은 빨갛고 작은 열매였다. 그런데 쪼글쪼글하게 말라 물기라고는 없었다.
“그건 대추 열매야. 본 적 없니?”
“대추…… 열매요? 아뇨, 한 번도…… 이건 뭐에 쓰나요?”
“차를 끓이기도 하고, 꿀에 절여서 먹을 수도 있어. 물론 그냥 먹을 수도 있지.”
“그냥 먹어요? 이걸요?”
“응. 달콤하고 맛있어. 하나 먹어 보렴?”
소냐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열매를 살짝 베어 물어 보았다. 껍질은 약간 질긴 감이 있지만 속살은 쫀쫀하고 의외로 달콤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맛있어요, 마님!”
“그렇지? 생긴 건 그래도 아주 맛있어. 아몬드나 호두처럼 그냥 먹어도 괜찮은걸.”
“이런 게 있다는 건 처음 알았어요. 이걸로 소스를 만들 수는 없을까요?”
아체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묻는 소냐를 돌아보았다.
이 아이는 열정이 있구나. 가르치는 재미도 있겠어.
아체리아는 그런 생각을 했다.
“소스를 만들어도 괜찮겠지. 그럼 뭘 넣어서 소스를 만들면 좋을 것 같니? 어디에 곁들일까?”
“음…… 달콤한 맛이 나니까 양고기나 송아지 고기에 곁들여도 좋을 것 같아요. 살짝 구운 다음에, 허브를 넣고 걸쭉하게 소스를 만들어서 곁들이는 거죠.”
“그 밖에는?”
“그 밖에는…… 아, 옥수수나 감자 수프에 가볍게 썰어서 올려도 좋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건 씹는 맛이 있잖아요? 쫄깃쫄깃하고…… 그러니까 수프의 심심한 식감을 잘 보조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수프에 넣는 건 나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네 말을 들으니까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소냐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름이잖아요? 이걸로 시원한 음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레몬 같은 건 좀 안 어울리겠지만…… 시나몬이나 허브를 넣고 상쾌한 맛의 음료를 만든 다음에, 이 열매를 꿀에 절여서 타 먹거나 살짝 썰어 넣어도 맛있을 것 같아요.”
“그런 것도 괜찮겠는걸. 공작저에는 더위를 타는 고용인들이 많아. 늘 레몬주스 같은 것만 만들었는데…… 허브주스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지요? 분명히 인기가 있을 거예요.”
그러는 동안 아체리아는 차가운 우유를 데우고, 대추 열매를 몇 개 꺼내어 씨를 발라내더니 절구에 꿀과 함께 넣고 빻았다. 그것이 걸쭉하게 변하자 우유 속에 넣어 달콤하게 만들었다.
“잠이 잘 오지 않을 때는 대추와 꿀을 넣은 우유를 마시면 도움이 돼. 그리고 체리도.”
“체리요?”
“응. 체리를 먹으면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하거든.”
아체리아는 잼 병을 열어 데운 스콘 옆에 곁들였다. 향긋한 체리 냄새가 피어올랐다.
“얼마 전에 내가 만들어 둔 건데, 이제 반쯤 남았네. 체리가 다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더 잼을 만들어야겠다.”
소냐는 아체리아가 건네주는 스콘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농후할 정도로 새콤달콤한 체리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지고, 스콘 역시 새로 데운 것임에도 부드럽게 부스러져 고소했다.
“저, 마님께선…….”
“응?”
“어떻게 이 댁의 요리사가 되셨어요? 수석 요리장이셨다고 들었는데…….”
공작저에서 하루를 보내는 동안, 소냐는 루비로부터 아체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내내 들었다. 이전 수석 요리장이었다는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요리 대회에 나갔던 이야기, 식사를 끔찍하게도(!) 싫어하던 공작님이 아체리아의 요리는 맛있게 먹고 건강해졌다는 이야기…….
그야말로 아체리아로 전기문 한 편을 써도 될 정도의 이야기였다.
“난 어릴 때부터 이 집에서 요리사로 일했어.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는데, 선대 공작 부인께서 날 데리고 오셨거든.”
“아, 세상에…… 죄송해요, 전 그런 건 몰랐는데…….”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니? 그런 말 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튼…… 나는 어려서부터 요리하는 걸 좋아했어. 물론 먹는 것도 좋아했지.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게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늘 살았어.”
아체리아는 꿀과 대추를 넣은 우유를 휘휘 젓더니 거름망에 한 번 걸러 냈다.
“공작 부인이 주방에 드나든다고 입방아 찧어 대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그런 것 신경 안 써. 이건 내 생활이고, 공작님께서도 내 요리를 좋아하시니까. 그러니까 너도 열심히 하렴. 언젠가는 네 요리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 순간의 아체리아는 ‘공작 부인’으로서의 가면을 한 겹 벗어 버린 것 같은 말투였다. 소냐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체리아는 준비한 것들을 트레이에 얹어 주방을 나서면서 미소를 지었다.
“우유 한 잔 더 만들어 놓았으니 마시고 자렴. 스콘은 가져가서 먹어도 좋아. 내일 보자꾸나.”
“아, 안녕히 주무세요.”
소냐는 따뜻한 온기가 어린 우유 잔을 내려다보다 한 모금 마셔 보았다. 우유는 달콤하고 따뜻해, 금방이라도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침실로 올라간 아체리아는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클라우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클라우스가 물었다.
“어디 갔다 와?”
“잠이 안 오신다면서요. 그래서 잠이 오실 만한 것 좀 만들어 왔지요.”
아체리아는 들고 있던 트레이를 침대 옆의 협탁에 내려놓고는 클라우스의 허벅지를 베고 가로로 길게 누웠다. 침대 밖으로 빠져나온 발목이 달랑달랑 흔들린다.
“우유 좀 드시고 주무세요. 스콘이랑 체리 잼도 있어요.”
“밤마다 날 이렇게 먹여도 괜찮겠어? 배가 툭 튀어나온 영감이 되면 어떡하려고.”
“당신 배가 툭 튀어나올 정도로 먹이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소리 내어 웃은 아체리아의 손끝이 클라우스의 배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바깥 공기에 노출되어 차가운 손끝이 피부에 닿자 오한이 드는 듯, 클라우스는 잠시 어깨를 움츠렸다.
“새로 요리사가 들어왔다면서. 어떤 것 같아?”
“아, 소냐요? 괜찮은 아이인 것 같아요. 조심성도 있어 보이고. 요아킴 말로는 믿을 만한 아이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추천장을 가지고 왔다면서?”
“별걸 다 아시네요. 요리 학교를 졸업한 아이거든요. 거기서도 성적이나 태도가 좋았다고 추천장이 왔어요. 하지만 뭐…… 추천장만으로 다 믿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실제로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지.”
“네가 가르치면 잘 하겠지.”
“이젠 수석 요리장은 제가 아닌걸요. 프레드 씨가 잘 가르치실 거예요.”
몸을 일으킨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에게 우유가 든 잔을 건네주었다. 우유는 따뜻했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익숙한 냄새가 나는데. 전에 봤던 그 이상한 열매를 넣은 거지?”
“대추예요. 그리고 이걸 드시면 잠이 잘 온다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괴상하게 생겼어. 꼭…….”
“어허, 조용히 하고 일단 드세요.”
아체리아는 클라우스가 다른 말을 더 꺼내기 전에 얼른 그의 입에다 우유 잔을 대어 주었다. 클라우스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잠자코 우유를 마셨다.
“스콘도 드실래요?”
“아니, 그건 됐어.”
“그럼 우유에 잼을 타 드릴까요?”
“이 우유에 체리 잼을? 맛있을 거 같지가 않은데. 무슨 마녀의 비약 만들듯이 그런 말 하지 마.”
반쯤 마신 우유 잔을 내려놓은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몸을 당겨 다시 허벅지 위에 눕혔다. 그러고는 읽고 있던 책을 펼쳐 들었다.
“무슨 책인데 그렇게 열심히 읽으세요?”
“그냥 시시한 이야기책이야.”
“시시한 이야기책인 것치고는 매일 밤 읽고 계시잖아요.”
“들어 보고 싶어? 읽어 줄까?”
아체리아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냉큼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별로 재미없을 것 같아.”
“이럴 때 좋은 아내라면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거 아닌가?”
“좋은 아내가 아닌 걸로 해요, 그럼.”
놀리는 듯한 말투에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코끝을 쥐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키득거리며 클라우스의 손을 뿌리친 아체리아가 말했다.
“조프리가 나날이 당신을 닮아 가요. 어떡하실 거예요?”
“내 아들인데 날 닮아야지, 그럼 누굴 닮아?”
벌떡 몸을 일으킨 아체리아가 클라우스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당신 닮아서 편식만 늘어 간단 말이에요. 오늘도 완두콩이랑 당근을 몰래 땅에 파묻었다고요.”
“저런, 그걸 들키다니. 녀석도 아직 멀었군.”
“저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내일부터는 당신도 한마디씩 해 주세요. 깨끗하게 다 먹으라고. 그리고 모범도 보이시고요.”
“난 다 컸잖아.”
아체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다 큰 어른은 편식해도 되는 거 아니었어?”
클라우스가 능청맞게 웃으며 말했다. 아체리아는 얄미워 죽겠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가, 그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협탁 위로 던져 버렸다.
“왜 그래?”
“약속해요. 내일부터 편식하지 않고 깨끗하게 드신다고.”
“이래 봬도 요새는 거의 가리지 않고 먹는 편인데…….”
“병아리콩 같은 건 은근슬쩍 남기시잖아요! 그러니까 조프리가 그러는 거라고요. 얼른 약속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오늘 안 재울 거예요.”
클라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체리아의 허리를 슬그머니 감싸 안은 그가 말했다.
“안 재우면 나한테는 더 좋은 거 아니야?”
“당신 귓가에서 레시피를 마구 읊어 댈 거예요. 밤새도록 소꼬리찜을 어떻게 만드는지 배우고 싶으신 게 아니면 약속하시라고요.”
계속 능청을 떨었다가는 진짜로 그래 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어조였다. 클라우스는 키득거리고 웃으며 아체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코끝과 입술 위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알겠어. 내일부터는 음식 안 가릴게.”
“약속하시는 거죠?”
“약속해. 접시까지 싹 핥아 먹겠다고 약속하지.”
아체리아는 그제야 킥, 하는 소리를 내고 웃으며 클라우스에게 길게 입을 맞추었다.
비스듬히 열린 창문으로 등나무꽃 향기가 슬그머니 번져 들어오는 여름밤이었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