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43)화 (143/144)

외전8화

어리둥절해하는 소냐 옆으로 요아킴이 슬쩍 다가왔다.

“깜짝 놀란 표정이네?”

“네? 아, 저어, 네…… 고, 공작 부인…… 마님께서, 늘 이렇게 요리를 점검……하시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여간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귀부인들 중에 고용인들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공작 부인도 그런 사람인 걸까?

아니, 하지만 요리사들이 하는 일은 잘 알지 못하면 간섭하기도 힘든 일일 텐데…….

“점검이라기보다는 같이 의논을 하시는 거지. 공작 부인께서도 같이 요리를 하실 때가 종종 있으시거든.”

“네?”

소냐가 소리를 지르다시피 대꾸하자 프레드와 공작 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있어?”

공작 부인이 물었다. 소냐는 얼른 요아킴의 눈치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님.”

옆에서 요아킴이 키득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소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작게 투덜거렸다.

“부주방장님, 그런 농담을 하시면 어떻게 해요. 깜짝 놀라게…….”

“농담 아닌데? 내가 왜 그런 농담을 하겠어?”

“마, 말도 안 되잖아요! 공작 부인씩이나 되시는 분이 어, 어떻게 주방에서 직접 요리를…….”

“우리 아체리아 마님께서는 하셔.”

그렇게 말하는 요아킴은 마치 공작 부인이 제 누님이라도 되는 양 뿌듯한 표정이어서, 소냐를 더욱 당황케 만들었다.

본격적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하자 주방은 매우 바빠졌다. 수석 요리장인 프레드에서부터 견습인 소냐에 이르기까지 단 한 사람도 쉬거나 놀고 있을 수 없었다.

특히 신참인 소냐는 더 정신이 없었다. 물건들의 위치를 파악하면서 동시에 심부름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소냐, 여기 있는 그릇들을 저쪽으로 치워야지!”

“소냐, 소스 통 가지고 오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소냐!”

‘정신이 하나도 없어!’

소냐는 눈이 핑핑 돈다는 생각을 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요리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는 이렇게까지 정신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그야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완벽하게 익혀 놓았고, 또 실전이 아닌 만큼 선생님들도 혹독하지 않았다.

……아니, 혹독하지 않다는 건 취소. 선생님들도 학교의 학생들을 충분히 엄하게 가르치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따라가기는 어려웠다.

‘하긴, 학교에서도 이런 식으로 가르치면 누가 남아 있겠어? 다들 자퇴해 버릴 거야.’

수석 요리장인 프레드는 요리를 하면서 나오는 지저분한 그릇들이 쌓여 있는 것을 봐 주지 못하는 성미였다. 소냐는 정신없이 설거지를 하고, 그릇을 정리하고, 필요한 심부름이 있으면 또 달려가고…… 그러는 동안 요리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무슨 비법을 쓰는지는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평생 여기서 접시만 닦게 되겠어!’

그렇게 생각한 때였다.

“소냐, 이쪽으로 와.”

요아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름기가 가득 묻은 칼을 씻고 있던 소냐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얼른 그에게로 다가갔다. 다른 요리사들도 모두 모여 있었다.

배가 갈라진 거위 안에 프레드가 각종 속 재료를 채워 넣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평소 소냐가 알던 거위 구이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아! 층층이…….”

소냐가 조그만 소리로 감탄하자, 프레드가 픽 웃었다.

“그래, 맞다. 공작저에서 거위 구이를 만들 때는 아무 재료나 다 섞어서 집어넣지 않아. 이런 식으로 속 재료를 색깔별로 나눈 다음, 층층이 쌓는다. 이러면 식탁에서 처음으로 배를 갈랐을 때 보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지.”

향신료와 올리브 오일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프레드는 몇 가지나 되는 재료를 쌓으면서도 거위의 살 한 점 상하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이렇게…….”

누군가 프레드에게 흰 덩어리를 건넸다. 치즈였다. 움푹하게 팬 가운데 부분에 치즈 덩어리를 넣고, 배를 다시 꼼꼼하게 꿰맨 다음, 그 위에 다시 허브를 찧어 넣은 오일을 바른다.

“앞으로 너도 저런 걸 만들어 보게 될 거니까 봐 두라고 부른 거야.”

요아킴이 말했다. 소냐는 얼굴이 빨개진 채 오븐 속으로 들어가는 거위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 * *

요리가 서빙되어 나간 뒤, 요리사들도 주방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의 메뉴는 양고기 스튜로 만든 리소토와 마렌이었다.

배가 고팠던지라 소냐는 허겁지겁 식사를 했다. 그러는 사이 드디어 심부름을 갔던 루비가 돌아왔고, 그녀와도 통성명을 할 수 있었다.

“굉장히 좋은 요리 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다면서?”

“네? 아…… 그, 그렇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공작 부인께 들었지. 네 추천장을 받아 보시고는 아주 기대하셨거든.”

“기대……하셨다고요?”

“응. 공작 부인은 요리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셔. 네가 학교에서 어떤 것들을 배워 왔을지 묻고 싶어 하시던데.”

소냐는 이번에도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귀부인들이 그런 데에 관심을 가지나?

“저…… 루비 씨, 공작 부인은 어떤 분이세요?”

“응? 어떤 분이냐니?”

“아뇨…… 저, 아까 보니까 주방에도 척척 들어오시고, 보통 귀부인들은 그러지 않는다고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요리에 대해서도 수석 요리장님이랑 같이 이야기하시고…….”

“아하, 그 얘기구나. 음…… 우리 마님께선 확실히 다른 귀부인들하고는 좀 다른 면이 있으시지. 우리 마님은 원래 이 댁의 수석 요리장이셨어.”

소냐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나, 곱씹어 보는 듯한 태도였다.

“수석…… 요리장이요? 공작 부인께서…… 요리사셨단 말씀이세요?”

“넌 나이가 어려서 그때 일을 잘 몰랐을 수도 있겠구나. 그래, 맞아. 아체리아 님은 원래 공작저에서 요리사로 일하셨어. 그러다 공작님께서 아체리아 님과 사랑에 빠지시는 바람에 로맨스가 탄생하게 된 거지. 얼마나 난리들이었다고!”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지가 않지? 하지만 우리 아체리아 님은 해내셨다니까. 우리 공작님께서는 옛날에 몸이 아주 허약하셨는데, 마님의 요리를 드시고 지금은 아주 튼튼하셔.”

루비는 마치 제 일인 양 뿌듯하게 말하고는 얼른 식사를 마쳤다.

소냐가 견습이라고 해서 모든 설거지를 혼자 도맡아 하지는 않았다. 요리사들 사이에서 당번이 있어 설거지를 하는 인원도 따로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당번은 요아킴이었다. 부주방장도 설거지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요아킴은 씩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원래는 오랫동안 견습이었어. 마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초보 요리사부터 시작해서 차츰 올라올 수 있었던 거지.”

“마님께서 도와주세요? 어떻게요?”

“음…… 그건 비밀이야. 나한텐 좀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고……. 아무튼, 마님은 좋은 분이야. 그리고 여기 있는 요리사들 중에서 제일 요리를 잘하시니까, 너도 이따금 모르는 게 있으면 여쭤보도록 해. 실력이 빨리 늘 거야.”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투성이였지만 소냐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 화려하게 생긴 공작 부인이 사실은 이곳의 요리사였다니.

아니, 다들 짜고서 신입을 놀려 먹는 건 아닐까?

“방금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

속을 찔린 소냐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표정이 딱 그런 표정이었는데. 못 믿겠다면 이따 밤에 주방에 잠시 내려와 봐.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재밌는…… 거라고요?”

요아킴은 그 이상 알려 주지 않고 설거지를 계속했다. 소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의 말이 무슨 뜻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밤에 내려와 보라고? 대체 왜? 주방의 요정이라도 나타나나?’

* * *

한밤중이 되고, 하녀들이 벽에 걸린 촛불을 끄기 시작하자 공작저는 깊은 침묵에 잠긴 것처럼 조용해졌다.

이런 밤이면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사감 선생님 몰래 방의 불을 켜 놓고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수다를 떨곤 했다. 그러나 루비는 취침 시간이 되자마자 일찌감치 잠드는 체질인지, 이불을 뒤집어쓴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소냐는 전혀 잠이 오지 않는 상태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낯선 침구의 냄새, 낯선 풍경…… 그런 것들 때문인지 긴장이 되어서 더 잠이 오지 않았다.

‘안 돼, 이대로 가다가는 내일 아침에 늦잠을 자게 될 텐데……’

고민하던 소냐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리 학교에 다닐 때, 셀러리와 바나나를 먹으면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까 분명, 선반에 바나나가 한 송이 남아 있는 걸 봤는데…… 먹어도 괜찮은 거겠지? 부주방장님께서 간식 같은 건 알아서 먹어도 좋다고 하셨으니까…….’

소냐는 발소리를 죽여 가며 천천히 주방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꼭 도둑질이라도 하러 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잊기로 했다.

주방 역시 어둠에 잠겨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손에 들고 있는 램프를 조심조심 뻗어 가며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여기서 뭐 하니?”

“으악!”

얼마나 놀랐는지, 소냐는 그만 들고 있던 램프를 바닥에 내리칠 뻔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후에는 더욱더 놀라고 말았다. 주저앉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마, 마…… 마님?”

“너는…… 아, 그래. 새로 온 아이구나. 소냐라고 했지?”

“그…… 그게, 어, 네.”

“많이 놀랐어? 미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배고프니?”

배가 고프냐고?

소냐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이럴 때는 보통 쥐 잡듯이 혼을 내지 않나? 귀족들은 고용인들에게 집 안의 모든 살림을 맡겨 두고서도, 그들이 집 안을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건 끔찍하게 싫어하니까.

“배…… 배가 고픈 게 아니라, 잠이 오지 않아서, 저, 괘…… 괜찮다면 셀러리와 바나나를 좀…….”

“셀러리와 바나나? 그걸 먹으면 잠이 와?”

“……요, 요리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습니다.”

“신기한걸. 난 처음 들어.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나은 게 있지 않겠어?”

“네? 더 나은…… 거요?”

“이리 따라와.”

공작 부인은 하늘하늘한 나이트가운을 입은 채 추운 주방 안으로 거리낌 없이 발을 들였다. 소냐는 여전히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은 기분으로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님께서도 밤잠을 잘 못 주무실 때가 많거든. 그럴 때 내가 항상 만드는 게 있어.”

“지…… 직접 만드신다고요?”

“그래. 내가 이곳의 요리사였다는 말 듣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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