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릴리엇? 이 사람은 도대체…….”
“소개할게요. 이쪽은 아체리아 클링 양. 장차 네가 모실 분이자 공작 부인이 되실 아가씨란다. 아체리아, 이쪽은 헬레이나 벤스예요. 란츠호프 후작령을 관리하는 벤스 남작의 차녀죠.”
헬레이나 벤스라는 소녀는 이제 겨우 열일곱, 열여덟쯤 되었을 법했다. 수도에서는 보기 드문 단발에, 커다란 눈동자는 약간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입고 있는 옷은 아름다우면서도 단정했지만 품이 좀 넓어 보였다. 하늘하늘한 레이스 소매 바깥으로 찻잔이나 들 수 있을까 싶도록 마른 손목이 슬쩍 엿보였다.
“이 아이를 아체리아의 시녀로 써 주었으면 해요. 얌전하고 총명한 아이니까, 분명 아체리아에게 많은 도움이 되어 줄 거예요.”
“아, 아니, 잠깐만요. 릴리엇, 이렇게…… 갑자기요? 저, 저는 이분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오늘 처음 만났는데 모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차차 가까워지면 되죠. 클라우스에게는 내가 돌아가면서 말을 해 둘게요. 오늘부터 아체리아가 데리고 있으면 좋겠는데, 어때요?”
아체리아는 당최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헬레이나라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가엾은 소녀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게 아닌가?
“저, 저기…… 헬레이나? 저기…… 표정이 왜…….”
아체리아가 더듬더듬 묻자, 헬레이나는 가슴 앞으로 양손을 꼭 잡아 모으면서 새끼 사슴처럼 가련한 눈망울을 동그랗게 떴다.
“고, 공작 부인, 제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시겠지만…… 그, 그래도 옆에서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셨으면 합니다. 부, 부디…….”
“아니, 아니……! 난 아직 공작 부인이 아니에요! 저기, 우, 울지 말아요! 울지 말고 이리 와서 좀 앉아요! 차! 차라도 마실래요?”
한동안 허둥지둥하는 아체리아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공작 부인 옆에 앉을 수 없다며 버티는 헬레이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이긴 것은 아체리아였다. 막무가내로 끌어다 앉혀 놓고 차를 한 잔 주자, 헬레이나의 마른 뺨에 발그레하게 홍조가 돌았다.
릴리엇은 헬레이나를 맡겨 놓고는 오늘은 볼일이 있다며 일찍 일어섰다. 아체리아가 손짓, 발짓으로 제발 가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기만 한 채 매정하게도 방을 나가 버리고 말았다.
졸지에 낯모르는 사람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게 된 아체리아는 어색함 때문에 질식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루비 같은 신참 요리사거나, 적어도 새로 들어온 고용인만 되었어도 이렇게까지 어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제 손으로 옷을 갈아입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주방에 들러 아침 식사가 준비되는 것도 기웃거리다 왔는데 갑자기 시녀라니!
“저…… 헬레이나?”
“헬렌이라고 불러 주세요, 부인.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불렸답니다.”
“알겠어요, 헬렌. 저기, 난 아직 ‘부인’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냥 아체리아라고 불러도 돼요.”
순간, 헬레이나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떠서 되레 아체리아가 움찔했다.
“그러니까…….”
“그럼 아체리아 님이라고 부르는 건 괜찮을까요?”
“되도록이면 ‘님’ 자도 빼 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는 없어요. 아체리아 님은…….”
그때 누군가 다시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클라우스였다. 릴리엇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것인지, 그는 낯선 헬레이나를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당황한 쪽은 오히려 헬레이나였다. 그녀는 한동안 클라우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찻잔을 내려놓고 발딱 일어서더니 허리를 깊게 숙여 절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비스몽트 공작님. 처…… 처음 뵙겠습니다. 헬레이나 벤스라고 합니다.”
“릴리엇이 데려왔다는 시녀가 너로군.”
“그…… 그렇습니다. 저, 제가 정말 열심히 부인을 보필할 테니…….”
“아체리아는 다른 귀부인들과는 다르니 잘 맞춰 주고, 많이 도와주도록 해.”
“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헬레이나의 양 볼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클라우스는 아체리아를 보고 가볍게 턱짓을 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냐는 의미였다.
“헬레이나…… 헬렌, 잠시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아체리아는 어떻게 좀 해 달라는 눈빛으로 클라우스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클라우스 님, 저 정말 시녀는 필요 없어요.”
“릴리엇이 모처럼 소개해 준 아가씨니까 데리고 있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아니, 진심이세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을……!”
“누구나 첫 번째 만남은 초면이지. 그리고…….”
클라우스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한 번 두리번거리고는 아체리아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헬레이나에게는 네가 필요할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헬레이나의 도움을 받았으면 받았지, 제가 헬레이나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그건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어.”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는 마치 ‘수고하라’고 격려라도 하듯이 아체리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린 뒤 자리를 떠 버렸다.
멍하니 서 있던 아체리아는 결국 어쩔 도리 없이 방으로 도로 들어오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헬레이나는 자리에 가만히, 마치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을 할 법도 하련만.
“저기, 헬렌.”
“네, 아체리아 님.”
“무슨 이유로 란츠호프 후작님이 당신을…… 소개해 준 건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시녀를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저 자신이 귀족이 아니에요. 혹시 그건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아체리아 님. 란츠호프 후작님께서 중요하게 알아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설명해 주셨어요. 그리고…….”
“그리고?”
아체리아는 고개를 숙인 헬레이나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진 것을 눈치챘다.
“헬렌,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서 여기로 오게 된 건가요?”
그때였다. 조가비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던 헬레이나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체리아는 당황한 나머지 손수건을 꺼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맨손으로 헬레이나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왜, 왜 그래요? 내가 뭐…… 말실수라도 했어요?”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그, 그게, 거, 걱정을 해 주시는 게…… 기뻐서. 그래서 그래요.”
아무래도 평범한 사연의 아가씨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체리아는 헬레이나가 눈물을 닦고 울음을 그칠 동안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겨우 진정한 헬레이나는 눈가와 코끝이 전부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은, 저…… 지, 집에서…… 도망쳤어요.”
아체리아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집에서 도망……을 쳐요? 왜요?”
“아, 아버지께서…… 절, 저를…… 칼루타 백작과 결혼시키시려고 해서요. 그, 그분은 올해 쉰이 넘은 분이세요.”
“아니, 아버지가 제정신인 거 맞아요? 쉰이 넘은 영감한테 딸을…… 헬렌, 올해 몇 살이죠?”
“열여덟 살이에요.”
“스무 살도 안 된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한다고요? 말이나 돼요?”
아체리아가 격분하자 헬레이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다시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저, 저희 집이…… 집안이 좀, 어려워요. 작위는 있지만, 그게…… 이래저래 사정이 있었거든요. 칼루타 백작은…… 앞서 부인이 두 분 계셨는데, 한 분은 돌아가셨고 한 분과는 이혼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저, 저를…… 신붓감으로 주면 지, 집의 재정을…… 도와주겠다고 하셔서 아버지가.”
“재정 아니라 재정 할아버지를 도와준다고 해도 안 보내야지! 아버지가 제정신 아닌 거 맞잖아요!”
헬레이나는 울음이 가득한 눈을 하고서도 입술을 움츠리며 웃었다.
“그런…… 결혼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 그렇지만 저는 정말이지…… 그분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도 그럴 게 어릴 때부터…… 친척 아저씨처럼 생각해 온 분인지라 도무지…… 그,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고…….”
“그런 일이요?”
되물었던 아체리아의 표정이 와락 찡그려졌다. 아마 부부 관계를 말하는 것이리라. 친척 아저씨처럼 생각했다면 그쪽에서도 헬레이나를 조카처럼 가까이 대했다는 것일 텐데, 그런 애와 결혼을 하자고 해?
쉰이 넘은 인간이 열여덟 살짜리를 상대로?
“징그러워 죽겠네. 호박으로 뒤통수를 확 찍어 버려야 해요, 그런 놈은.”
“……아무튼, 그래서…… 제가 란츠호프 후작님께 도, 도와주실 수 없겠느냐고 편지를…… 쓴 거예요. 그랬더니 후작님께서 저를 여기로 데리고 와 주셨고요…….”
이제야 릴리엇이 다짜고짜 헬레이나를 데리고 온 것이 이해가 되었다. 물론 헬레이나의 부모는 노발대발 난리가 났겠지만, 란츠호프 후작의 명령인 데다 공작 부인의 시녀로 데리고 가겠다는 말에 화를 내는 이상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란츠호프 후작님과 공작 부인은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아마 계속 집에 있었더라면…… 전 못 살았을 것 같아요. 너무 끔찍해서.”
헬레이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마쳤다.
‘이런 얘길 듣고 어떻게 돌려보내겠어?’
아체리아는 허탈한 심정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클라우스도 이 사실을 릴리엇에게 들어 전부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알겠어요.”
아체리아가 말했다.
“당신을 내 시녀로 쓸게요.”
“저,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전에 뭣 좀 먹고 살 좀 찌는 게 좋겠어요. 맙소사, 이 집에서 제일 깡말랐던 사람을 1년 내내 먹여서 번듯한 꼴로 만들어 놓았더니만, 먹일 사람이 또 늘었네요.”
보아하니 헬레이나는 뭘 제대로 먹으며 산 것 같지도 않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니 배불리 먹는 것도 쉽지 않았으리라. 게다가 그 칼루타인지 뭐인지 하는 놈과 혼삿말이 오갔을 즈음부터는 입맛이 바닥까지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따라와요.”
아체리아가 벌떡 일어서며 말하자 헬레이나는 영문도 모른 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어디로 가시나요?”
“어디긴요. 헬렌은 이제 내 시녀가 되었으니, 내 진짜 성城이 어디인지 알려 줘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