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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81)화 (81/144)

81화

아체리아가 말했다.

“요리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왕녀님…… 아니, 폐하께서 귀족들을 많이 쫓아내셨다고요.”

“그런 소문까지 알고 있단 말이야? 의외인데.”

“고용인들 사이에서 귀족님들에 대한 소문이 얼마나 빨리 퍼지는데요.”

“그럼 나에 대한 소문도 퍼지고 있겠군. 얼마나 혹평일지 궁금한걸.”

농담이랍시고 한 말이었는데 아체리아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공작님에 대한 소문에 대해서도 좀 알아볼까요?”

“뭣 하러?”

“누가 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욕을 하고 있으면, 네가 가서 혼내 주기라도 하게?”

“솥에다 머리를 거꾸로 넣어 주면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지 않겠죠.”

험악한 협박에 클라우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얼굴이 웃긴다는 듯, 아체리아는 목소리를 죽여 키득거렸다.

“농담이에요.”

“우리 집 요리사들의 안위가 걱정된 건 이번이 처음이야.”

“농담이라니까요! 전 그런 짓 하지 않아요.”

웃고 떠드는 동안 클라우스는 야식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아체리아는 뿌듯한 표정으로 빈 접시를 챙겨 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히 주무세요, 공작님.”

클라우스는 잠시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머뭇거렸다. 그러나 결국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 놓지는 못하고 희미한 웃음만 띠었다.

“그래, 너도.”

미소 짓는 얼굴 위에 촛불이 은은하게 일렁거린다. 그 얼굴을 보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졌을 법도 하건만, 아체리아는 살짝 달아오른 귀뺨을 숨기듯이 고개를 돌리고 방을 나가 버렸다.

* * *

필리파가 새 왕으로 등극한 이후 처음으로 열린 왕성 연회는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다.

수도의 모든 귀족들뿐만 아니라 지방에 살고 있는 귀족들에게까지 초대장이 뿌려졌다. 사교계에 데뷔할 시기가 임박한 딸을 둔 귀족 집안에서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시내의 의상실 주인들을 닦달해 최고로 좋은 드레스를 입히려 안간힘을 썼다.

선대왕이 병을 앓기 시작한 후로 좀처럼 개방되지 않았던 대연회장이 개방된 왕성은 마치 광장처럼 시끌벅적했다.

클라우스는 사람들을 피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 서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가씨들은 끊임없이 그에게 춤을 청해 왔는데, 전부 다 쳐낼 수 없어 두어 번 춤을 추고 나니 그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 가기만 했다.

“인기가 좋은데.”

피로를 갈무리하며 서 있으려니, 어느새 에른스트가 곁에 다가와 있었다. 클라우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와 가볍게 건배하고는 향긋한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나보다 인기가 많은 분이 저기 있지 않나.”

클라우스가 가리키는 곳에는 역시나 닐스가 있었다. 그는 마치 연회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신나게 떠들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네 외숙부님은 나도 아주 어렸을 때 한 번인가 스쳐 지나가듯 봤을 뿐인데, 얼굴을 보고 아주 놀랐어. 네…….”

“외조부님과 아주 똑같이 닮았지. 나도 놀랐네.”

클라우스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에른스트는 샴페인 한 잔을 금세 비우고는 멀찍이 선 채 머뭇거리는 아가씨들을 향해 슬쩍 미소를 건넸다.

“시드레 백작 쪽의 사람들이 흥미로운 이야길 하고 있더군.”

에른스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부 지역의 탄광 개발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던데, 시드레 백작가와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던 어느 집안의 영지에서 꽤 희귀한 사파이어가 채굴된 모양이더라고.”

“폐하의 눈에 띌까 큰 소리로 떠들지 못해 유감이겠는데.”

“그렇지. 비록 우리 폐하께서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계시지만 말이야. 지금도 봐.”

에른스트의 말대로, 필리파는 닐스와 시드레를 위시하고 있는 귀족들의 무리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다음에는 저들 중 누구를 떨어트릴까, 고민하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클라우스는 다른 샴페인을 권하는 시종을 손짓으로 물리치고는 팔짱을 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보수파를 몰아내는 것은 누구의 생각이었나? 폐하의 생각? 아니면 에른스트, 자네 머리에서 나온 건가?”

“설마. 난 이렇게까지 골치 아픈 일에는 끼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폐하께서도 거기까지 내게 말씀하신 적은 없네.”

“그럼 모두가 폐하의 계획이었단 말이군. 대체 언제부터 이런 판을 준비하신 건지 궁금해.”

“동감이야. 그리고…….”

에른스트의 말끝이 잠시 흐려졌다. 클라우스는 왜 그러냐는 듯이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언제 끝날지도 궁금하고.”

그런 말을 하면서, 에른스트는 속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필리파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난 저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가 더 궁금하군. 날 힐끔거리는 것 같지 않나?”

클라우스가 무표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그의 손짓은 닐스와 보수파 귀족들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닐스는 클라우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시드레가 불러다 놓은 귀족들 앞에서 클라우스에 대한 은근한 험담을 이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어차피 보수파 귀족 중에는 클라우스를 지지하는 사람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필리파와 척을 지게 된 마당에, 그녀의 새로운 신하로 등극한 그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조카 녀석이 제 쪽을 보고 있군요.”

닐스의 말에 몇몇 귀족들이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들 역시 클라우스 쪽을 힐끔거리다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비열하고 과장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참, 이런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저 아이가 공작이 된 것이 지금도 놀랍습니다. 어릴 때부터 워낙 무디고 약한 녀석이었으니.”

“제가 생각하기에는 엥글턴 후작께서 분통을 터뜨리셔도 시원찮을 판인데…….”

“그러게요. 사실 비스몽트 공작께선…… 요즘에야 좀 덜하시다지만 이전에는 정말로 허약하셨다잖아요? 완치가 안 되는 병에 걸렸다는 말도 심심찮게 돌았구 말이에요.”

자신이 굳이 많은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닐스는 예상보다도 상황이 쉽게 돌아가는 것에 속으로 헛웃음을 칠 지경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사실 클라우스에게 큰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순간에 위태로워진 자신들의 입지와 불안감이, 그 반대 입장에 있는 클라우스에게로 채찍처럼 뻗어 나가는 것이었다.

닐스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클라우스에 대한 은근한 험담을 사실인 양 퍼뜨릴 수 있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이제 클라우스가 비스몽트 공작가를 제대로 끌어 나갈 만한 인물이 아니라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시드레 백작이 원하는 그림이었다. 고여 있는 물속에 독 한 방울을 풀듯, 그녀는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사람들 사이에 닐스를 풀어놓음으로써 클라우스에게 흠집을 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복병은 늘 있게 마련이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닐스의 말을 들으며 북북 끓는 속을 추스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엥글턴 후작님, 듣고 있자니 말씀이 심하시네요.”

사람들의 고개가 목소리가 난 쪽으로 주르륵 돌아갔다. 릴리엇이었다.

그녀는 시선이 집중되었음에도 겁을 먹지 않고 당당하게 사람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이 많은 이들 중에서는 아직 가문을 물려받지도 않은 그녀가 앞으로 나서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명색이 외숙부시라는 분이, 이런 자리에서 조카에 대한 험담만 하고 계시는군요.”

“란츠호프 후작 영애, 뭔가 오해를 하나 본데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라오. 그 녀석이 어릴 때 어땠는지, 영애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만?”

릴리엇은 조그만 입술을 앙다물며 닐스에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클라우스가 어렸을 때 몸이 약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후작님께서는 마치 그것이 그의 잘못이기라도 한 양 말씀을 하고 계시니 제가 끼어드는 것이지요.”

“이런, 여러분. 제가 그렇게 말을 했습니까? 여러분도 설마 그렇게 들은 것은 아니시겠지요?”

불행하게도 릴리엇은 아직 닐스의 상대가 될 만한 깜냥이 아니었다. 보란 듯이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릴리엇이 어깨를 파르르 떠는 사이,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똑같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시드레가 끼어들었다.

“릴리엇 양께서는 비스몽트 공작님과 깊은 친분이 있으시다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연치 어린 아가씨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건 좀 무례한 행동이지 않나요?”

“뭐라고요? 시드레 백작님, 무례라고요? 지금 제게 무례를 논할 수 있는 분이 이 중에는 없다는 걸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폐하께서 베푸신 연회입니다. 그저 재미로, 또는 흥을 위해서 뜬소문을 떠드는 것이 뭐가 그리 잘못되었지요? 릴리엇 양도 아까 다른 아가씨들과 함께 사교계 가십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누시지 않았던가요?”

그것은 사실이었기에 릴리엇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닐스처럼 남을 까 내리는 종류의 소문은 아니었다. 릴리엇이 다시 항변을 하려는 찰나,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클라우스였다.

“릴리엇, 이쪽으로 와.”

“어머, 곤경에 빠진 아가씨를 구해 주시는 건가요, 비스몽트 공작님? 참으로 신사답기도 하셔라.”

시드레가 비꼬았지만 클라우스는 그녀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릴리엇의 손을 끌고 에른스트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가 버리고 나자,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닐스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이 저렇게 여자를 아끼는 성품인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 것치고 비스몽트 공작은 여전히 결혼할 의사가 없는 듯하던데. 설마 란츠호프 후작가와 무슨 혼담이라도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글쎄요. 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엥글턴 후작께서 집안의 어른이신데, 비스몽트 공작이 너무하는군요.”

닐스는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양 자연스럽게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 녀석이 혼사는커녕 헛된 여자에게 마음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생각 같아서는 몇 마디 충고라도 해 주고 싶지만 제 말은 들으려 하지 않으니.”

“여자요? 비스몽트 공작께도 여자가 있어요?”

말 얹기 좋아하는 귀부인이 눈을 빛내며 미끼를 물었다. 닐스는 난처하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젊은 녀석들이 다 그렇지요.”

“어머나, 대체 누구람? 란츠호프 후작 영애라면 엥글턴 후작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리 없고…… 어머나,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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